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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철 칼럼㉔] 문자는 왔지만, 내 퇴직연금은 멈춰 있었다

성기환 CP

2026-09-29 08:17:26

김병철 한국퇴직연금개발원 대표

김병철 한국퇴직연금개발원 대표

[글로벌에픽 성기환 CP] 지난 ㉒편에서는 퇴직연금의 목표를 가입자의 삶에서 세워야 한다고 했고, ㉓편에서는 당장 가격이 떨어지는 위험뿐 아니라 오랫동안 물가를 따라가지 못하는 위험까지 살펴야 한다고 했다. 그렇게 목표와 위험을 따져 운용방법을 골랐다면 다음 질문이 남는다. 시간이 흐른 뒤에도 그 돈이 제대로 굴러가고 있는지는 누가 살피는가? 이번 편에서는 상품을 관리하는 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멈춰 있는 가입자의 계좌까지 돌보는 책임을 살펴본다. [편집자주]

입사 5년 차인 정 과장(가상의 인물)은 얼마 전 점심시간에 동료들의 퇴직연금 이야기를 들었다.

한 동료는 주식형 펀드와 ETF에 넣어둔 돈에서 수익이 꽤 났다고 했고, 다른 동료는 은퇴 시기에 맞춰 자산을 조정해 주는 TDF를 골라둔 덕을 봤다고 했다.

정 과장은 문득 자신의 퇴직연금이 궁금해졌다. 그의 회사는 DC형 퇴직연금을 운영하고 있었다. 정 과장은 3년 전 처음 운용상품을 고를 때 “원금이라도 지키는 게 최고”라며 1년 만기 정기예금을 선택했다. 그 뒤에는 바쁜 회사 생활에 쫓겨 잊고 지냈다.
금융기관에서 사전지정운용방법, 이른바 디폴트옵션을 정하라는 문자도 여러 번 왔다. 하지만 왜 지금 정해야 하는지 알지 못한 채 ‘나중에 하지’며 미뤘다.

그날 퇴근길, 정 과장은 모바일 앱을 열어 계좌를 확인하고 당황했다. 3년 전 가입한 정기예금은 이미 만기가 끝나 있었고, 그 돈은 새로 운용할 곳을 정하지 못한 채 ‘대기성 자금’으로 남아 있었다.

정기예금이 잘못된 상품이었던 것은 아니다. 약속한 이자를 주고 제때 만기를 맞았다. 문제는 상품이 아니라 그 다음이었다. 정 과장의 돈은 예금이 끝난 자리에서 다음 선택을 기다리며 멈춰 있었다.

문자는 왔지만, 돈의 상태는 보이지 않았다

한국의 디폴트옵션은 가입자가 운용방법을 먼저 정해 두어야 작동한다. 미리 정해둔 가입자가 상품 만기 후 4주 동안에도 새 운용지시를 하지 않으면 사업자가 이를 알리고, 다시 2주가 지나면 미리 정한 방법으로 운용한다.

그러나 정 과장처럼 디폴트옵션 자체를 정하지 않았다면 사업자가 대신 상품을 고를 수 없다. 별도의 운용지시도 없으면 만기자금은 대기성 자금으로 남을 수 있다.
금융기관이 아무 일도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운용현황을 알렸고, 디폴트옵션을 정하라는 문자도 보냈다. 정 과장이 받은 안내는 이런 내용이었다.

“고객님의 사전지정 운용방법이 지정되지 않았습니다. 지정해 주시기 바랍니다.”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이 문자만으로는 정 과장의 돈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 정하지 않으면 어떤 상태가 계속되는지, 지금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기 어렵다. 일에 쫓기는 직장인에게는 ‘나중에 해도 되는 일’로 읽히기 쉽다.

만약 안내가 다음과 같았다면 어땠을까?

“고객님의 정기예금이 만기된 뒤, 자금이 새 운용방법을 정하지 못한 채 계좌에 머물러 있습니다. 다시 예금을 선택하거나, 은퇴까지 남은 기간과 감당할 수 있는 위험을 고려해 다른 운용방법을 검토할 수 있습니다. 앱에서 계좌를 확인하거나 필요하면 상담을 받아보시기 바랍니다.”

두 안내는 사실 같은 내용을 전한다. 하지만 앞의 문자가 제도상 필요한 절차를 알리는 데 그쳤다면, 뒤의 문자는 가입자가 자기 돈의 상태를 이해하고 다음 행동을 선택할 수
있게 돕는다. 절차를 지키는 것과 계좌를 돌보는 것은 이 지점에서 갈린다.

좋은 상품을 고르는 것만으로 계좌는 움직이지 않는다

상품을 고르고 계속 점검하는 일도 중요하다. 필자가 펀드평가회사를 경영하던 시절, 금융기관들은 판매할 펀드를 관리하기 위해 적지 않은 노력을 기울였다. 수익률과 위험, 비용을 비교하고 펀드매니저가 바뀌면 그 이유를 확인했다. 문제가 있다고 판단한 상품은 상품선정위원회를 거쳐 신규 추천에서 제외하기도 했다.

미국에서도 비슷한 원칙이 확인됐다. 2015년 연방대법원은 티블 vs 에디슨 사건에서 퇴직연금의 투자대안을 정한 수탁자에게 처음 신중하게 고를 의무와 별도로, 그 대안이 계속 적절한지 점검할 의무가 있다고 밝혔다. 이 사건의 수탁자는 한국의 퇴직연금사업자와 법적 지위가 같지 않다. 다만 처음 잘 골랐다고 해서 이후의 관리 책임까지 끝나는 것은 아니라는 원칙은 참고할 만하다.

그러나 상품을 아무리 잘 관리해도 정 과장의 돈은 움직이지 않는다. 그 돈은 문제가 있는 상품에 들어간 것이 아니라, 어느 상품에도 들어가지 못한 채 다음 선택을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상품을 관리하는 문지기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이제 사후관리는 상품목록을 넘어 가입자의 계좌까지 내려와야 한다.

대신 고를 수 없다면, 선택할 수 있게 도와야 한다

사업자에게도 할 말은 있다. 한국에서 퇴직연금사업자는 가입자의 돈을 마음대로 다른 상품으로 옮길 수 없다. 디폴트옵션도 가입자 대신 정할 수 없다. 어디에 운용할지는 최종적으로 가입자가 선택한다.

그러나 선택권이 가입자에게 있다는 사실이 사업자의 역할을 없애지는 않는다. 오히려 가입자가 실제로 선택할 수 있도록 만드는 일이 남는다. 무엇을 골라야 할지 잘 모르는 사람에게 선택지만 건네는 것은 권리를 준 것이 아니라 숙제를 맡긴 것에 가깝다.

사업자가 대신 결정할 수 없다면 적어도 세 가지는 해야 한다.

첫째, 지금 계좌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려야 한다. 만기가 도래했는지, 돈이 대기성 자금에 머물러 있는지, 디폴트옵션이 비어 있는지를 제도 용어가 아니라 ‘고객님의 돈이 지금 이렇게 되어 있다’는 말로 설명해야 한다.

둘째, 다음 선택지를 가입자의 처지에 비추어 풀어줘야 한다. 은퇴까지 몇 년이 남았는지, 은퇴 뒤 얼마가 필요한지, 당장 가격이 떨어질 위험과 오랫동안 물가를 따라가지 못할 위험은 어떤 지를 함께 놓고 설명해야 한다. 상품목록을 다시 보내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셋째, 알린 뒤에도 계좌가 멈춰 있다면 다시 확인해야 한다. 안내를 보냈다는 기록에서 끝내지 않고 가입자가 실제로 다음 선택을 했는지 살피고, 오랫동안 아무 행동이 없다면 상담으로 이어지게 해야 한다.

그렇다고 모든 가입자에게 상담사가 일일이 전화하라는 뜻은 아니다. 앱과 문자만으로도 현재 자금이 어디에 있는지, 그대로 두면 어떤 상태가 이어지는지, 지금 할 수 있는 선택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보여줄 수 있다. 그래도 장기간 계좌가 멈춰 있다면 그때 사람의 상담으로 연결하면 된다.

이것은 가입자 대신 투자판단을 해주는 일이 아니다. 가입자가 자신의 선택권을 실제로 행사할 수 있도록 돕는 일이다. 바로 여기에서 퇴직연금사업자의 선택 설계자로서의 책임이 시작된다.

돌봄은 절차를 하나 더 만드는 일이 아니다

퇴직연금사업자에게는 상품선정위원회도 있고 법이 정한 안내 절차도 있다. 정 과장에게도 문자는 왔다. 절차가 없었던 것이 아니다. 그 절차가 정 과장의 계좌에 멈춰 있던 돈 앞까지 충분히 닿지 않았을 뿐이다.

돌봄은 새로운 서류를 하나 더 만드는 일이 아니다. 이미 있는 점검과 안내가 가입자의 이해와 다음 선택으로 이어지게 하는 일이다. 그 출발점은 한 가지 질문이다.

“이 가입자의 돈이 지금 이 자리에 머물러 있을 이유를 가입자도 알고 있는가”

가입자가 알고 선택한 결과라면 존중해야 한다. 그러나 모르고 멈춘 돈이라면 사업자는 현재 상태를 알리고, 선택지를 풀어주고, 다시 확인해야 한다.

가입자의 삶에서 목표를 세우고(㉒편), 당장의 손실과 장기 구매력 위험을 함께 살폈다면(㉓편), 이제 그 돈이 시간 속에서 이유 없이 멈추지 않도록 돌봐야 한다(㉔편). 목표와 진단과 돌봄이 이어질 때, 가입자가 직접 선택하는 DC형에서도 가입자를 혼자 두지 않는 길이 열린다.

다음 편에서는 직장을 옮기거나 은퇴를 맞을 때의 이야기를 이어간다. 그동안 쌓은 퇴직연금을 중간에 찾아 쓰지 않고 개인형 퇴직연금(IRP)으로 이어가는 방법과, 은퇴 뒤 평생 나눠 받는 소득으로 바꾸는 일을 누가 어떻게 도와야 하는지 살펴본다.

[글로벌에픽 성기환 CP / keehwan.sung@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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