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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철의 한끗차이] 100송이 빨간 장미, 1달러 87센트, 그리고 순수한 여인

정보철 칼럼리스트

2026-10-12 10:35:27

[정보철 칼럼리스트] 100송이의 빨간 장미, 꽃이 너무 많아 그녀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가느다란 몸으로 그 많은 장미를 안고 있는 모습은 어딘가 비현실적이었다.

하지만 정작 나를 놀라게 한 것은 장미가 아니었다.
그녀의 머리카락이었다. 길게 찰랑거리던 머리카락을 싹둑 잘라버린 그녀는 전혀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 선머슴 같은 모습이었다. 그 순간 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 사람이 있었다.

“테스.”

‘가난한 사람에게 삶의 선택이란 얼마나 허구적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토머스 하디의 소설 ’테스‘였다.

그녀에게 긴 생머리는 단순한 머리카락이 아니었다.
그것은 젊음이었고, 아름다움이었고, 여자로서의 자존심과 긍지였다.

“어머니 생일이었어요.”
다이아나는 수줍게 말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내가 만난 우즈베키스탄 사람들에게 가족과 친지의 기념일은 각별한 의미가 있었다. 소중한 사람에게 선물을 건네고 마음을 표현하는 일도 중요하게 여겼다.
하지만 머리카락을 팔아서 생일을 준비했으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순간 오 헨리의 소설 ‘크리스마스 선물’이 떠올랐다. 시대와 장소는 다르지만, 주인공이 머리카락을 팔아 가족에게 선물을 준비한다는 이야기는 너무도 닮아 있었다.

소설은 삶의 다양한 가능성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때로는 현실과 소설이 경계가 모호해지는 일도 벌어진다. 하지만 소설 속 장면이 현실로 그대로 재현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그런데 그날, 내 눈앞에서 그런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크리스마스 선물’에서 ‘델라’는 남편 짐이 아끼는 금시계에 어울리는 금시계 줄을 사기 위해 긴 금발을 팔았다. 그녀가 가진 돈은 1달라 87센트뿐이었다. 오 헨리가 세상을 떠난 지도 백 년이 흘렀지만, 지금도 그의 무덤에는 방문객들이 남긴 1달러 87센트들이 수복이 쌓여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어머니가 병석에 누운 지 오래되었어요. 어머니를 단 하루만이라도 웃게 해 주고 싶었어요.”


그 말을 듣고 나니, 나는 견딜 수 없었다.
그녀는 애써 웃음 지었지만, 그 웃음 속에는 아련한 눈물이 고여있었다. 감정의 움직임에 둔감한 나조차 명백히 느낄 수 있을 만큼 강렬한 아픔이었다.

그녀가 머리카락을 팔아 받은 금액은 150만 숨. 얼마 안 되는 금액이었지만 그녀에게는 그 돈이 절실했다.
내게 도움을 청할 수도 있었을 텐데, 그녀는 차마 손을 내밀지 않고 자신의 소중한 것을 내놓았다. 150만 숨과 1달라 87센트의 무게를 함께 떠올리면서 나는 나지막하게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것은 거의 신음에 가까운 혼잣말이었다.

“내게 부탁이라도 해보지….”

이것이 장미 100송이 사건의 전말이다.

그 사건 이후 나는 곧바로 귀국했고, 그녀와 연락이 끊겼다. 한동안 그녀와의 기억을 잊고 살던 어느 날, 갑자기 그녀에게서 연락이 왔다. 그녀의 말투는 조심스러웠다. 무언가 말하기 어려운 것을 품고 있는 사람처럼 머뭇거렸다. 내가 재촉하고 나서야 겨우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아이가 코로나 19에 걸렸고, 치료비가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아이를 돌보느라 일을 하지 못했고 집세도 밀려 있었다. 그녀가 내게 요청한 돈은 겨우 300달러였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내 침묵은 거절이 아니었다. 송금 경로를 찾느라 하루가 걸렸다. 다음날, 나는 300달러를 보냈다.

그런데 그 무렵 내 사업에도 변화가 찾아왔다. 돈을 보낸 다음 날, 나는 사무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직원들을 내보내고 사무실 집기를 처분했다. 사업이 무너지는 순간, 내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은 이것이었다.

“참 다행이야. 그녀에게 보낼 300달러라도 남아 있어서….”

그녀와의 추억에 3년이란 시간이 쌓였다. 이후 소식을 들을 기회는 거의 없었다. 다만 한 번, 그녀는 ‘아이가 달리는 모습과 아이의 손을 잡고 놀고 있는 동영상을 보낸 적이 있었다. 나는 그 영상을 여러 번 돌려보았다. 영상에는 그녀가 처음으로 활짝 웃는 모습이 담겨 있었다.


그녀는 평소 잘 웃지 않았다. 언제나 무표정했고, 식사 자리에서도 말을 아꼈다. 음식에 잠시 입에 대었다가 다시 내려놓곤 했다. 식사시간 내내 무뚝뚝한 얼굴로 자리에 말없이 앉아 있었다. 식욕조차 그녀의 웃음을 만들어내지는 못했던 모양이었다.

그런 그녀를 웃게 만드는 것은 오직 아이였다. 내가 그녀를 처음 만났을 때도 아이가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때였던 것 같다. 아마 타슈켄트 공원에 있는 한 펍 레스토랑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녀는 한 시간도 채 지나기도 전에 아이를 돌보러 자리에서 일어섰다. 모임이 한창 무르익어가던 가운데, 그녀가 단호하게 돌아서는 뒷모습을 나는 지금도 똑똑히 기억한다.

아이의 아버지와 양육비에 관해 물었을 때 그녀의 대답은 간단했다. 그녀는 내 얼굴을 외면한 채 냉소적인 어투로, 그리고 남의 일이라도 되는 것처럼 말했다.

“그는 떠났다.”

그 이후 그녀는 아이의 아버지에 대해 한 번도 이야기하지 않았다. 나는 그녀의 무심하고 냉소적인 태도가 마음에 걸렸다.
그녀의 세상살이는 평탄하지 않았을 것이다. 세속적인 다툼에서 물러서는 모습이 묘하게도 너무나 나와 닮아 있었다. 자존심이 강하지만 성격이 모질지 못한 사람들. 그런 사람들에게 현실은 유난히 가혹하다.
그러나 나는 그녀에게서 특별한 자질을 보았다. 뜻밖의 유연함이었다. 현실을 받아들이되, 현실이 요구하는 방식으로 자신을 완전히 바꾸지는 않는 사람. 살아남기 위해서는 물러설 줄 알았지만, 마음속 가장 깊은 곳까지 내주지는 않는 사람. 어쩌면 그런 태도가 그녀를 지탱해온 힘이었는지도 모른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싱글맘에게 우즈베키스탄의 사회적 환경은 결코 녹록지 않았을 것이다. 대학을 졸업하고도 일자리를 구하기는 어려웠다. 그녀는 아이를 키우기 위해 별의별 일을 다 했다. 카페, 식당 등을 전전하다가, 결국 술집에서 일하게 되었다.
어느 날 그녀가 술을 따르면서 이런 말을 했다.

“기적, 그것은 내 삶을 스쳐 간 적조차 없는 남의 이야기예요. 내 삶에는 그런 단어가 없어요. 어머니가 병으로 쓰러져 일어나지 못했을 때도, 아이 아빠가 아이를 외면하고 떠났을 때도, 나는 기적을 믿지 않았어요.”

나는 그 말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그게 20대 여자의 입에서 나올 말이란 말인가.
그녀에게 기적이란 단어는 너무 잔인한 말이었다. 기적은 남의 이야기일 뿐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자신의 삶에서 그 단어를 지워버린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 그녀의 가슴에 대못을 박는 일이 벌어졌다. 그녀에게는 모욕을 견디기 힘든 상황, 나로서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이었다.
어느 날, 함께 술집에 간 최 사장이 술기운이 없는 상태에서 ‘술집에서 일하는 여인들이 부도덕하다’라고 소리쳤다. 술이 들어가기 전부터 시작된 비난이었다. 현지인 통역까지 세워놓고 그는 한참 동안 그들을 면전에서 몰아붙였다.


“너희들은 부도덕하다. 건전하게 돈을 벌어야 한다. 술집에 나온 것 자체가 부도덕하다. 몸을 파는 것은 더더욱 부도덕하다.”

삼십 분 넘게 이어진 비난에 여인들은 아무 말로 하지 못했다. 나 역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 순간 내 머릿속에 성경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여인에게 돌을 던져라.’
성경 말씀이 아니더라도 누가 감히 다른 사람의 삶을 함부로 재단할 수 있단 말인가? 그 여인들이 왜 그곳에 와 있는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아무것도 모른 채, 그들의 생계수단을 부도덕이라고 단정하는 태도. 그 안에는 억지와 무지, 그리고 타인의 처지를 헤아리지 못하는 몰이해가 있었다.
그 자리는 도덕이라는 이름 아래 욕망과 위선이 뒤엉킨 자리였다. 여자에 대한 욕망을 품고 그곳에 온 사람이 다른 한편으로는 도덕의 사도(使徒)처럼 행세했다. 그러나 더 부끄러운 것은 그의 말만이 아니었다. 나는 그의 비난이 부당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를 제지하지 못했다. 타인의 위선을 비판하기는 쉽다. 하지만 그 위선 앞에서 침묵한 자신을 돌아보는 일은 훨씬 어렵다. 그날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들 가운데 나 역시 자유롭지 못했다.

다이아나는 아무런 변명도 하지 않았다. 눈물이 고였지만 결코 울지 않았다. 공허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한참 뒤, 천천히, 아주 천천히 한마디씩 끊어서 말했다.

“내가 왜 행복해야 하나요? 무슨 권리로.”

나는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순간적으로 말을 잃어버린 것이다.
행복조차 자신의 권리라고 생각하지 못하는 사람. 그것이 그날 내가 만난 다이아나였다.
나 역시 행복을 대하는 태도에서 그녀와 닮은 구석이 있다고 생각한다. 겉으로는 고통을 피하고 행복을 추구하는 듯 보이지만, 정작 진정한 행복 앞에서는 그것을 선택하지 못하고 고통 쪽으로 돌아서곤 한다.
행복을 원하면서도 스스로 행복해질 자격이 있는지 의심하는 사람들. 어쩌면 그녀와 나는 그런 점에서 닮았는지도 모른다.

그때 나는 물었다. 이 질문은 최 사장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던지는 질문이었다.

"가난한 사람의 생계수단에 비난을 퍼부을 수 있는가?“

가난한 사람에게는 우연한 사고 하나가 삶 전체를 흔들 수 있다. 부유한 사람에게 자동차가 고장 난 일은 불편한 사건에 불과하지만, 가난한 사람에게는 유일한 생계수단이 사라지는 일이 될 수도 있다.
가난이 두려운 것은 무엇보다 선택지를 없애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좋은 직장을 선택할 수 없게 한다. 그다음에는 좋아하지 않는 일을 선택하게 한다. 그리고 어느 순간에는 선택이라고 부르기도 어려운 것을 마지못해 받아들여야 한다.
그녀에게는 갓난아기와 병든 어머니를 부양하는 고된 현실이 있었다. 술집에서 일하는 것은 그녀로서는 최선의 선택이었을 수도 있다. 어떤 사람에게는 병든 징표로 보이는 일이 다른 사람에게는 삶을 견디기 위한 필수 조건일 수 있다.

가난 때문에 선택지가 줄어든 그녀의 이야기는 소설 테스의 이야기와 닮았다. 테스와 다이아나는 ‘가난에 굴복하지 않으려 했던 존엄한 사람들’이었다. 조금 더 깊게 말하면, ‘가난했지만 자신의 가난까지 가난하게 만들지 않은 여성들’이었다.

테스로 돌아가 보자.
작품은 빅토리아 시대의 성적 도덕률과 여성에 관한 판단을 정면으로 문제 삼는다. 여기서 인간의 존엄에 관한 중요한 질문이 나온다.

“한 사람의 과거가 그 사람의 인간적 가치를 결정할 수 있는가?”

토머스 하디의 대답은 사실상 ‘아니오’에 가깝다.

하디는 테스의 부제에 ‘순결한 여인(A Pure Woman)’이라는 표현을 붙임으로써, 당대 사회가 여성에게 부과한 도덕적 낙인에 도전했다. 한 여성의 성적 경험과 사회적 평판이 그녀의 가치를 결정할 수 있는가. 이 질문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다이아나는 테스와 마찬가지로 '타락한 여자'가 아니었다. 그녀는 한 아이의 어머니였고, 아이를 끝까지 책임지려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사회는 그녀에게 순결하지 못한 여자라는 낙인을 먼저 찍었다.

그 날 술집을 나오면서 마음이 무거웠다. ‘동정’과 ‘공감’ 사이에서 갈등했다. 우리는 흔히 동정과 공감을 혼동한다. 동정은 이렇게 말한다.
"그녀는 참 불쌍하다."
동정은 거기서 끝날 수 있다. 그녀의 삶을 바라보며 안타까워하지만, 그 삶의 안쪽으로 더 들어가지는 않는다.
하지만 공감은 다르다.
공감은 그녀의 자리에 잠시 서본다. 그리고 묻는다.

"내가 저 환경에 태어났더라면 어땠을까?"

이 질문을 던지는 순간 그녀는 더 이상 불쌍한 대상에 머물지 않는다. 나와 같은 조건 속에서 살아갈 수도 있었던 한 인간이 된다. 타인을 나와 같은 인간으로 바라보는 자리에서 인간의 존엄은 비로소 시작된다.

그녀에게는 함부로 범접을 수 없는 자존심이 있었다. 세상에 굴복하면서도 마음만은 완전히 굴복하지 않는 사람에게서 느껴지는 어떤 것이었다.

그녀의 눈이 그랬다. 공허하면서도 쉽게 무너지지 않는 눈.
나는 그것을 한때 ’비린내’라고 표현했던 적이 있다. 타슈켄트 공원의 펍 레스토랑에서 그녀를 처음 만났을 때 그녀에게서는 날 것의 냄새 같은 것이 풍겨왔다. 비린내였다.
뜻밖에도 그 냄새는 그녀의 공허한 눈동자에서 풍겨오는 것 같았다.
그것은 나이답지 않게 너무 많은 것을 잃어버린 사람에게서나 볼 수 있는 눈동자였다. 오랜 세월을 견뎌온 사람처럼 공허하면서도, 그 공허함 속에 설명하기 어려운 힘을 품고 있었다.
무서운 눈동자였다. 세상과 타협하지 않겠다는 듯한, 모든 것을 삼켜버릴 것 같은 블랙홀 같은 검은 눈동자였다.

그 눈동자를 바라보면서 나는 이상하게도 그녀에게 귀족적인 무엇인가가 있다고 느꼈다. 그녀는 언젠가 내게 말했다.
“내년에는 모스크바에 가요. 모스크바에 친척이 있지요. 그곳에서 공부도 하고 일을 하고 싶어요.”

그녀는 중앙아시아에서 인정받는 타타르족 출신. 러시아 역사에는 제국의 귀족층에 편입된 타타르 귀족 가문들이 존재했다. 모스크바의 타타르 공동체에는 타타르 귀족들이 모여 살고 있다. 나는 그녀가 자신의 가계에 대해 명시적으로 말한 적은 없지만, 어쩌면 귀족적 배경을 지녔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권력과 돈의 잔혹한 작용 속에서도 중심을 잃지 않는 그녀의 태도 때문이었다. 물론 그것은 나의 섣부른 짐작일 수 있다.

이 점에서도 그녀는 테스와 묘하게도 닮아 있었다. 테스 역시 몰락한 가문의 후손으로, 한때 귀족이었던 ‘더버빌가’ 혈통을 이어받은 여인이었다.

술집에서 벌어진 사건은 다이아나의 존엄이 파괴되는 순간이 될 수도 있었다. 그녀는 훗날 그때의 일을 짧게 얘기한 적이 있다.

“현실은 이해하고 논리적으로 따질 사항이 아니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라는 것을 알았지요.”

그 말이 오래도록 마음에 남았다. 어쩌면 그것이 그녀가 살아온 방식인지도 모른다.
나는 그 말을 이렇게 이해했다.
살아남는다는 것, 그리고 살아남으면서도 인간으로 남는다는 것.

나는 가끔 생각한다. 사람들은 아주 멀리 떨어져 있어도 서로를 알아보는 순간이 있는 것이 아닐까. 서로의 삶을 자세히 알지 못해도, 이상하게 마음이 먼저 알아보는 사람이 있다.
‘저 사람은 나와 비슷하다.’
‘저 사람은 내가 알 것 같다.’

나는 다이아나를 처음 만났을 때 그런 느낌을 받았다.
‘어쩌면 그녀는 나와 같은 별에서 왔는지도 모른다.’

물론 이 말이 과학적으로 증명될 수 있다는 뜻은 아니다. 서로 다른 땅에서 태어났어도 비슷한 외로움을 품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는 뜻이다.
그녀와 나는 소울메이트도, 트윈플레이도, 카르마적 인연도 아니다. 내가 이제야 깨달은 것은 그녀가 내게 영혼의 거울과 같은 존재라는 사실이다. 그녀를 통해 오래전에 잊고지냈던 나 자신의 모습을 보기 때문이다.
왜 그녀의 슬픔이 내 슬픔처럼 느껴지는지, 왜 그녀에게서 잊고 지냈던 나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는지, 이제는 조금 알 것 같다.
멀리 떨어져 있어도 어떤 사람은 내면 속에 깊숙이 잠자고 있던 오래된 기억을 깨운다. 다이아나는 내게 그런 사람이었다.

운명의 신은 그녀에게 유난히 편파적이었다. 그러나 나는 가난과 고통에 지친 그녀의 삶에서도 진정한 삶의 한 모습을 발견한다. 진정한 삶은 삶에 지친 그녀 같은 영혼에게도 열려 있다는 것이다. 또한, 진정한 삶은 삶을 쉽게 살지 않는 절실한 영혼들의 몫일 수도 있다는 것을 조심스레 점쳐본다.

어쩌면 그녀와 나는 서로 다른 땅에서 태어났지만 비슷한 외로움을 품고 살아온 사람들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각자의 방식으로 삶의 앞길을 헤쳐나가고 있다. 서로 다른 삶을 살고 있지만, 삶이 우리에게 던진 몇 가지 질문은 같을지도 모른다.
‘가난 앞에서 무엇을 포기할 것인가?’
‘가난한 사람에게 삶의 선택이란 얼마나 허구적인가?’
‘구원 없이 어떻게 혼자 살아갈 것인가?’

다이아나 이야기는 여기까지다. 그것은 지독한 외로움과 끝없는 방랑의 이야기이다. 그녀는 지금도 중앙아시아 어느 하늘에서 자신의 길을 걸어가고 있을 것이다. 어쩌면 지구별을 홀로 방랑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아직도 그 장미꽃 더미 뒤에 서 있던 여자의 얼굴을 기억한다. 긴 머리카락을 잘라내고, 자기 몸보다 커다란 장미를 안은 채 그녀는 웃고 있었다. 아주 조금….

그녀는 순수한 여인이다.

[정보철 칼럼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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