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천NCC는 1999년 DL케미칼(구 대림산업 화학부문)과 한화솔루션이 각각 50% 지분을 보유해 설립한 합작사다. 하지만 올해 초부터 기존 회사채 상환 압박이 가중되면서 자금조달 길이 완전히 막혔다는 상황에서 양사의 갈등이 표면화됐다.
962억원 추징의 진실, 양측 주장 팽팽
갈등의 핵심은 국세청 세무조사 결과를 둘러싼 해석 차이다. 한화그룹은 12일 자료를 통해 DL그룹이 저가 거래로 여천NCC에 손실을 입혔다며, 책임감을 갖고 자금지원에 동참하라고 촉구했다.
한화는 "국세청은 한화의 거래가격을 시가로 인정했고 한화보다 저가로 공급받은 DL에 대한 거래를 모두 부당하다고 판단했다"며 "시장원칙에 따라, 객관적이고 공정한 조건으로 원료공급계약을 체결하여야 한다는 입장"이라고 강조했다.
반면 DL케미칼은 여천NCC와의 원료 공급 갱신 계약에서 '하방 캡'(가격 하락 한도) 설정을 제안했으나 한화가 지속적으로 반대해왔다고 맞섰다. DL은 "에틸렌 가격 경쟁력을 강화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며 "실제로 DL은 여천NCC 원료가 갱신계약에 최소 변동비 부분이 확보되는 방향으로 협상을 하고 있다. 하지만 가격 하한을 없애자는 한화의 입장이 고수되면서 가격협상은 교착상태에 빠져 있다"고 주장했다.
사업 구조 차이가 빚은 시각차
양측의 갈등이 이처럼 첨예한 이유는 여천NCC에 대한 의존도 차이에서 비롯된다. DL케미칼의 매출에서 범용 소재 비중은 약 40%, 스페셜티 소재는 약 60%다. 범용 소재는 NCC(나프타분해설비)에서 공급받는 기초유분을 가공한 제품이어서 여천NCC 의존도가 높다.
반면 한화의 경우 한화솔루션이 매출에서 에틸렌 기반 범용 소재 비중은 2/3 이상이다. 한화솔루션이 여천NCC에서 받는 에틸렌 규모가 연간 100만톤, DL케미칼은 40만톤 수준으로 거의 두 배 차이가 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미래 투자재원이 고갈됐다는 점이다. 지난 2018년부터 3년간 진행된 NCC 2공장 증설(9162억원)과 부타디엔 설비 투자(1400억원) 등 총 1조562억원의 설비투자 자금 상당 부분이 차입으로 조달됐다. 차입금의존도는 2020년 39.9%에서 2024년 9월 말 57.2%까지 치솟았다. 같은 기간 부채비율도 113.4%에서 321.0%로 급등했다.
중국발 공급과잉, 구조적 위기의 근본 원인
여천NCC의 위기는 개별 기업의 문제를 넘어 한국 석유화학 산업 전체의 구조적 문제를 상징한다. 최근 3년간 중국을 중심으로 동북아에서만 국내 전체 생산능력의 200% 수준인 2500만t의 설비가 증설됐다. 이로 인해 동북아 평균 가동률은 15% 이상 하락했다.
국내 석유화학업계는 지난 2020년대 초반 코로나19 여파로 위생·일회용품 수요가 급증하고 중국의 에틸렌설비 증설이 지연되면서 '황금기'를 누렸다. 일부 기업은 분기 영업이익 6000억원, 연 매출 50조원도 돌파했다. 그러나 지난 2023년부터 글로벌 경기침체와 중국의 공급과잉이 겹치며 수익성이 급락했다.
최대 수출국인 중국이 합성수지·PVC 생산을 늘리자 수출 물량이 감소했고, 국내 빅4(LG화학·롯데케미칼·금호석유화학·한화솔루션)의 합산 영업이익은 지난 2021년 9조 원에서 2024년 327억 원으로 96% 급감했다.
여천NCC 역시 이 여파를 고스란히 받았다. 2022년 3477억원, 2023년 2402억원, 2024년 2360억원의 당기순손실을 기록했다. 지난 8일에는 전남 여수 3공장이 가동 중단에 들어갔다.
석유화학 업계 전반 '셧다운 도미노' 우려
문제는 여천NCC만의 위기가 아니라는 점이다. 전국 3대 석유화학단지에 입주한 나프타분해시설(NCC) 설비 10곳 중 상당수가 경영난에 직면한 상태다. LG화학은 대산·여수 공장의 석유화학 원 스티렌모노머(SM) 생산 라인 가동을 비롯해 나주 공장 알코올 생산을 멈췄다. 롯데케미칼은 지난해 12월 대산 2공장 내 5개 생산라인 중 에틸렌글리콜(EG) 2공장을 비웠다.
또 다른 악재도 기다리고 있다. 샤힌 프로젝트는 원유 증류 과정을 거치지 않고 직접 석유화학 제품을 생산하는 정유·석유화학 통합공정(COTC) 방법 중 열분해 방식인 T2C2를 채택했다. T2C2 방식이 적용되면 나프타 분해 과정을 거치지 않고서도 에틸렌과 프로필렌 생산이 가능하다. 기존 NCC를 통해 생산하는 에틸렌 가격 대비 3분의 1 수준에 그친다.
구조적 전환의 골든타임
여천NCC 사태는 한국 석유화학 산업이 직면한 구조적 위기의 빙산의 일각이다. 전문가들은 이번 여천NCC 사태를 두고 "단기 유동성 지원만으로는 위기를 막을 수 없다"며 구조적 대응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한화와 DL의 갈등 역시 50대 50 공동 운영 구조의 한계를 보여주는 사례다. 급변하는 시장 환경에서 신속한 의사결정이 필요한 상황에서 두 대주주 간 이해관계 충돌은 기업의 생존 자체를 위협하고 있다.
업계 관계자는 "중국의 공급과잉 문제는 그나마 국내 기업들이 적응하고 대응해왔던 부분"이라며 "반면 에쓰오일의 샤힌 프로젝트로 인한 중동발 공급은 이제까지 경험하지 못한 사례로 여파가 훨씬 클 것"이라고 말했다.
한국화학산업협회 관계자는 "일본은 정부 주도로 규제 완화와 기업 결합을 촉진해 공급과잉을 구조적으로 해소했다"며 "단순 감산이 아니라 설비 통합, 범용 제품 축소, 고부가 스페셜티 전환까지 병행한 것이 주효했다"고 말했다. 이어 "국내도 일본처럼 한시적인 법·제도 완화와 함께 구조조정 로드맵을 세워야 글로벌 경쟁력을 회복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결국 여천NCC 위기는 단순한 기업 간 갈등이 아니라 한국 석유화학 산업 전체의 구조적 전환이 시급함을 보여주는 경고등이다. 정부와 업계, 그리고 국회가 합심해 근본적인 해법을 마련하지 않으면 제2, 제3의 여천NCC 사태는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글로벌에픽 안재후 CP / anjaehoo@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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