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6.09.01(화)

[Epic Why] 최태원은 왜 일본에 주목할까

‘경제공동체’ 이면에 공급망 셈법 … 인구감소 시대 시장 공략 전략도

안재후 CP

2026-09-01 12:36:20

최태원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이 '한일 저출산 대응 교류위원회 1차 회의 겸 저출산 대응 심포지엄'에서 개회사를 하고 있다. (사진=대한상공회의소)

최태원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이 '한일 저출산 대응 교류위원회 1차 회의 겸 저출산 대응 심포지엄'에서 개회사를 하고 있다. (사진=대한상공회의소)

[글로벌에픽 안재후 CP] 최태원 SK그룹 회장이 일본을 거듭 꺼내 들었다. 센다이에서 열린 한·일상공회의소 회장단 회의에 참석한 최 회장은 8월 31일 블룸버그통신과의 인터뷰에서 일본 내 메모리 반도체 합작공장 설립의 타당성을 검토하고 있다고 밝혔고, "전력과 용수가 풍부한 곳이면 어디든 고려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진행 경과를 따라가면 상황은 더 복잡하다. 8월 21일 SK하이닉스는 한국거래소의 조회공시 요구에 대해 "메모리 사업 경쟁력 강화를 위해 추가 생산기지 구축 등 다양한 방안을 검토하고 있으나 현재까지 확정된 사항은 없다"고 공시했고, 추후 구체적인 내용이 확정되는 시점 또는 1개월 이내 재공시하겠다고 밝혔다. 10일 후인 31일, SK하이닉스는 입장자료를 통해 "최태원 회장이 일본에 반도체 합작공장 설립을 검토하고 있다는 보도는 사실이 아니다"라고 해명했다. 일본 공장 건설은 아직 확정 투자가 아니다. 제품도, 파트너도, 투자액도 결정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최 회장이 일본을 반복해서 언급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최 회장은 6월 닛케이포럼에서 "한일 경제협력의 마지막은 경제공동체가 되는 일"이라며 "공동시장을 만드는 것이 마지막 길"이라고 밝혔다. 반도체 공장 하나를 짓는 것이 아니라, AI 시대의 공급망과 비용 구조, 축소되는 시장을 한일 협력으로 돌파하겠다는 거대한 구상 속에 일본이 있다는 뜻이다.

한-일 경제연대는 '한순간 발상' 아냐
최태원의 일본론이 최근에 나온 것처럼 보이지만, 그 뿌리는 훨씬 깊다. 최 회장이 한국과 일본의 경제협력을 강조한 것은 2024년부터이며, 올해 6월 닛케이포럼에서 한일 특별세션이 마련된 것은 최 회장이 지속적으로 추진해 온 한일 경제연대 구상에 양국 학계와 재계가 뜻을 모은 결과였다.

흐름을 따라가면 전략의 진화가 보인다. 2023년과 2024년 한일상공회의소 회장단 회의는 공급망과 에너지 협력을 중심으로 진행됐다. 올해 6월 닛케이포럼에서는 의제가 AI, 에너지, 저출산 대응으로 확대되었다. 그리고 8월 말 센다이 방문에서 최 회장은 이 담론들을 구체적인 사업 가능성, 즉 반도체 공장 검토와 연결했다.

최 회장은 저출산과 고령화로 인한 인구감소가 구조적 저성장을 이끌고 있으며, AI 확산으로 전력수요가 폭증하는 현실을 언급하며 "한일경제연대는 성장과 저비용 구조로의 전환을 이끌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것이 반도체 공장 검토로 구체화된 것이다. 작은 도약이 아니라 필연적 연장선이다.

일본은 SK에 무엇을 제공하는가
일본이 SK하이닉스에 단순한 해외 생산지로만 작용하는 것은 아니다. 일본에는 비상장 기업 나믹스부터 반도체 장비 대기업인 도쿄 일렉트론에 이르기까지 SK하이닉스의 다양한 협력업체가 있으며, 소니 그룹, 닌텐도 등 주요 고객사도 있다. 소재와 장비, 고객이 한데 모여 있는 생태계다.

특히 주목할 점은 키옥시아와의 관계다. SK하이닉스는 베인캐피털 계열 특수목적법인(SPC)이 보유한 키옥시아 지분에 간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구체적으로는 SK하이닉스가 이 SPC가 발행한 전환사채를 보유한 구조로, 직접 지분을 소유하거나 경영권을 갖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일본 플래시 메모리의 핵심 기업인 키옥시아와의 이러한 연결고리는 HBM 생산을 넘어 낸드플래시 기반 데이터 저장장치 시장에서 협력과 경쟁의 선택지를 동시에 가질 수 있다는 의미다. AI 시대에 메모리 수요는 HBM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데이터를 저장하고 처리하는 전체 시스템에서 소부장과 낸드의 영향력이 커질수록, 일본의 위치는 더욱 중요해진다.

최태원(오른쪽) 대한상공회의소 회장과 고바야시 겐 일본상공회의소 회장이 31일 일본 센다이 웨스틴호텔에서 열린 제15회 한일상공회의소 회장단 회의에 나란히 앉아 참석자들의 의견을 듣고 있다. 대한상공회의소 제공

최태원(오른쪽) 대한상공회의소 회장과 고바야시 겐 일본상공회의소 회장이 31일 일본 센다이 웨스틴호텔에서 열린 제15회 한일상공회의소 회장단 회의에 나란히 앉아 참석자들의 의견을 듣고 있다. 대한상공회의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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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은 '여러 선택지 중 하나'
SK하이닉스의 해외 전략을 일본 공장 하나로만 읽으면 전체 그림이 흐려진다. SK하이닉스는 일본 투자와 관련해 결정된 것은 없으며 여러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는 입장을 유지했다. 확정된 투자는 다른 곳에 집중되어 있다.

국내 투자가 압도적이다. 용인 Y2에 35조 2,000억원, 청주 M17에 19조 1,000억원 등 총 약 54조원을 투입해 대규모 메모리 제조 거점을 확충 중이다. 미국 인디애나에는 40억달러 이상을 들여 HBM 패키징과 R&D의 중심지를 짓고 있으며, 2029년 하반기 차세대 HBM 양산을 목표로 한다.

SK하이닉스의 3축 전략 구도:
• 한국(용인·청주): 고대역폭메모리 대규모 생산의 중심축 유지
• 미국(인디애나): HBM 패키징·R&D·현지 고객 직접 공급
• 일본(검토 중): 소재·장비 생태계, 낸드 연계, 공급망 다변화

이 구도에서 일본은 세 번째 선택지다. 한국에서 기술과 생산의 중심축을 유지하고, 미국에서 AI 고객사에 직접 공급할 수 있는 패키징 기지를 확보한 뒤, 일본에서는 소재·장비 생태계 접근, 낸드 협력, 에너지와 인력의 다변화를 동시에 꾸리려는 것이다. 이것이 "생산거점 다변화"의 진정한 의미다. 어느 한 나라에 의존하지 않으면서, 각 지역의 강점을 최대한 활용하는 구조다.

최태원이 일본에서 보는 것: 시장이 아니라 '생존 전략'
최태원이 일본을 말할 때의 핵심은 경제 규모와 노동력의 문제다. 그는 인구와 시장이 함께 줄어드는 구조적 변화에서 각자 잘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며, 한일 양국이 지역소멸과 사회적 문제들을 직면하고 있다고 밝혔다.

한국은 매년 노동가능인구가 줄어든다. 일본도 마찬가지다. 각각 소규모 시장으로 AI 인프라, 에너지 안보, 첨단 공급망을 구축하는 것보다 공동의 수요와 표준을 만드는 것이 비용 효율적이다. 최 회장은 한일 양국 GDP 합산 6조 규모를 활용할 수 있는 구체적 실천과제를 제안했으며, AI와 첨단산업, 에너지, 스타트업처럼 양국이 함께 해 시너지가 나는 분야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민간 교류도 이를 뒷받침한다. 2025년 일본을 찾은 한국인 관광객은 946만 명, 한국을 방문한 일본인 관광객은 365만 3,000명으로 집계됐다. 한일 양국 왕래가 1,300만 명을 넘는 시대가 된 것이다.

그런데 이 숫자 뒤에는 비대칭이 있다. 한국인의 일본 방문이 일본인의 한국 방문보다 압도적으로 많다. 최 회장은 이 이미 형성된 인적 이동을 취업, 교육, 자격 인정, 경력 인정으로 경제 활동과 연결하려 한다. 단순한 관광 왕래를 넘어, 산업 인력의 흐름을 제도화하겠다는 뜻이다. 이것이 "저출산 대응"과 "경제공동체"를 엮은 이유다.

남은 과제: 기술 규제와 정치적 변수
일본 공장 검토도, 한일 경제연대도 순탄하지만은 않다. 한국 정부는 국가핵심기술의 해외 이전·수출·합작투자를 엄격하게 관리한다. 국가핵심기술로 지정된 제품은 기술 이전·수출·해외 합작투자 시 산업통상자원부의 승인 또는 신고 절차를 거쳐야 한다. 특히 AI용 HBM 같은 최첨단 메모리 제품이 여기에 해당할 경우, 공정·기술·국고 R&D 지원 여부에 따라 심사 방식이 달라질 수 있다. 업계에서는 이 때문에 일본에 공장을 짓더라도 생산 품목이나 적용 기술이 제한될 수 있다는 지적이 있다.

미야기현의 신중함도 주목할 만하다. 무라이 요시히로 미야기현 지사는 8월 26일 기자회견에서 "미야기현으로서 알고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며 "내가 특별히 언급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지자체의 유치 활동과 기업의 실제 투자 결정은 다른 영역이다. 미야기현이 30만㎡ 규모의 후보지를 제시했다는 보도가 있었지만, 이는 지자체의 물밑 제안일 뿐 SK하이닉스의 공식 입장이 아니다.

정치적 변수도 빼놓을 수 없다. 한일 경제연대의 민간 중심 추진은 정치 리스크를 덜 받기 위한 전략일 수 있다. 외교 관계가 흔들려도 기업 간 투자, 대학과 연구기관 교류, 지역 간 인력 이동이 남아 있다면 공급망 협력은 쉽게 끊기지 않는다는 판단이다. 하지만 이 "비정치화"도 최대공약수인 경제적 이익에 의해서만 유지될 수 있다.


최태원의 두 가지 역할, 하나의 목표
이 기사를 이해하려면 최태원의 두 역할을 동시에 봐야 한다. 대한상의 회장으로서 그는 한국 기업 전체의 시장 확대, 공급망 안정, 청년 일자리, 에너지 비용 절감을 말한다. SK그룹 회장으로서 그는 AI와 메모리, 에너지, 통신, 바이오 등 그룹의 장기 성장 경로를 설계한다.

일본은 두 역할 모두에 답을 줄 수 있는 드문 파트너다. 한국에는 부족한 시장 규모와 소부장 생태계를 제공하고, SK그룹에는 메모리 공급망의 다음 단계를 제시한다. 그렇기 때문에 최 회장은 "한일 협력은 일회성 이벤트가 아니다"라며 "두터운 신뢰를 바탕으로 지속 가능하고 실행력 있는 공동체를 만드는 기반으로 나아가는 길"이라고 밝혔다.

일본 공장 검토가 이 담론의 증거일 수도, 단순한 부산물일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그 반대쪽이다. 최태원이 일본을 한국의 경쟁자가 아닌 '생존 공동체 파트너'로 재정의하려 한다는 점, 그리고 민간 경제 교류를 그 토대로 삼으려 한다는 점이다. 반도체 공장은 이 구상이 현실이 됐을 때 자연스럽게 따라올 결과일 뿐이다.

[글로벌에픽 안재후 CP / anjaehoo@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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