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겨울, 우연히 집어 든 한 권의 책이 내게 깊은 충격을 주었다. 초기 기독교 사막의 수도승들에 관한 기록이었다. 그들은 어떤 한 구절을 읽기 위해 며칠씩 자신의 모든 것, 심지어 ‘영혼마저 불태운다’라고 했다. 그 대목에서 나는 얼어붙고 말았다. 침대에 걸터앉아 책을 읽던 내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못한 그 순간의 정지된 감각이 아직도 선명하다.
독서에서 묵상 기도 관상으로 이어지는 이 방식은 중세에 잠시 사라졌으나, 2차 바티칸 공의회(1962~1965)를 통해 렉티오 디비나(Lectio Divina,거룩한 독서)로 다시 공인되었다.
이 독서법을 깊이 이야기하기 전에, 내 삶에 어느 날 갑자기 뛰어들었다가 사라진 그녀의 이야기를 먼저 하려고 한다.
어둠이 내려 깜깜해진 카페에서 나는 한참을 기다렸다. 결국, 내일을 약속하며 카페 문을 나섰다.
“내일이면 만날 수 있을 거야.”
하지만 그녀의 전화번호가 도무지 기억나지 않는다. 수첩을 아무리 뒤적여도 흔적이 없었다. 이상한 점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내가 그녀에게 전화했는지, 그녀가 내게 전화를 했는지조차 분명하지 않았다.
다만 그녀가 수원에 사는 것만 가까스로 떠올랐다. 그 기억조차 뚜렷하지 않았다. 집 주소도 모르고 있었다.
나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내일은 수원에 가야겠다. 그곳에 가면 동네라도 기억나겠지.’
기억은 시간이라는 바람에 실려 빛이 바래야 하는데, 오히려 그녀에 대한 기억만은 풍화되지 않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오히려 그녀와의 만난 일이 생생하게 그려졌다. 메마른 사막 같던 나의 대학 시절 후반기, 그녀와의 만남은 사막에 내리는 한줄기 빗줄기와 같았다.
기이하게도, 그렇게 자주 만났음에도 그녀의 얼굴 윤곽은 뚜렷하지 않았다. 그런 사실을 깨달은 나는 적잖이 당황했다. 그녀는 늘 퇴근 후 신촌의 어두컴컴한 카페에서 나를 만났고, 자리를 비추는 붉은 조명 뒤로 얼굴을 숨겼다. 온 얼굴을 불빛에 드러낸 적인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녀는 항상 검은색, 중세 서양 귀족 레이드들이 쓰던 창이 넓고, 창끝이 위로 솟은 모자였다. 내가 검은 모자에 관해 물으면 언제나 오묘한 미소만 짓곤 했다. 중세 서양 귀족 가문의 공작부인처럼 고귀한 매력을 가진 그녀였다.
대학 졸업 후 한참 뒤, 나는 문득 그녀가 떠올랐다. 내가 대학 시절 유일한 연인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는 사실에 놀라 서둘러 그녀를 찾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무리 옛날 수첩을 뒤져봐도 그녀의 흔적은 없었다.
이상하게도, 정말 이상하게도 아침 햇살이 방안을 비출 때면, 그녀에 대한 갈망이 신기루처럼 사라지곤 했다.
내 기억에 문제가 생긴 것일까?
지금도 초등학교 시험문제까지 기억하던 나의 두뇌 회로에 오류가 생기다니….
온몸에 소름에 돋았다. 기억의 오류, 그것은 스스로 빠져나오기 힘든 늪이다. 착각 속에서 헤어나지를 못하게 만든 그 늪은 ‘잠재기억과오(Cryptomnesia)’이었다. 그것은 무의식중에 들은 정보를 자신의 경험이라 착각하는 치명적인 함정이었다.
사실 먼저 고백할 게 있다. 나는 어느 순간부터 그녀의 부존재를 어렴풋이 눈치채고 있었다. 샤무엘 베케트의 부조리극 ‘고도를 기다리며’에서 고도가 끝내 오지 않는 것처럼, 그녀 역시 내 삶에 실재하지 않는 존재라는 것을.
만약 그녀가 나타난다면 나의 대학 시절, 그리고 그 이후 나의 삶은 철저히 부조리해질 것이다. 소시민인 나의 인생에 그렇게 낭만적이고 매력적인 여인이 등장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부조리였다.
그녀는 내 뇌가 빚어낸 가상현실의 존재였다. 지금처럼 신록이 익어가는 5월, 신촌 대학축제를 함께 거닐던 기억은 모조리 착각이었다.
실상은 이렇다.
나의 대학 시절은 생존 그 자체였다. 학업보다는 살기 위해 몸부림을 쳤던 시간들이었다. 평범한 대학생들과 달리, 내가 소외감에 젖어 드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소외감은 죽음 같은 공포였다. 소외감에서 벗어나기 위해 낭만을 향한 몸짓은 외곬으로 더 커질 수밖에 없었다.
사실 대학 시절 아무도 나를 찾지 않았다는 것을 똑똑히 기억한다. 마치 존재하지 않은 사람처럼….
소외감과 공포를 견디기 위해 나의 뇌는 일그러진 시공간 속에 가상의 그녀를 창조한 것이리라. 그렇게라도 하지 않았더라면 견딜 수 없던 초라한 그 시절을 보상받을 수 없었으리라.
착각은 위험하다. 실체와 맞닿지 않는 삶엔 참된 사랑도, 아름다움도 없고, 오직 일그러진 자화상만 존재한다. ‘귀에 붕대를 감은 고흐의 자화상처럼’, 자기기만으로 가득 찬 모습일 뿐이다.
이제 나는 안다. 운명의 신이라는 놈은 나의 고통과 불행을 즐기며 낄낄거리는 변태적인 존재였음을. 그 변태적인 시선 안에서 착각과 실제를 구별하는 것은 무의미했다.
“깜짝 속았지.”
운명의 신에게 조롱당했다는 생각에 미치자 나는 급격히 우울해졌다. 이러한 우울은 자살로 끝난 ‘젊은 베르테르의 우울’이다. 이 우울은 너무도 강했기에 한동안 나는 나의 존재를 부정하기도 했다.
착각에서 깨어났을 때 밀려드는 감정은 수치심이다. 수치심은 숨기고 싶은 무언가를 들켰을 때 느끼는 감정이다. 숨겨야 할 그 무엇도 없는 이 마당에 나는 나의 치부를 하나하나 드러내놓는다.
하지만 지금은 되찾은 시간이다. 시간이라는 여행길에 올라선 것이다. 길을 떠나는 사람의 뒷모습을 보면 가슴이 아리다. 그 뒷모습을 보는 나의 눈빛은 아주 절실하다.
삶은 관념 속에 있지 않다. 언제나 현장의 한가운데에 있다. 지적 개념으로만 삶을 살아간다면 나는 앞으로도 삶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할 것이다. 몸으로 직접 겪지 않고서는 기쁨도 슬픔도 고통도 의식의 유희일 뿐이다.
이제라도 삶의 한 가운에 뛰어들려면 오직 정확함과 민감함이라는 도구가 필요하다. 그 외의 도구는 무디고 둔탁한 도구일 따름이다.
나는 그 도구를 ‘거룩한 독서’에서 찾는다. 3권, 7권 하는 식의 독서가
착각을 부추겼다면, 거룩한 독서는 그 착각을 성벽을 단단히 깨부수는 강력한 망치다.
지인들은 내 서재의 난해한 책들을 보며 “이걸 다 읽었느냐”고 묻곤 한다. 나는 대답 대신 쓴웃음 짓는다. 그들은 그 쓴웃음을 긍정으로 해석해서 또다시 나를 난감하게 만든다.
나는 분명히 다 읽었지만, 동시에 단 한 권의 책도 읽지 않았다는 것을 어떻게 설명하란 말인가?
나는 이제 골방의 문을 닫을 것이다. 그곳에 숨어 다시 읽기 시작하리라. 나만의 골방에서 착각의 굴레를 하나하나 깨면서 삶의 진정한 실체가 도착할 때까지 기다릴 것이다.
[정보철 칼럼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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