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6.05.13(수)

퇴직연금 기금형제도 도입 그 이후(1)

잠자는 거인의 포효...퇴직연금 가입자의 목소리가 시장의 지각변동을 예고한다

성기환 CP

2026-05-13 10:18:23

김성일 이음연구소장(경영학 박사)

김성일 이음연구소장(경영학 박사)

[글로벌에픽 성기환 CP] 2005년 도입 이후, 한국의 퇴직연금 제도는 20년 가까운 시간 동안 ‘계약형’이라는 단일한 틀 안에서 운영되어 왔다. 사용자가 금융기관(퇴직연금사업자)을 선정하고, 근로자는 그 안에서 상품을 선택하는 구조다.

이 견고한 틀 속에서 가입자, 즉 제도의 진정한 주인인 근로자들의 목소리는 오랫동안 묻혀 있었다. 낮은 수익률에 대한 불만, 전문가의 부재, 그리고 내 자산을 운용할 사업자를 직접 선택할 수 없는 구조적 한계. 이러한 억눌림은 마치 휴화산처럼 조용히 들끓고 있었다.

지난해 발표된 ‘퇴직연금 기금전문운용기관 도입에 대한 인식조사(2025년 9월, 전국 만 20세 이상 남녀 근로자 2천명) 결과는 단순한 여론조사를 넘어, 지난 20년간 계약형 제도하에서 가입자들의 누적된 불만과 변화에 대한 갈망을 수치로 드러낸 가장 광범위하고 의미 있는 결과물이다.

이 데이터를 통해 가입자들이 무엇을 원하고, 그들의 선택이 미래 퇴직연금 시장을 어떻게 뒤흔들 것인지 심도 있게 고찰해야 할 시점에 이르렀다.
데이터가 증명하는 ‘선택권’과 ‘수익률’에 대한 갈증

이번 조사 결과의 핵심은 ‘퇴직연금 기금전문운용기관’, 즉 사실상의 기금형 제도 도입에 대한 가입자들의 찬성 여론이 반대를 압도한다는 점이다. 찬성(30.9%)이 반대(18.8%)보다 12.1%p 높게 나타난 이 수치는 표면적인 지지를 넘어, 그 이유를 들여다볼 때 비로소 진정한 의미를 갖는다. 기금형 제도 도입을 찬성하는 이유를 분석한 결과는 계약형 제도의 가장 아픈 곳을 정확히 찌른다.

첫째, ‘기금전문운용기관 간 경쟁을 통한 수익률 제고 기대’가 47.2%로 압도적인 1위를 차지했다. 이는 지난 20년간 ‘2%대 수익률’이라는 오명을 벗지 못한 퇴직연금 시장에 대한 가입자들의 준엄한 심판이다. 가입자들은 더 이상 사용자가 정해준 틀 안에서 제공되는 제한된 상품과 미미한 수익률에 만족하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의 노후 자산을 불려줄 능력 있는 전문가 집단, 즉 기금전문운용기관들이 치열하게 경쟁하는 구도를 원한다.

이는 곧 ‘수익률이 낮은 사업자는 시장에서 도태될 수 있다’는 강력한 메시지이며, 현재의 안일한 시장 구조에 대한 근본적인 불신을 드러낸다.

둘째, ‘여러 기관을 직접 비교하고 선택하는 권한 보장’이 26.7%로 뒤를 이었다. 이 항목은 현 계약형 제도의 가장 큰 맹점인 ‘가입자 선택권의 제한’에 대한 직접적인 반발이다. 현재 대다수 기업에서 퇴직연금 사업자 선정의 주도권은 사용자가 쥐고 있다. 이 과정에서 가입자의 의견은 제대로 반영되지 않거나, 심지어는 계열사 일감 몰아주기 등의 관행으로 인해 최적의 사업자가 아닌 엉뚱한 사업자가 선정되기도 한다.

가입자들은 이러한 ‘깜깜이’ 선정 방식에 분노하고 있다. 내 노후를 책임질 소중한 자산을, 내가 직접 비교하고, 분석하고, 선택하겠다는 주권 선언인 셈이다.
셋째, ‘전문가 운용으로 개인의 운용 부담 감소’(21.7%) 역시 중요한 시사점을 던진다. 이는 가입자들이 단순히 선택권만 원하는 것이 아니라, ‘제대로 된 전문가’에게 맡기고 싶다는 열망을 보여준다. 복잡한 금융 시장을 개인이 일일이 분석하고 투자처를 결정하기란 쉽지 않다. 가입자들은 현재의 퇴직연금 사업자들이 진정한 ‘운용 전문가’의 역할을 다하지 못하고 있다고 느끼며, 독립성과 전문성을 갖춘 기금 운용 조직의 등장을 간절히 바라고 있는 것이다.

이 세 가지 이유는 각각 ‘수익률 부진’, ‘선택권 제한’, ‘전문성 부재’라는 계약형 제도의 3대 원죄를 정확히 가리킨다. 그들은 이제 무엇이 문제인지, 어떤 대안이 필요한지를 명확히 알고 있다.

기금형 제도 도입...시장의 ‘게임 체인저’가 될 것

만약 이와 같은 가입자들의 열망을 바탕으로 기금형 제도가 본격적으로 도입된다면, 현재의 퇴직연금 시장은 그야말로 ‘상전벽해(桑田碧海)’ 수준의 변화를 겪게 될 것이다. 기금형 제도의 도입은 단순히 제도 하나가 추가되는 것을 넘어, 시장의 근본적인 패러다임을 바꾸는 ‘게임 체인저’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첫째, 무한 경쟁 시대의 개막: ‘간판’이 아닌 ‘수익률’로 말하라

수탁법인간 경쟁유도의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사용자가 선택한 수탁법인과 별도로 가입자가 직접 선택할 수 있게 해야 한다. 이는 곧 퇴직연금 사업자들이 더 이상 기업(사용자) 영업에만 매달릴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제 그들은 최종 고객인 ‘가입자’ 개개인을 상대로 자신의 운용 철학과 실력을 증명해야 한다. 브랜드 인지도나 계열사 관계에 기댄 안일한 영업은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 오직 객관적인 수익률, 투명한 운용 정보, 합리적인 수수료만이 가입자의 선택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무기가 될 것이다.

둘째, 시장 권력의 이동: 공급자 중심에서 수요자 중심으로

지금까지 퇴직연금 시장의 권력은 금융상품을 공급하는 퇴직연금사업자에게 있었다. 하지만 기금형 제도는 이 권력의 추를 가입자에게로 옮겨 올 것이다. 가입자들은 독립적인 기금전문운용기관들을 비교·평가하며, 자신의 자산을 맡길 곳을 결정할 것이다. 이는 마치 소비자들이 온라인 쇼핑몰에서 가격과 후기를 비교하며 최상의 상품을 고르듯, 퇴직연금 시장에서도 ‘스마트 컨슈머’로서의 힘을 발휘하게 됨을 의미한다.

셋째, 새로운 시장 생태계의 탄생: 전문성 강화와 서비스 다각화

기금형 제도의 도입은 자산운용에 특화된 전문 기관들의 등장을 의미한다. 현재 은행, 증권, 보험사가 겸업 형태로 운영하는 구조에서 벗어나, 오직 퇴직연금 자산운용에만 집중하는 수탁법인들이 시장의 새로운 강자로 부상할 수 있다.

또한, 단순히 상품 판매에 그치지 않고 가입자 개개인의 생애주기에 맞춘 맞춤형 자산 배분 컨설팅, 은퇴 설계 교육 등 고도화된 서비스 경쟁이 본격화될 것이다. 이는 전체 퇴직연금 시장의 질적 성장을 이끄는 긍정적인 충격으로 작용할 것이다.

위의 조사 결과는 단순한 경고를 넘어, 미래 시장의 청사진을 보여주는 예언서와 같다. 퇴직연금 가입자라는 ‘잠자는 거인’은 마침내 깨어났고, 그들의 포효는 이미 시작되었다. 그들은 더 나은 수익률, 완전한 선택권, 그리고 진정한 전문가를 원한다.

기금형 제도 도입은 이제 거스를 수 없는 시대적 흐름이다. 퇴직연금 사업자들은 이 거대한 변화의 쓰나미 앞에서 ‘아직은 괜찮겠지’라는 안일한 생각을 버려야 한다. 지금의 계약형 시장에 안주하며 과거의 성공 방식만을 고집하는 사업자는 다가올 새로운 시장에서 설 자리를 잃게 될 것이 자명하다.

[글로벌에픽 성기환 CP / keehwan.sung@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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