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올라 칼레니우스 메르세데스-벤츠 회장. 벤츠코리아 제공
전장사업의 부상, 성장동력의 재편
전기자동차 시대로의 전환이 가속화되면서 자동차 산업의 경제 구조 자체가 변하고 있다. 전 세계 전장(차량용 전자·전기장비) 사업 시장은 2024년 약 488조 원 규모에서 2028년 854조 원으로 확대될 것으로 예측되고 있다. 기존 내연기관차 중심의 부품 공급 구조가 해체되면서, 배터리부터 반도체, 디스플레이, 인포테인먼트 시스템에 이르는 새로운 전장 부품 시장이 급성장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의 주요 기업들도 이 흐름을 민첩하게 읽고 있다. LG전자의 전장사업본부(VS)는 지난해 영업이익 1,696억 원을 기록해 2015년 이후 처음 흑자로 돌아섰고, 삼성전자의 전장 자회사 하만은 영업이익이 전년 대비 46.7% 증가한 8,800억 원에 달했다. 가전과 반도체 부침 속에서도 전장사업만큼은 확실한 성장 동력이 되어주는 셈이다.
이번 회동의 핵심은 'SDV(소프트웨어 중심 자동차)'의 시대적 흐름에 있다. SDV는 자동차의 주요 기능이 소프트웨어로 제어되고, 하드웨어는 이를 구현하는 플랫폼 역할을 하는 차세대 자동차 개념이다. 과거 자동차가 '달리는 기계'였다면, SDV는 '달리는 컴퓨터'인 셈이다.
벤츠는 2025년부터 자체 개발 운영체제 'MB.OS'를 도입해 메르세데스-벤츠 차량의 기능을 소프트웨어로 제어할 계획이다. 이를 위해 벤츠는 2025년까지 연구개발 예산의 25%를 소프트웨어 분야에 투자하겠다고 선언했다. 현대자동차그룹도 2025년까지 모든 차종을 SDV로 전환하고 2030년까지 18조 원을 소프트웨어 개발에 투자하기로 결정했으며, BMW와 아우디 같은 독일 경쟁사들도 같은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
핵심 부품 공급에서의 한국 기업의 중요성
이번 회동에서 각 한국 기업이 담당할 역할은 이미 명확하다. LG는 배터리부터 디스플레이, 인포테인먼트 시스템, 센서에 이르는 전방위 공급처다. 지난 9월 LG에너지솔루션이 벤츠와 체결한 15조 원 규모의 차세대 원통형 배터리 공급 계약은 이러한 협력의 스케일을 보여주는 사례다. 현재 벤츠는 LG에너지솔루션과 SK온의 배터리를 사용하고 있지만, LG는 이번 회동을 통해 추가 계약을 노리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삼성의 경우 전장사업 전반에서 새로운 계약을 기대하고 있다. 현재 삼성과 벤츠는 하만의 차량용 인포테인먼트 시스템(MBUX)과 디지털 키 분야에서 협력 중이나, 이번 회동에서는 반도체와 배터리 공급 확대가 주요 의제가 될 것으로 보인다. 특히 주목되는 것은 삼성SDI다. 국내 배터리 3사(LG에너지솔루션, SK온, 삼성SDI) 중 유일하게 벤츠에 아직 납품하지 않은 기업이 바로 삼성SDI다. 이재용 회장의 직접 나서기는 이 공백을 메우기 위한 '세일즈'로 해석되는 까닭이다.
삼성디스플레이도 주목할 기업이다. 현재 삼성디스플레이는 벤츠와 차량용 유기발광다이오드(OLED) 패널 공급을 위한 협의 단계에 진입한 상태다. 벤츠가 고급 전기차 라인업을 확대하는 시점과 맞물려, 이번 회동이 협의에 속도를 붙일 가능성이 높다. OLED 디스플레이는 기존 LCD 대비 화질이 우수하고 얇게 제작할 수 있어 프리미엄 자동차에 적합한 부품이기 때문이다.
HS효성의 경우는 다른 역할을 한다. HS효성의 계열사인 HS효성더클래스는 메르세데스-벤츠의 공식 딜러사로, 수도권 지역에서 벤츠 차량의 판매 및 서비스를 담당하고 있다. 칼레니우스 회장과의 만남에서는 딜러망 확대 방안과 함께 모빌리티 사업 진출 방안이 논의될 것으로 전망된다. HS효성은 타이어코드 사업의 의존도를 줄이기 위해 새로운 먹거리를 찾고 있으며, 모빌리티는 그 중 하나로 주목받고 있다.
글로벌 전장 시장의 경쟁 심화 속의 선택
이번 회동이 의미 있는 이유는 단순히 공급 관계의 심화가 아니라, 각 기업이 차세대 자동차 시장에서 생존하기 위한 전략적 선택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글로벌 전장 시장에서 한국 기업들은 이미 상당한 입지를 확보했다. 하지만 중국의 CATL, BYD 같은 신흥 강자들의 추격이 거세다. 유럽 배터리 시장에서 한국 기업들의 점유율이 2021년 70.6%에서 2023년 54.9%로 하락했을 정도다.
벤츠 같은 프리미엄 제조사와의 협력 강화는 이런 상황에서 한국 기업들이 취할 수 있는 최선의 전략이다. 프리미엄 전장 부품 시장은 중국 기업들과의 가격 경쟁보다는 기술력과 품질로 경합하는 영역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번 회동은 한국의 전장 기업들에게는 차세대 시장에서의 '패권' 확보 기회이고, 벤츠에게는 'SDV 시대를 주도할 핵심 파트너' 물색의 시간인 것이다.
전략적 협력의 시작에 불과
2년 만의 방한에서 LG, HS효성, 삼성과 차례로 만나는 칼레니우스 회장의 일정은, 벤츠가 앞으로 몇 년간 진행할 SDV 전환과 전기차 고급화 전략에 한국 기업들이 얼마나 중요한 위치에 있는지를 보여준다. 이번 회동에서 나올 구체적인 계약과 협력 방안들은, 단순한 부품 공급 협의를 넘어 차세대 자동차 시장의 승자를 결정할 주요 변수가 될 것으로 예상된다.
자동차 산업의 다음 10년을 결정할 이 시장에서 한국의 삼성, LG, HS효성이 얼마나 강한 '기술력의 목소리'를 낼 수 있을지, 그리고 벤츠가 이들과의 협력을 통해 SDV 시대에서 얼마나 빠르게 리더십을 확보할 수 있을지가 주목되는 상황이다.
[글로벌에픽 안재후 CP / anjaehoo@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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