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대 공적 연기금의 등판에 민간 금융권은 강하게 반발하고 있지만, 자본시장 일각에서는 이번 구상 뒤에 국민연금 본 기금의 '자산 배분 한계'라는 구조적 고민이 깔려 있다는 분석도 제기된다.
18일 정부 및 금융권에 따르면 국민연금공단은 최근 '퇴직연금 기능 강화를 위한 노사정 태스크포스(TF)'에 기금형 퇴직연금 시장 참여안을 공식 전달한 것으로 알려졌다. 해당 안에는 공공기관의 기금형 퇴직연금에 한해 사업자로 참여하겠다는 내용이 담긴 것으로 전해졌다.
은행·증권 등 민간 금융기관의 반발을 의식해 운용 대상을 공공기관으로 한정한 것으로 풀이되며, 구체적인 참여안을 TF에 제출했다는 것은 그간의 의사 표명 수준을 넘어 본격적인 행보에 나섰다는 신호로 읽힌다.
지난 5월 고용노동부·금융감독원이 발표한 '2025년 퇴직연금 투자 백서'에 따르면, 지난해 말 기준 퇴직연금 적립금은 501조4천억원으로 전년(431조7천억원) 대비 16.1% 늘었다.
그러나 양적 성장 이면의 속사정은 다르다. 전체 적립금의 75.4%에 해당하는 378조1천억원이 수익률 3% 안팎의 원리금보장형 상품에 집중돼 있고, 가입자 절반가량은 연간 수익률 2%대에 머물며 물가 상승률 방어에도 급급한 실정이라는 분석이다.
2025년 퇴직연금 연간 수익률은 6.47%로 제도 도입(2005년) 이후 역대 최고치였지만, 같은 기간 국민연금이 기록한 18.82%(금액가중수익률·잠정, 국민연금공단 공식 발표)와 비교하면 약 3배에 달하는 격차가 벌어졌다.
"실적배당형에 집중 투자한 상위 10% 가입자의 수익률은 19.5%에 육박한 반면, 원리금보장형에 묶인 하위 10%는 2%를 간신히 넘기는 수준이었다"고 금융투자업계 관계자는 지적했다. 퇴직연금 내 '양극화'가 심화되는 구조적 문제가 수면 위로 드러나는 셈이다.
이 같은 저수익·양극화 구조를 깨기 위한 대안으로 거론되는 것이 바로 기금형 퇴직연금이다. 개별 사업장이 아닌 전문 운용 주체가 자금을 한데 모아 체계적으로 투자하는 방식으로, 이미 국내에도 선례가 존재한다.
현재 약 2만7천여 개 사업장·12만명 이상이 가입한 이 제도가 기금형 확대론의 '실증 근거'로 거론되는 가운데, 국민연금은 한 차원 높은 운용 역량을 앞세워 이 시장에 뛰어들겠다는 구상이다.
수익률·비용·원스톱 서비스…국민연금 진입 3가지 명분
국민연금이 퇴직연금 시장 진입을 주장하는 근거는 크게 세 가지로 요약된다. 수익률 격차 해소, 비용 절감, 그리고 노후소득 통합 관리다.
비용 측면에서 격차도 뚜렷하다. 현재 민간 퇴직연금의 평균 수수료(비용부담률)는 0.336% 수준인 반면, 국민연금의 기금운용 비용률은 0.089%에 불과한 것으로 알려졌다. 민간이 공적 연기금보다 약 3.5배 많은 비용을 가져가는 구조인 셈이다.
국민연금공단 기금운용본부는 2025년 한 해 동안 231조6천억원의 운용이익을 거뒀으며, 일본(GPIF 12.3%), 노르웨이(GPFG 15.1%), 캐나다(CPPIB 7.7%) 등 세계 주요 연기금과 비교해도 최고 수준의 성과를 낸 것으로 평가된다. 38년간 축적한 세계 3위권 기금운용 인프라를 퇴직연금에 이식해 가입자들에게 실질적인 자산 증식의 기회를 제공하겠다는 논리다.
세 번째 명분은 '다층 노후소득 원스톱 서비스' 완성이다. 현재 기초연금, 국민연금, 퇴직연금이 각기 다른 창구에서 파편적으로 관리되고 있는 구조를, 공단이 가입부터 운용·연금 지급·노후 상담까지 한 번에 해결하는 플랫폼으로 통합한다는 복안이다. 전국 40개 거점지사와 127명의 노후준비 전문 인력을 활용할 수 있다는 점도 강점으로 꼽힌다.
이처럼 국민연금은 수익률·비용·편의성 세 축을 앞세워 참여 명분을 쌓고 있지만, 업계는 그 이면을 더 주목하는 분위기다. 자산운용업계 관계자는 "기금 수탁 규모가 장기적으로 줄어들면 공단의 사업성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며 "공익적 명분 못지않게, 퇴직연금을 통해 운용 규모와 존재 가치를 유지하려는 측면도 있는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김성주 이사장 “페이스메이커 역할 하겠다”…노사정 TF 합의로 추진력 확보
이러한 구상을 실천으로 옮기는 동력은 김성주 국민연금공단 이사장의 강력한 실행 의지로 평가된다. 김 이사장은 최근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국민연금이 기금형 퇴직연금에 들어가면 경쟁이 촉진돼 민간 퇴직연금 사업자도 수수료를 낮추고, 수익률을 올리려는 노력을 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며 "기금형 퇴직연금 제도가 앞서지도 않고, 뒤처지지도 않도록 페이스메이커 역할을 하겠다"고 밝혔다.
제도적 추진력도 확보됐다. 지난 2월 고용노동부와 노동계·경영계가 참여한 노사정 TF는 '퇴직급여 사외 적립 의무화'와 '기금형 퇴직연금 활성화'에 합의하고 DC(확정기여)형을 우선 도입 대상으로 명시했다. 기금형 퇴직연금의 도입 방향이 공식 합의 형태로 정리된 것은 이번이 사실상 처음이라는 평가다.
정부는 올해 7월까지 세부 제도를 설계하고 연내 근로자퇴직급여보장법 개정을 추진하는 것으로 전해졌으나, 의무화 시기와 적용 단계는 실태조사를 거쳐 결정될 예정이어서 구체적인 시행 일정은 아직 확정되지 않은 상태다.
그러나 의지와 현실 사이의 간극은 좁지 않다는 평가도 있다. 학계 퇴직연금 전문가는 "TF에서 국민연금의 참여는 정식 멤버보다는 사례를 청취하는 배석 수준에 가까운 것으로 파악된다"며 "실질적 발언권이 주어져 있다기보다 의사를 피력하는 수준으로, 아직 구체화됐다고 보기는 이르다"고 평가했다.
노사정 TF 공공기관형 분과 간사를 근로복지공단이 맡고 있다는 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근로복지공단은 국민연금의 퇴직연금 시장 참여에 반대 입장인 것으로 전해져, 업계에서는 사실상 국민연금의 진입을 차단하는 구조가 이미 짜여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새 기금계정 확보용 포석 의혹…시장 반응은 냉담
그럼에도 자본시장 일각에서는 공익적 명분 뒤에 국민연금 본 기금의 구조적 고민이 깔려 있다는 시각이 존재한다. 국민연금기금운용위원회는 지난 5월 28일 제5차 회의를 열어 2026년 국내주식 목표비중을 기존 14.9%에서 20.8%로 5.9%포인트 상향하는 고육지책을 내놨다. 당시 실제 국내주식 비중은 29.7%에 육박해 상향된 목표치(20.8%)마저 약 9%포인트 초과한 상태였다.
여기에는 국민연금의 또 다른 구조적 고민도 맞물려 있다. 2027년부터는 보험료 수입(64조3천535억원)보다 연금 지급액(67조6천71억원)이 더 많아지는 수지 역전이 현실화될 전망이다. 이후부터는 기금 운용 수익을 보태야만 연금 지급이 가능한 구조로 전환되는 만큼, 안정적인 수익 기반 확보가 그 어느 때보다 절박한 과제로 떠오른다.
금융권 퇴직연금 관계자는 "공공기관형 참여는 사실상 진입로에 불과하다"며 "국민연금이 국내 주식을 줄이려 하면 주가가 빠질 것 같아 함부로 못 팔고, 달러로 갈아타려 해도 환율이 오르니 진퇴양난"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그는 "퇴직연금이라는 별도 계정으로 국민연금이 매도한 국내 주식을 받아주는 구조를 만들 수 있다는 점도 충분히 고려해 볼 만한 배경"이라고 분석했다.
이러한 지적에 대해 김성주 이사장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국내 증시 호황에 힘입어 자산 매각 시점이 2060~2070년대로 늦춰졌다"며 "연금 지급을 위해 국내 주식을 서둘러 팔아야 할 우려가 줄어든 셈"이라고 반박했다.
구조적 의혹 논란과 별개로, 민간 금융권의 반발도 국민연금이 넘어야 할 산이다. 은행·보험·증권 등 민간 금융업계는 "공공 부문의 역할이 과도하게 확대되면 종국엔 소비자 선택권까지 위협할 수 있다"며 반발 수위를 높이고 있다.
국민연금의 퇴직연금 실험…성패는 '신뢰'가 가른다
결국 평가는 성과가 가를 전망이다. 노후 안정이라는 거대한 명분과 '별도 계정 확보'라는 시장의 의구심이 충돌하는 가운데, 국민연금의 기금형 퇴직연금 실험이 어떤 성적표를 거둘지 시장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성공한다면 20년 묵은 저수익 구조를 깨는 전환점이 될 수 있지만, 실패할 경우 민간 시장 교란이라는 비판과 함께 역풍이 불 수 있는 고위험·고보상의 승부라는 게 시장의 중론이다.
관건은 속도와 투명성이라는 지적이 많다. 기금형 퇴직연금 도입이 공론화된 지 10년이 넘었음에도 법 개정조차 마무리되지 않은 상황에서, 국민연금이 공공기관형 참여라는 우회로를 택한 것을 두고 "제도적 정비 없이 덩치만 먼저 키우려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적지 않다.
특히 지배구조 문제는 해결해야 할 선결 과제로 꼽힌다. 증권업계 퇴직연금 전문가는 "국민연금이 퇴직연금 시장에 들어오면 퇴직연금은 고용노동부, 국민연금공단은 보건복지부, 연금 사업자는 금융위원회·금융감독원으로 주무 부처가 뿔뿔이 흩어지는 구조가 된다"며 "총리실 산하에 통합 기금운영위원회(가칭)를 두는 방식 등으로 감독 체계를 먼저 확립하지 않으면 혼선이 불가피하다"고 강조했다.
국민연금이 진정한 '페이스메이커'로 자리매김하려면 수익률 성과는 물론, 운용 구조의 독립성과 감독 체계 정비에서도 신뢰를 쌓아야 한다는 게 전문가들의 공통된 조언이다.
[글로벌에픽 성기환 CP / keehwan.sung@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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