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6.08.12(수)

정기선 HD현대 회장, 빌 게이츠 다시 만나는 이유

2030년 Kemmerer 1호기 준공, HD현대의 핵심 부품 공급이 관건

안재후 CP

2026-08-12 12:56:58

HD현대 정기선 회장(오른쪽)과 테라파워(TerraPower) 빌 게이츠(Bill Gates) 회장. [사진=HD현대]

HD현대 정기선 회장(오른쪽)과 테라파워(TerraPower) 빌 게이츠(Bill Gates) 회장. [사진=HD현대]

[글로벌에픽 안재후 CP] 빌 게이츠 게이츠재단 이사장이 이달 14일 한국을 찾는다. 마이크로소프트 창업자이자 테라파워 이사회 의장인 그가 2022년부터 추진해온 소형모듈원전(SMR) 사업이 이제 구체적인 납품 단계로 진입했기 때문이다. 이번 방한에서 그가 정기선 HD현대 회장과 만나는 자리는 단순한 예의 방문이 아니다. 미국 와이오밍주에서 건설 중인 'Kemmerer 1호기'가 2030년 준공을 목표로 진행되는 가운데, 한국 기업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확인하는 자리가 될 전망이다.

한국 정부에 SMR 협력 손 내밀다
게이츠 이사장은 14일 한성숙 국무총리와 면담을 추진할 예정이다. 당초 이재명 대통령과의 만남을 추진했으나 일정상 맞지 않아 총리 면담으로 조정된 것으로 전해졌다. 게이츠 측이 먼저 요청해 성사된 만남인 만큼, 한국 정부와의 에너지 협력에 대한 그의 관심이 얼마나 큰지를 보여준다.

총리 예방을 마친 게이츠 이사장은 바로 이어 정기선 HD현대 회장을 비롯해 테라파워와 협력 중인 국내 기업 관계자들과 잇달아 회동할 가능성이 높다. 이번 만남은 두 사람이 2026년 1월 스위스 다보스 포럼에서 만난 이후 약 7개월 만의 공식 면담이다. 지난 1월 회담에서 정기선 회장이 "차세대 SMR 기술은 지속가능한 미래 에너지 구현을 위한 핵심 솔루션"이라며 양사 협력의 의지를 표현한 만큼, 이번 면담에서는 테라파워 프로젝트에서 국내 기업의 역할을 어떻게 확대할 것인지가 핵심 의제가 될 전망이다.

2022년 투자부터 현재까지, 실증에서 상용화로 전환하다
정기선 회장과 게이츠 이사장의 협력은 2022년 HD한국조선해양이 테라파워에 3000만 달러를 투자하면서 시작됐다. 4년 전 그 투자가 이제 구체적인 납품 계약으로 변환되고 있는 것이다.

2023년 3월 양사는 미국에서 "나트륨 원자로의 상업화를 위한 제조 공급망 확장 전략적 협약"을 체결했다. 이는 단순한 의향서가 아니라 실제 제조 가능성과 가격 경쟁력, 공급 일정을 공동 검토하겠다는 선언이었다.

2024년 12월 그 합의가 첫 계약으로 구체화됐다. HD현대중공업은 실증용 나트륨 원자로에 탑재될 원통형 원자로 용기(Reactor Vessel)의 제작을 테라파워로부터 수주했다. 원자로 용기는 핵분열 반응이 일어나는 노심을 격납하고 냉각재를 안전하게 유지하는 핵심 설비다. HD현대는 국제핵융합실험로(ITER)와 한국형 핵융합연구장치(KSTAR)의 진공용기 제작 경험을 바탕으로 이 사업에 참여했다.

올해 5월, 더 중요한 계약이 체결됐다. 5월 19일 미국에서 HD현대중공업은 테라파워와 "나트륨 원자로 공급에 대한 기본합의서(FA)"를 맺고 원자로 주기기인 원자로 인클로저 시스템(RES·Reactor Enclosure System) 핵심 설비를 제작·공급하는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됐다. RES는 원자로 용기를 감싸는 외부 격납 구조물로, 원자로 용기보다 규모가 크고 기술적 복잡도가 높다. 성공적인 실증 공사를 바탕으로 향후 상업 모델까지 협력을 확대하겠다는 의미다.

같은 달 19일 HD현대중공업은 테라파워, 현대건설과 함께 "차세대 나트륨 원자로 사업 협력을 위한 3자 업무협약(MOU)"을 체결했다. 세 회사는 기자재 제조, 설계·조달·시공(EPC), 사업 운영 등 전 분야에 협력하기로 합의했다.

345MW에서 500MW로, 재생에너지 시대의 원전
게이츠 이사장이 이번에 정기선 회장을 다시 만나는 이유를 이해하려면 테라파워의 Natrium 기술을 알아야 한다. 테라파워가 개발한 나트륨 원자로는 에너지 저장 기능을 갖춘 소듐냉각고속로(SFR) 방식의 4세대 SMR다. 고속 중성자를 핵분열시켜 발생한 열을 액체 나트륨으로 냉각해 전기를 생산한다.

핵심은 용융염 기반 에너지 저장 시스템이다. 기본 출력 345MW를 유지하면서 필요에 따라 최대 500MW까지 출력을 끌어올릴 수 있다는 뜻이다. 태양광이나 풍력처럼 변동성 있는 재생에너지의 약점을 보완하면서도 탄소 없는 기저전력을 공급하는 '하이브리드형 발전소'를 구현한 것이다. 기존 원자로 대비 핵폐기물 용량도 20분의 1 수준으로 훨씬 적다.

미국 원자력규제위원회(NRC)는 2025년 10월 환경영향평가를 통과시켰고, 올해 3월 건설 허가를 승인했다. 40년 만에 상업용 고급형 원자로 건설 허가를 내준 첫 사례였다. 테라파워는 지난 4월 와이오밍주 Kemmerer 부지에서 공사를 시작했으며 2030년 준공을 목표로 진행 중이다.

이 프로젝트의 시장 가치는 실증 성공에 달렸다. 올해 1월 메타(Meta)는 테라파워와 최대 8기의 나트륨 원자로 구축을 위한 계약을 체결했다. 데이터센터 확장으로 전력 수요가 급증하는 빅테크 기업들이 앞다퉈 차세대 원전에 투자하고 있는 것이다. SK그룹도 2022년 SK이노베이션과 SK(주)가 공동으로 2억5000만 달러를 투자해 테라파워의 2대 주주 자리에 올랐다.


장기 비전: 선박용 SMR과 차세대 기술
HD현대가 장기적으로 그리는 밑그림은 선박까지 이어진다. HD현대는 현재 SMR 발전 모듈을 기반으로 다양한 형태의 SMR 발전설비 개발을 준비 중이며, 향후 선박 동력원으로 쓰일 염화 용융염 원자로(MCFR) 개발도 테라파워와 협력하고 있다. 정기선 회장은 이전 면담에서 "차세대 SMR 기술은 지속가능한 미래 에너지 구현을 위한 핵심 솔루션"이라며 기술 개발의 의지를 드러낸 바 있다.

정기선 회장이 이달 게이츠 이사장과 만나는 자리는 이처럼 먼저 투자하고, 기술을 입증하고, 이제 본격적으로 상용화를 앞두는 시점에서의 만남이다. Kemmerer 1호기가 2030년 준공을 목표로 진행되는 가운데, HD현대중공업이 공급하는 RES와 원자로 용기가 제때 공급되고 품질을 입증하는 것이 향후 글로벌 테라파워 프로젝트 수주에 직결된다. 전 세계 에너지 시장이 탈탄소 기조로 전환하고 있는 가운데, 한국 기업의 역할이 얼마나 중추적인지를 확인하는 자리가 될 전망이다.

[글로벌에픽 안재후 CP / anjaehoo@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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