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성일 이음연구소장(경영학박사)
그러나 이 거대한 개혁의 성패는 단순히 제도의 외형을 바꾸는 데 있지 않다. 그 기금을 누가, 어떻게 감시하고 통제하며, 누구의 이익을 위해 운용할 것인가에 대한 ‘지배구조’ 설계에 그 핵심이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현재 논의 중인 노사정 합의문을 바탕으로 한 “금융기관형 수탁법인 독립이사 중 3할 이상은 가입자가 추천하는 자로 임명한다”는 접근방법은 단순한 법률 문구를 넘어, 새로운 기금형 제도의 심장과도 같은 역할을 할 중대한 선언이다.
이는 연금 자산의 실질적 주인인 ‘가입자’에게 단순한 수혜자가 아닌, 의사결정의 주체로서 참여할 권리를 보장하는 첫걸음이기 때문이다.
가입자 추천 이사 제도는 시혜적인 조치가 아니다. 이는 퇴직연금의 본질과 지배구조의 기본 원칙에 입각한 지극히 정당하고 필연적인 요구다.
첫째, 연금 자산의 ‘소유권’에 기반한 당연한 권리다. 퇴직연금 적립금은 회사의 돈도, 금융기관의 돈도 아닌, 명백히 근로자 개개인의 사적 재산이다. “주인의 참여 없이 내 돈을 운용할 수 없다”는 원칙이 퇴직연금에는 적용되어야 한다.
자신의 재산을 운용하는 주체의 최고 의사결정기구인 이사회에 자신의 목소리를 대변할 대표를 참여시키는 것은 소유주로서 행사해야 할 최소한의 권리다.
둘째, 이해상충(Conflict of Interest)을 감시할 가장 효과적인 장치다. 기금 운용의 주체인 수탁법인(금융기관 혹은 기업집단)은 본질적으로 ‘가입자의 수익률 극대화’라는 목표와 ‘금융기관 개방형의 경우 자사의 이익(수수료 수익, 계열사 상품 판매 등) 극대화’ 사이에서 끊임없는 이해상충에 놓이게 된다.
일반적인 사외이사나 지배주주가 추천한 이사만으로는 이러한 내부적 유인을 완벽하게 통제하기 어렵다. 오직 가입자의 이익만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도록 ‘임명된’ 가입자 추천 이사만이, 수수료 체계의 합리성, 운용 전략의 적정성, 계열사 부당 지원 여부 등을 가입자의 시선에서 날카롭게 감시하고 견제하는 파수꾼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
가입자 추천 이사는 단기 시장 변동에 일희일비하지 않고, 오직 ‘가입자의 안정적인 노후’라는 장기적 목표에 부합하는 의사결정을 내리도록 이사회의 논의 방향을 잡아주는 무게추 역할을 할 수 있다. 이는 단기 실적 경쟁이 아닌, 진정한 장기 가치 창출로 운용 패러다임을 전환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할 것이다.
이처럼 가입자 추천 이사는 연금 자산의 주인인 가입자의 권리를 실현하고, 운용의 투명성과 건전성을 담보하며, 제도의 장기적 성공을 이끌 핵심적인 제도적 장치다. 문제는 이 제도를 어떻게 ‘형식’이 아닌 ‘실질’로 구현해낼 것인가이다.
2. 어떤 목소리를 담을 것인가: 올바른 가입자 추천 방법론 탐구
가입자 추천 이사 제도의 성패는 ‘누가, 어떻게 추천하는가’에 달려있다. 법의 취지를 살리면서도 현실적인 운영이 가능한 최적의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 제시된 세 가지 방안을 중심으로 장단점을 분석하고, 한국적 상황에 맞는 합리적인 대안을 제시해 본다.
(1) 가입자 대표를 통한 추천: 절차적으로 간편하고 효율적이라는 장점이 있다. 그러나 대표 1인 또는 소수의 대표단이 수십, 수십만 혹은 수백만 가입자의 다양한 이해관계를 온전히 대변하기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대표 선출 과정의 공정성 시비나, 대표가 특정 집단(예: 대기업 노조)의 영향력 아래 놓일 경우 오히려 전체 가입자의 이익에 반하는 결정을 내릴 ‘또 다른 대리인 문제’를 야기할 수 있다.
(2) 가입자 단체를 통한 추천: 노동조합이나 별도의 가입자 협의회가 후보를 추천하는 방식이다. 이미 조직된 목소리를 활용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으나, 이 역시 대표성의 한계가 명확하다. 특정 노조에 소속되지 않은 대다수의 중소기업 근로자나 비조직 근로자의 목소리는 배제될 수밖에 없다.
이는 자칫 ‘조직된 소수’가 ‘침묵하는 다수’의 이익을 침해하는 결과를 낳을 수 있어 보편적 권리 보장이라는 취지에 맞지 않다.
(3) 가입자 투표를 통한 직접 추천: 모든 가입자가 직접 투표로 후보를 선정하는 이 방식은 민주적 정당성과 투명성 측면에서 가장 이상적이다. 모든 가입자에게 동등한 한 표의 권리를 부여함으로써, 누구의 목소리도 배제되지 않는다는 강력한 명분을 가진다.
그러나 수백만 명에 달하는 전체 가입자를 대상으로 공모, 정보제공, 투표, 검증에 이르는 절차를 진행하는 것은 막대한 사회적 비용과 시간을 수반한다. 또한, 낮은 투표율은 오히려 대표성을 심각하게 훼손할 수 있으며, 전문성 없는 인기투표로 전락할 위험도 내포하고 있다.
위 세 가지 방식의 장점을 취하고 단점을 보완하는 ‘전문가 풀 기반의 제한적 직접 투표제’를 한국형 모델의 최적 대안으로 제언한다. 이는 전문성과 민주적 정당성을 동시에 확보하기 위한 현실적인 절충안이다.
1단계: 독립적인 ‘후보추천위원회’ 구성 및 전문가 풀(Pool) 확보
먼저, 수탁법인 지배구조와 완전히 독립된 ‘가입자 이사 후보추천위원회(가칭)’를 법제화한다. 이 위원회는 학계, 법조계, 금융계 등에서 명망 있는 외부 전문가들로 구성해 독립성과 전문성을 담보해야 한다. 위원회는 연금 지배구조, 자산 운용, 리스크 관리 등 분야에서 높은 전문성과 도덕성을 갖춘 인사들을 대상으로 상시적인 ‘가입자 추천 이사 후보자 풀(Pool)’을 구축하고 관리한다.
2단계: 후보자 검증 및 최종 후보 압축
이사 선임 시기가 도래하면, 후보추천위원회는 후보자 풀 내에서 혹은 외부 공모를 통해 복수의 후보자(예: 선발 인원의 2~3배수)를 심층적으로 검증하고 최종 후보로 압축한다. 이 과정에서 후보자의 경력, 전문성, 이해상충 가능성 등을 철저히 심사하여 ‘자격 미달 후보’를 사전에 걸러낸다.
3단계: 전체 가입자 대상 ‘온라인 직접 투표’ 실시
후보추천위원회가 검증하고 압축한 최종 후보자들의 명단, 주요 경력, 소견(가입자 이익을 어떻게 대변할 것인지 등)을 모든 가입자에게 투명하게 공개한다. 가입자들은 퇴직연금 앱(App)이나 홈페이지 등 익숙한 온라인 채널을 통해 손쉽게 1인 1표 방식의 직접 투표를 행사한다. 투표율을 높이기 위해 일정 기간 집중적인 홍보와 참여 캠페인을 병행하고, 투표 참여 시 소정의 인센티브를 제공하는 방안도 고려할 수 있다.
기금형 퇴직연금 제도의 성공은 단순히 수익률 숫자에 달려있지 않다. 제도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명확히 하고, 그 주인의 목소리가 의사결정 과정에 투명하게 반영되는 신뢰의 시스템을 구축하는 데서 시작된다.
‘가입자 추천 이사’는 바로 그 신뢰를 쌓는 첫 번째 벽돌이다. 형식적인 구색 맞추기가 아닌, 실질적인 권한과 민주적 정당성을 부여하는 정교한 제도를 설계하여 국민의 소중한 노후 자산을 지키는 진정한 파수꾼으로 세워야 할 때다.
[글로벌에픽 성기환 CP / keehwan.sung@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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