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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철의 한끗차이] 우상과 광기, 그리고 커피 인문학

정보철 칼럼리스트

2026-09-29 10:08:10

[정보철 칼럼리스트] 우상은 사람의 판단을 대신한다. 그가 하는 말은 모두 옳고, 그가 가리키는 상대는 모두 틀렸다고 믿는 순간, 믿음은 우상이 된다. 그리고 우상이 사람들의 마음을 장악하면, 어느새 광기가 그 자리를 채운다.

지난여름 우상의 광기를 가까이에서 보았다.
그리고 우상의 그 광기가 득실거리는 소굴에서 나를 끌어 내준 것은, 즉 구원한 것은 거창한 철학책도, 종교도, 정치도 아니었다. 커피 한 잔이었다. 정확히는 커피 인문학이었다.

'구원'이라는 단어를 쓰고 나니 오히려 내가 얼마나 깊이 무너져 있었는지 깨닫게 되었다.
그때의 나는 어떤 자극에도 제대로 반응하지 못했다. 책을 펴도 한 장 넘기기조차 힘들었고, 음악을 들어도 가슴은 움직이지 않았고, 사람을 만나도 마음은 굳게 닫혀 있었다.
더 무서운 것은 그런 자신을 이상하다고 느끼지도 못했다는 사실이다.
내 안에서 무언가가 천천히 무너지고 있었지만, 그 모습을 지켜볼 힘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지난여름은 유난히 더웠다. 폭력적인 더위가 세상을 짓누르던 그 날, 약속을 취소하고 싶었지만 어쩌다 보니 약속 장소로 향했다. 돌아오는 버스 안, 졸린 눈으로 차창 밖을 바라보다가. 현수막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커피 인문학.'

그 두 글자가 유난히 선명하게 다가왔다. 속으로 외쳤다.
'바로 저거다.'

며칠 뒤 나는 강북문화정보도서관에서 개최하는 ‘커피 인문학’ 강좌를 찾아갔다. 지금 생각해도 이상한 일이었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던 내가 스스로 무언가를 찾아 나섰으니 말이다.
첫날, 강의실에 앉아 졸린 눈으로 강의를 듣던 중, ‘커피 인문학’의 저자 박영순 강사는 커피
이야기를 역사와 문화, 철학으로 넓혀가다가 낯선 단어 하나를 꺼냈다.

“아비투스라….”

나는 속으로 그 단어를 몇 번이나 되뇌었다.
아비투스는 한 사람이 살아온 환경과 경험이 몸과 행동 속에 배어 만들어내는 성향이다.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싫어하는지, 어떻게 말하고 어떻게 행동하는지, 무엇을 자연스럽게 여기고 무엇을 불편하게 느끼는지가 그 안에 들어 있다. 프랑스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가 사회학에서 발전시킨 개념이다. 그 단어가 이상하게 마음에 걸렸다.
오래 생각했다. 그리고 내 방식대로 번역해보았다.


“품격.”

물론 아비투스와 품격이 완전히 같은 말은 아니다. 하지만 내가 만난 아비투스는 품격이었다.

품격이란 무엇일까? 겉으로 고상한 척하는 태도가 아니다. 옷을 잘 입거나 말을 우아하게 하는 것도 아니다. 품격은, 자신 안에 욕망과 혼돈이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인간으로서의 중심을 잃지 않는 것이다.
짓밟을 힘을 가졌을 때도 사람을 짓밟지 않는 것.
스스로 옳다고 확신하는 순간에도 다른 이의 말을 들으려 하는 것.
군중이 한 사람을 향해 돌을 던질 때, 그 돌을 들지 않는 것.
그것이 내가 생각하는 품격이었다.

문득 프랑스의 거장 에밀 졸라가 떠올랐다.
드레퓌스 사건으로 온 나라가 둘로 나뉘었을 때, 그는 진실을 향해 섰다. 1894년 프랑스 육군 대위 알프레드 드레퓌스가 독일에 군사기밀을 넘겼다는 혐의로 유죄판결을 받고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사건은 끝나지 않았다. 1898년 1월 13일, ‘로로르’지 1면에 대통령을 향한 공개서한을 발표했다. 제목은 짧고 강렬했다.

“나는 고발한다.”

졸라는 군과 정부의 잘못을 정면으로 고발했다. 그로 인해 명예훼손의 낙인이 찍히고 조국을 떠나야 했지만, 그는 절대 물러서지 않았다. 사건 발생 후 12년 만인 1906년에 드레퓌스가 무죄를 확정받을 때까지 말이다.

나는 드레퓌스 사건을 생각할 때마다 진실보다 더 무서운 것이 있다는 생각을 한다. 그것은 사람은 사실이 틀렸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보다 자신이 믿어온 세계, 즉 우상이 틀렸다는 것을 인정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자신이 믿어온 세계, 그것이 때로는 우상이 된다. 그래서 우상은 강하다.

졸라에게 그보다 앞선 싸움도 있었다. 20대 시절, 그는 당시 거센 비판을 받던 후기 인상주의 선구자 마네의 작품 ‘올랭피아’를 옹호했다가 광증에 사로잡힌 대중의 질타를 받고, 연재하던 소설이 중단되었다. 훗날 졸라는 마네에 관한 글을 직접 쓰기도 했다. 한 사람의 예술을 제대로 바라보는 일조차 군중의 시선에 맞서야 했던 시대였다. 그리고 졸라는 결국 자신이 믿는 것을 말한 대가를 치렀다. 당시 졸라는 다락방에서 굶주리면서 생계를 이어가고 있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그는 1902년 세상을 떠났다. 공식적으로 그의 죽음은 굴뚝 문제로 발생한 일산화탄소 중독 사고로 기록되어 있다. 훗날 그가 반드레퓌스파에 의해 암살됐다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했지만, 그것을 확정된 사실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의 죽음보다 더 오래 살아남은 것이 있었다. 그가 끝까지 놓지 않았던 질문이었다.

“진실 앞에서 우리는 어디에 서 있는가?”

조지 버나드 쇼도 떠올랐다. 제1차 세계대전의 열기가 온 세상을 휩쓸 때, 그는 1914년 ‘전쟁에 대한 상식’을 발표했다. 이 글에서 그는 전쟁의 원인과 책임을 한쪽에만 돌리는 시선을 거부하고, 영국과 독일을 비롯한 열강의 군비경쟁과 정치적 계산을 비판적으로 바라보았다.

“광기를 멈춰야 한다. 일부 권력자들의 야욕과 무기 상인들의 이기심에 밀려 청년들을 전쟁에 내몰고 있다. 상대방을 증오하는 일을 그만두고 냉정하게 돌아보아야 한다.”

그의 목소리는 당시 영국 사회에서 편안하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전쟁에 대한 상식’은 거센 비난을 불러왔고, 쇼의 연극 역시 영국에서 10년 동안 공연되지 못했다. 친구들에게 외면받고 공개 비난을 받으며 반역자로 취급당했다. 그가 던진 질문은 아마도 이랬을 것이다.

“우리는 정말 이 전쟁을 제대로 보고 있는가?”

전쟁의 시대에는 ‘국가’, ‘애국’, ‘승리’ 같은 말이 거대한 우상이 된다. 우상이 커질수록 사람은 생각을 멈추기 쉽다. 우상이 판단의 기준이 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와 '그들'만 구분하면 된다. 그때 상대는 사람이 아니라 적으로 바뀌고 광기가 시작된다.
우상을 거짓된 믿음이다. 우상이 위험한 것은 단순히 거짓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우상은 사람 사이에 칸막이를 만든다.

‘내 편과 네 편.’
’선과 악.‘
’우리와 적.‘

세상을 갈라놓은 두 편간 틈이 벌어질수록 희생양은 필요해진다. 한 사람을 미워하면 공동체가 하나가 된 듯 느끼지만, 그것은 공동체가 아니다. 군중의 광기가 결속한 것에 불과하다.

지난여름, 나는 그 광기를 가까이에서 마주했다.
한 후배와 통화하던 자리였다. 나는 후배에게 정치적 주장보다 더불어민주당 당 대표 후보들의 사실관계를 정확히 설명하고 싶었다.

"딱 3분만 내 이야기를 들어줘."

그러나 그 말을 끝내기도 전에 후배는 이미 말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그의 귀는 이미 닫혀 있었다. 믿음은 원래 사람을 움직이지만, 의심할 수 없는 믿음은 사람의 눈과 귀를 닫아버릴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믿음이 의심받지 않는 신앙으로 변질되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 믿음이 아니다. 곧바로 우상이 된다.

강력한 것일수록 타락하는 속도도 빠르다. 인간에게 욕망만큼 강력한 것도 드물다. 그중에서도 권력에 대한 욕망은 유난히 강하다. 권력욕에 우상이 결합하면 위험은 배가된다. 높이 올라갈수록 추락도 커질 수 있다는 사실을 사람들은 잊고 있다.

그날 나는 전화를 끊고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분노가 지나치면 아무 생각도 나지 않는 모양이었다. 멍하니 시간을 보내다가 결국 깨달았다. 내가 정말 견디기 힘들었던 것은 후배의 말만이 아니었다.
전화를 끊는 동시에 떠오른 것은 니체였다.

’우상의 황혼‘

니체가 자신의 책에 ’황혼‘이라 이름 붙인 이유가 궁금했다. 황혼은 밤이 아니다. 그렇다고 낮도 아니다. 하나의 빛이 사라지고 있지만 새로운 빛은 아직 오지 않은 시간이다. 그 시간만이 우상에 어울리는 시간인 셈이다. 동시에 그 책의 부제는 의미심장하다. 부제는 이렇다.
'어떻게 망치로 철학 하는가.'

망치는 부수기 위한 도구이기도 하지만, 두드려보는 도구이기도 하다. 나는 니체가 이런 질문을 던지는 것처럼 느껴졌다.

’두드려보자. 정말 단단한 진리인가. 아니면 속이 빈 우상인가?‘

우상이 무너지면 황량함이 찾아온다. 그 황량함을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선거 잔치(?)가 끝난 자리에서 사람들은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아야 한다.
어제까지 적이라고 불렀던 사람의 얼굴을.
어제까지 배신자라 했던 사람의 말을….

그제야 우리는 어쩌면 알게 될 것이다. 진정한 공동체는 모두가 같은 말을 하는 곳이 아니라는 것을 땅을 치고 깨달을 것이다.
서로 다른 말을 하면서도 서로를 파괴하지 않는 것, 그것이 진정한 공동체의 시작이다. 더불어민주당 당 대표 선거처럼 품격이 실종된 싸움을 하는 공동체는 해체하는 것이 옳다는 생각마저 든다.


그렇다면 우리가 살고 싶은 공동체는 어떤 모습일까?
거창하지 않아도 좋다.

“바로 아비투스다!”

우상과 광기가 사람들을 휩쓸던 시간 속, 내가 찾은 인간의 품격이었다. 그리고 그 품격은 아주 작은 곳에서 시작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커피 한 잔을 마시는 방식에서도 실마리를 찾을 수 있는 것이다.

커피 인문학 강의를 들으며 나는 커피가 단순한 음료가 아니라 사람이 살아온 방식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배웠다.

커피는 역사와 문화와 문학 속으로 들어갔다.
1933년, 서울 종로에는 이상과 기생 금홍이 함께 운영한 ’제비 다방‘이 있었다. 당대의 예술가들이 드나들던 곳이었다. 커피 한잔이 놓인 공간에서 예술과 문학이 오갔다. 그러고 보면 커피는 언제나 사람 사이에 놓여있었다. 이상의 대표작 ‘날개’의 모티브도 제비 다방과 기생 금홍이라는 것은 누구나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발자크도 커피를 사랑했다.
발자크의 ‘인간희극’에는 2472명의 인물이 등장하는 것으로 집계된다. 인간희극에서 수많은 인물이 서로 다른 작품을 넘나들며 하나의 거대 세계를 만들었다. 발자크는 커피가 자신의 창작세계를 자극한다고 말했고, 실제로 커피를 마시며 엄청난 분량의 글을 써 내려갔다.
흔히 발자크가 하루에 커피를 50잔씩 마셨다는 이야기가 따라다니지만, 나는 그 숫자보다 그의 커피에 대한 집착과 창작의 관계를 기억하고 싶다. 커피 한 잔이 한 작가의 밤을 깨우고, 그 밤이 수천 명의 인물로 이어졌다.

그러고 보니 나에게도 커피가 있었다.
지금 이 순간, 명절 휴일에 나는 홀로 통영 앞바다가 내려다보이는 2층 카페에 앉아 있다. 커피 한 잔, 누군가에게는 아무 의미 없는 한 잔일지 모른다. 하지만 나에겐 다르다.
창밖 바다를 바라보고, 커피잔을 들어 천천히 마시는 시간.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저 마시는 시간, 어쩌면 이 시간이 ‘나만의 아비투스’가 아닐까 생각한다.

타슈켄트의 커피 향도 떠오른다. 미라바드 구역에 있던 카페 붐(Cafe Boom), 길거리보다 조금 높은 곳에 자리 잡은 카페였다. 나는 그곳을 좋아했다. 해가 기울면 건물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다. 나는 카페 바깥의 그늘진 베란다 의자에 앉아 거리를 바라보았다. 사람들이 지나갔다. 자동차가 지나갔다. 그리고 도시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움직였다.
나는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그리고 또 한 모금…, 그때는 몰랐다. 그 평범한 커피 한 잔이 훗날 내게 얼마나 오래 남을지 몰랐다.

하지만 카페 붐의 베란다에서 계단을 내려갈 때는 조심해야 했다. 집시 아이들이 몰려들기 때문이다. 한 번은 돈을 건넸다가 스무 명 가까운 집시 아이들에게 둘러싸인 적도 있었다. 그때는 무척 당황스러웠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나니 그 기억마저 새롭다.

사람은 참 이상하다. 한때는 견디기 힘들었던 장면이 시간이 지나면 기억이 되고, 기억은 이야기가 된다. 그리고 이야기 속에서 때로 사람이 다시 살아난다.

지난여름 나는 많은 것이 무너지는 것을 보았다. 사람에 대한 믿음도, 오랜 생각도 흔들렸다. 그때 나는 그것을 무력감이라고 여겼다. 무너진 품격의 자리를 너무 오래 바라보고 있었던 것인지, 그래서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던 것인지 모른다.

어느 날 버스 창밖에서 우연히 본 두 글자가 아직도 기억이 생생하다.
“커피 인문학.”
그것이 나를 다시 일으켰다.
어쩌면 인간을 구원하는 것은 거대한 진리가 아닐 수도, 아니 오히려 아주 작은 습관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조심스럽게 든다.

말을 조금 천천히 하는 것.
상대의 말을 끝까지 들어주는 것.
자신이 틀릴 수도 있다는 생각을 놓지 않는 것.
그리고 가끔은 혼자 앉아 커피 한 잔을 천천히 마시는 것.

나는 이제 그것을 품격이라고 부르고 싶다.
‘아비투스’라고 불러도 좋겠다.

우상과 광기가 지나간 자리에서 끝내 남아야 할 것은 사람이다. 사람이 사람으로 남는 데 필요한 것은, 거대한 신념이 아니라 아주 작은 품격 하나일 수 있다.
커피 한잔처럼 작고, 그러나 쉽게 사라지지 않는 것, 그것으로 족하다.

[정보철 칼럼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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