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성일 이음연구소장, 경영학박사.
이 위협을 막고 실질적인 노후 보루로 만들어야 한다는 데에는 사회적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다. 문제는 '어떻게'이다. 최근 정치권을 중심으로 '공적 기금형' 전환, 즉 국가가 주도하는 단일 혹은 소수의 거대 기구에 퇴직연금을 통합·위탁하자는 방안이 유력하게 거론되고 있다. 하지만 좋은 의도가 항상 최선의 결과를 낳는 것은 아니다.
공적 기금형 모델의 가장 큰 매력은 '규모의 경제'를 통한 수익률 제고와 운용의 안정성이다. 국민연금과 같은 성공적인 대규모 기금운용 경험을 바탕으로, 개인 단위에서는 어려운 글로벌 자산 배분과 전문적 투자가 가능해질 것이라는 기대가 크다.
하지만 이러한 기대 이면에는 신중하게 고려해야 할 지점들이 존재한다.
이 경우, 공격적인 투자를 원하는 청년 세대와 원금 보존을 최우선으로 하는 은퇴 임박 세대의 다양한 요구를 '평균'이라는 이름 아래 획일화할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된다. 수익률 제고라는 공익적 명분이 개인의 자기 결정권을 과도하게 제약하지 않도록 정교한 설계가 요구되는 대목이다.
둘째, '거버넌스 리스크'와 '수탁자 책임'의 문제다. 수백 조 원에 달하는 국민의 노후 자금을 운용하는 기금의 의사결정은 오직 '가입자의 이익 극대화'라는 단 하나의 목표에만 충실해야 한다. 이를 '수탁자 책임(Fiduciary Duty)'이라 한다.
그러나 노·사·정 대표 등이 참여하는 공적 기금의 지배구조는, 순수한 투자 논리 외에 특정 집단의 이해관계나 정부의 정책적 목적이 개입될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하기 어렵다. 이는 가입자의 이익이 최우선 순위에서 밀려날 수 있는 잠재적 위험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으며, 제도의 신뢰를 위협하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
많은 이들이 영국 'NEST'의 성공 사례를 언급하지만, 그 본질을 면밀히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NEST는 정부가 설립했지만, 시장에서 독점적 지위를 누리지 않는다. 수많은 민간 연금사업자들과 치열하게 경쟁하며 스스로의 가치를 증명해왔기에 성공할 수 있었다. 경쟁 없는 거대 조직이 관료적 경직성에 빠질 수 있다는 점은 우리가 경계해야 할 부분이다.
시장 경쟁 활성화, 현실적 대안의 가능성
공적 기금형에 대한 우려가 커지면서, 대안으로 기존 시장의 인프라와 역동성을 활용하자는 목소리가 힘을 얻고 있다. 바로 수십 개의 퇴직연금 사업자들이 가입자의 자산을 위임받아 운용하는 '투자일임형' 제도를 전면적으로 도입하는 것이다.
첫째, 신속성과 효율성이다. 새로운 거대 조직을 만드는 데는 막대한 설립 비용과 긴 준비 기간, 그리고 시행착오가 필연적으로 수반된다. 반면, 투자일임형은 이미 시장에 존재하는 수십 개 금융기관의 인력, 시스템, 노하우라는 사회적 자본을 즉시 활용할 수 있다. 법규 개정과 제도 정비를 통해 상대적으로 빠르고 효율적인 개혁이 가능하다는 장점이 있다.
둘째, 경쟁을 통한 시장의 자정 능력이다. '더 높은 수익률'과 '더 낮은 수수료'를 향한 사업자 간의 치열한 경쟁은 그 어떤 정부의 감독보다 강력하고 효과적인 시장 규율로 작용할 수 있다. 가입자들은 투명하게 공개된 수익률과 운용 성과를 비교하며 더 나은 사업자를 선택할 것이고, 실력이 부족한 사업자는 자연스럽게 도태될 것이다. 이러한 경쟁의 과실은 고스란히 가입자의 수익률 제고로 이어진다.
셋째, 가입자 주권의 온전한 보장이다. 자신의 투자 성향에 맞는 운용 전략과 회사를 직접 선택하고, 결과가 만족스럽지 않으면 언제든 다른 사업자로 변경할 수 있는 권리. 이는 자신의 재산에 대한 주인의 권리를 존중하는 가장 기본적인 원칙에 부합한다. 가입자가 수동적인 수혜자가 아닌, 자신의 노후를 스스로 책임지는 '현명한 주권자'로 서게 하는 방식이다.
물론 시장 경쟁 모델이 만병통치약은 아니다. 가입자의 금융 이해도가 충분하지 않을 경우 올바른 선택을 하기 어렵다는 점, 사업자 간의 과당 경쟁이 불완전판매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 등 보완해야 할 과제도 분명 존재한다. 때문에 사업자에 대한 엄격한 책임 부과 등 정교한 제도적 장치가 반드시 병행되어야 한다.
대한민국 퇴직연금 개혁은 이제 '국가 주도의 안정성'과 '시장 경쟁의 역동성'이라는 두 가지 길 위에서 중요한 선택을 내려야 한다. 어느 한쪽의 이념이나 방식만을 고집하기보다, 각 방식의 장점을 취하고 단점을 보완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궁극적으로 국민의 신뢰는 법으로 강제하거나 제도로 독점할 수 없다. 오직 투명한 정보 공개와 치열한 경쟁의 장 위에서 더 나은 성과로 스스로를 증명하는 자만이 얻을 수 있는 가치다. 그 경쟁의 활력 속에서 가입자의 신뢰를 얻는 것, 그것이야말로 우리 모두의 안정된 노후를 위한 가장 확실하고 정의로운 길일 것이다.
[글로벌에픽 신규섭 금융·연금 CP / wow@globalepi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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