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6.10.06(화)

[김병철 칼럼㉕] 모으라고 만든 IRP, 왜 퇴직할 때 다시 쪼개지는가?

성기환 CP

2026-10-06 08:17:41

김병철 한국퇴직연금개발원 대표

김병철 한국퇴직연금개발원 대표

[글로벌에픽 성기환 CP] 지난 ㉔편에서는 금융기관이 상품만 점검할 것이 아니라, 선택을 미룬 가입자의 계좌까지 돌봐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직장을 떠나는 순간에는 더 큰 선택설계가 작동한다. IRP는 퇴직급여를 모으는 계좌다. 그런데 실무에서는 다른 금융기관에 ‘퇴직금 수령용 IRP’를 하나 더 만드는 일이 자연스러운 절차처럼 굳어져 있다. 이번 편에서는 법에 쓰여 있지 않아 더 잘 보이지 않는 이 선택설계와, 계약형 퇴직연금사업자가 바꿔야 할 선택의 순서를 살펴본다. [편집자주]

오 과장(가상의 인물)은 퇴직을 앞두고 인사팀에서 연락을 받았다.

“퇴직금 받을 IRP 계좌 확인서를 제출해 주세요”

오 과장에게는 이미 A증권의 IRP가 있었다. 연말정산 때 세액공제를 받기 위해 여러 해 동안 돈을 넣어온 계좌였다. 그는 그 계좌를 제출하려 했다. 그러자 퇴직급여와 개인이 낸 돈이 한 계좌에 섞이면 나중에 퇴직급여만 꺼내기 불편할 수 있으니, 수령용 IRP를 따로 만드는 편이 낫다는 말을 들었다.
하지만 A증권에는 IRP를 하나 더 만들 수 없었다. 한 금융기관에는 하나만 개설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오 과장은 B은행에 새 IRP를 만들었다.

며칠 뒤 퇴직급여가 B은행 계좌로 들어왔다. A증권의 IRP는 여러 해 동안 자신이 모아온 노후자금이었다. 반면 B은행의 IRP는 퇴직급여를 받기 위해 잠시 만든 계좌처럼 보였다. 같은 노후자금이어도 어느 계좌에 담겼는지에 따라 마음속 이름이 달라졌다. 하나는 오래 가져갈 연금이었고, 다른 하나는 필요하면 꺼내 쓸 수 있는 목돈처럼 느껴졌다.

두 번째 계좌 앞에 자연스럽게 이런 생각이 붙은 것이다.

“퇴직금이 들어왔으니 이 계좌는 해지해도 되지 않을까”

제도는 ‘모으라’고 말한다

IRP는 개인형퇴직연금이다. 개인이 세액공제를 받으며 노후자금을 더 쌓을 수도 있고, 직장을 옮기거나 퇴직할 때 받은 퇴직급여를 모아둘 수도 있다. 고용노동부도 IRP를 여러 직장에서 받은 퇴직급여를 한 계좌에 모으는 ‘통산장치’라고 설명한다.
현행법이 퇴직할 때마다 새 IRP를 만들라고 요구하는 것도 아니다. 법은 원칙적으로 퇴직급여를 ‘근로자가 지정한’ IRP 계정으로 지급하도록 한다. 오 과장은 자신이 세액공제를 받으며 사용하던 기존 IRP를 지정할 수 있었다.

한 금융기관에서 IRP를 하나만 만들 수 있다는 원칙도 필자는 같은 방향의 신호로 읽는다. 여러 목적의 노후자금을 한 금융기관 안에서는 하나의 계좌에 모아 관리하는 구조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퇴직 현장의 가장 쉬운 길은 반대 방향을 향한다. 모으라고 만든 IRP가 관행 속에서는 다시 쪼개지는 것이다.

관행은 ‘꺼내기 쉬운 계좌’를 만든다

퇴직급여를 받기 위해 다른 금융기관에 별도 IRP를 만들어야 한다는 규정은 찾을 수 없다. 그럼에도 실무에서는 돈의 출처와 세금 기록을 구분하기 편하고, 나중에 퇴직급여만 인출하기도 쉽다는 이유로 별도 계좌가 자연스러운 선택처럼 안내된다.

선택설계는 법령이나 상품설명서에만 적혀 있는 것이 아니다. 어느 서류를 먼저 건네는지, 화면에서 어느 버튼을 가장 크게 보여주는지, 상담창구에서 어느 방법을 가장 쉬운 절차로 설명하는지 까지가 선택설계다.

개인이 세액공제를 받으며 모아온 IRP에 퇴직급여가 함께 들어가면 계좌 전체를 해지하기 전에 한 번 더 고민하게 된다. 오랫동안 쌓아온 노후자금까지 함께 꺼내야 하기 때문이다. 반면 퇴직급여만 들어 있는 별도 계좌는 해지가 훨씬 단순해 보인다.

누구도 오 과장에게 퇴직급여를 일시금으로 꺼내라고 직접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가장 편한 절차는 퇴직급여만 담긴 새 계좌를 만들게 했고, 그 계좌는 다시 곧바로 해지하기 쉬운 모양으로 놓였다.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이러한 선택설계는 퇴직급여가 들어온 IRP를 쉽게 깨뜨린다.

복잡하다는 말은 책임을 없애지 않는다

물론 기존 IRP에 퇴직급여를 합치는 일이 단순하지만은 않다. 회사에서 받은 퇴직급여에는 이연된 퇴직소득세와 근속기간 기록이 붙는다. 개인이 낸 돈도 세액공제를 받았는지에 따라 나중의 세금이 달라진다. 운용수익도 자금의 출처에 맞게 구분해야 한다.

금융기관 입장에서는 계좌를 나누는 편이 전산 처리와 상담에 편할 수 있다. 퇴직급여를 일시금으로 찾는 가입자가 많으니 그 불편을 줄이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할 수도 있다.

그러나 기록이 복잡하고 일시금을 선호하는 가입자가 많다는 사실은 전산과 사업자가 풀어야 할 문제다. 가입자의 노후자금을 여러 금융기관으로 흩어놓을 이유가 될 수는 없다. 국세청의 연금계좌 서식도 이미 과세제외금액, 이연퇴직소득, 세액공제분, 운용수익을 자금 원천별로 나누어 기록하도록 하고 있다. 계좌는 하나로 두되 그 안에서 퇴직급여와 개인 납입금, 운용수익에 각각 전산 꼬리표를 붙일 수 있다는 뜻이다.

‘가입자가 어차피 일시금을 원한다’는 설명도 조심해서 보아야 한다. 별도 수령용 계좌를 가장 쉬운 길로 만들어 놓으면 가입자는 그 계좌를 해지하기 쉬워진다. 그렇게 나타난 해지를 다시 일시금 선호의 증거로 삼는다면 논리가 거꾸로 선다. 선택을 만든 환경은 보지 않은 채, 선택의 결과에 대한 책임을 가입자에게 돌리는 셈이다.

이 관행이 퇴직급여 인출을 유도하려고 의도적으로 설계됐다고 주장하려는 것은 아니다. 선택설계는 의도보다 작동 결과로 평가해야 한다. 전산 편의와 오래된 관행이 만든 길이라도, 그 길이 가입자를 연금보다 일시금으로 더 쉽게 데려간다면 이제 그 방향을 다시 물어야 한다.

사업자가 선택의 순서를 바꿔야 한다

바꾸어야 할 것은 선택권이 아니라 선택의 순서다.

이 일은 법이 바뀌고 새로운 국가 전산망이 생길 때까지 기다려야만 시작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계약형 퇴직연금사업자는 자신이 제공하는 서류와 상담, 모바일 화면의 순서를 지금도 바꿀 수 있다. 회사에 제공하는 퇴직 안내문과 계좌확인 서식부터 기존 IRP를 먼저 찾도록 만들 수 있다. 안내가 새 계좌 개설부터 시작하면 가입자는 그 길을 따르게 된다.

첫 화면과 첫 질문은 “새 IRP를 어디에서 만들겠습니까”가 아니라 “이미 가지고 있는 IRP가 있습니까”여야 한다. 기존 계좌로 모으는 길이 새 계좌를 만드는 길보다 더 어렵지 않도록 시스템도 고쳐야 한다. 그래도 별도 계좌가 필요한 사람은 그때 선택하면 된다.

사업자의 역할이 입금으로 끝나서도 안 된다. 돈이 들어온 직후 해지 절차부터 쉽게 보여주기보다 기존 노후자금과 어떻게 이어서 운용할지 먼저 보여주어야 한다. 별도 계좌 개설이 사업자와 회사의 업무에는 편하더라도, 가입자의 연금을 더 쉽게 깨뜨린다면 그 편의가 누구를 위한 것인지 살펴야 한다.

근본적으로는 가입자가 평소 사용하는 IRP 하나를 ‘대표 IRP’로 미리 정해두는 공적 전산체계가 필요하다. 가입자가 별도로 다른 계좌를 선택하지 않으면 퇴직급여가 그 대표 IRP로 이어지는 구조다. 회사가 직원의 잔액이나 상품을 볼 필요도 없다. 유효한 송금처만 확인하고, 근속기간과 세금, 자금 원천 기록이 퇴직급여와 함께 따라가게 하면 된다.

이는 제도와 공적 인프라의 개선 과제다. 그리고 그 체계가 마련되기 전까지 사업자는 기존 계좌를 먼저 묻고, 두 선택의 차이를 제대로 설명하여야 한다.

호주는 새 직장에 들어간 근로자가 연금기금을 따로 선택하지 않으면, 회사가 국세청을 통해 그 사람이 이미 가진 슈퍼 계좌를 확인해 그곳으로 부담금을 보낸다. 이를 ‘스테이플링’이라고 부른다. 직장이 바뀌어도 기존 연금계좌가 사람에게 붙어 따라간다는 뜻이다. 호주의 슈퍼와 한국의 IRP는 같은 제도가 아니지만, 사람에게 계좌를 다시 찾아오게 하기보다 기존 장기계좌를 먼저 연결한다는 원칙은 참고할 만하다.

연재에서도 이 문제를 이미 한 번 만났다. ③편의 최 과장은 두 번째 직장의 퇴직급여를 기존 IRP에 합치려다 복잡한 절차 앞에서 멈췄고, 결국 돈을 꺼내 대출부터 갚았다. 이번에는 그 실패를 개인의 선택으로만 남겨두지 않고, 한 걸음 더 들어가 묻고자 한다.

IRP는 통산장치라면서, 왜 사업자의 가장 쉬운 안내는 일시금 인출에 편리한 별도 계좌로 향하고 있는가?

퇴직연금사업자는 “전산이 복잡하다”거나 “가입자는 어차피 인출한다”는 말 뒤에 머물 수 없다. 퇴직급여를 어느 계좌로 보내는지 정하는 절차도 가입자의 행동을 바꾸기 때문이다. 사업자가 직접 일시금을 권하지 않았더라도, 자신이 만든 서류와 화면, 상담의 가장 쉬운 길이 어디로 향하는지는 살펴야 한다. 그것이 계약형 퇴직연금에서 사업자가 져야 할 선택설계의 책임이다.

오 과장에게 새 IRP를 만들 자유는 있어야 한다. IRP로 받은 뒤 필요에 따라 해지해 일시금으로 꺼낼 권리도 남아 있어야 한다. 그러나 별다른 판단을 하지 않은 사람에게 가장 먼저 보이는 길은 퇴직급여만 잠시 담아둘 계좌가 아니라, 이미 가지고 있는 노후계좌로 이어지는 길이어야 한다.

좋은 선택설계는 사람의 선택을 빼앗지 않는다. 가장 쉬운 길을 가장 오래 연금으로 남는 길과 일치시킨다.

다음 편에서는 5년이나 10년으로 나누어 받으면 그것을 곧바로 ‘연금’이라고 부를 수 있는지, 퇴직급여를 받는 기간과 방법에 숨어 있는 또 하나의 암묵적인 선택설계를 살펴본다.

[글로벌에픽 성기환 CP / keehwan.sung@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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