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6.05.26(화)

퇴직연금 기금형제도 도입 그 이후(4)

퇴직연금 시장의 심장을 겨누는 창, 기금형의 감성 마케팅

성기환 CP

2026-05-26 08:23:08

김성일 이음연구소장(경영학 박사)

김성일 이음연구소장(경영학 박사)

[글로벌에픽 성기환 CP] 금융 상품 마케팅의 오랜 신화는 ‘이성적 소구’였다. 복잡한 수익률 구조, 빽빽한 약관, 정교한 포트폴리오를 설명하며 고객의 합리적 판단을 이끌어내는 것이 왕도라 믿어왔다.

그러나 다가올 퇴직연금 시장의 지각변동, 즉 ‘계약형’과 ‘기금형’의 대격돌에서 승패를 가를 진짜 전장은 고객의 ‘머리(이성)’가 아닌 ‘가슴(감성)’이 될 것이다.

새롭게 등장할 기금형 수탁법인들은 시장의 후발주자로서 기존 계약형 사업자들의 견고한 성을 무너뜨리기 위해 파격적인 무기를 꺼내 들 것이다. 그 무기는 바로 소비자행동론과 행동경제학에 기반한 정교한 ‘감성 마케팅’이다.

그들은 제도와 상품의 복잡성을 설명하려 애쓰는 대신, 지난 20년간 가입자들이 느껴온 ‘불안’, ‘피로감’, ‘불신’을 정면으로 파고들고, ‘안심’, ‘기대’, ‘신뢰’라는 강력한 감정적 신호를 발신하며 시장의 헤게모니를 장악하려 할 것이다.
이 칼럼은 왜 이러한 감성적 접근이 논리적 설득을 압도하며 시장에 ‘먹힐’ 수밖에 없는지, 그 심리적 기저와 파급효과를 마케팅 전문가의 관점에서 심층 분석하고자 한다.

이성이 지배하지 못하는 시장, 가입자의 심리 지도

기금형의 감성 마케팅 전략이 효과적일 것이라 예측하는 이유는 퇴직연금 가입자들이 의사결정을 내리는 심리적 환경 자체가 감성적 판단에 극도로 취약하기 때문이다.

첫째, 고관여, 저지식의 딜레마: 복잡함 앞에서 ‘휴리스틱’에 기댄다. 퇴직연금은 내 노후가 걸린 중대한 ‘고관여’ 상품이다. 하지만 동시에 거버넌스, 수수료 구조, 위험조정 성과지표 등 일반인이 이해하기 어려운 정보의 집합체이기도 하다.

소비자행동론에서는 이처럼 ‘중요하지만(고관여), 이해하기 어려운(저지식)’ 상황에 놓인 소비자는 정보의 세세한 내용을 분석하는 ‘중심 경로’ 대신, 직관적이고 단순한 단서에 의존해 판단하는 ‘주변 경로’, 즉 ‘휴리스틱(Heuristic)’을 사용하게 된다고 설명한다.

기금형 마케팅은 바로 이 지점을 공략한다. 그들은 “독립이사가 과반이고, 가입자 추천 이사가 30%입니다”라고 복잡하게 설명하는 대신, “당신의 편이 이사회에 있습니다”라는 감성적 메시지로 ‘공정성 휴리스틱’을 자극한다. 정부의 엄격한 허가와 감독 절차를 나열하는 대신, “국가가 직접 감시합니다”라는 한마디로 ‘권위 휴리스틱’을 건드려 안전하다는 인식을 심어준다.
이는 가입자의 인지적 부담을 덜어주면서도, 신뢰라는 강력한 감정을 직접적으로 주입하는 고도로 계산된 전략이다.

둘째, 경험 기반의 피로감: ‘결정의 책임’에서 벗어나고픈 욕구. 지난 20년간 DC형/IRP 가입자들은 ‘스스로 선택하고 책임져야 한다’는 무거운 짐을 져왔다. 수많은 상품 앞에서 무엇을 골라야 할지 막막했고(결정 피로), 손실이 나면 ‘내 탓’이라는 자책감에 시달렸다(후회 회피). 이러한 부정적 경험의 축적은 ‘내가 해봤자 별수 없다’는 ‘자기효능감’의 저하로 이어졌고, 이는 자연스럽게 “차라리 나보다 뛰어난 전문가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싶다”는 강력한 ‘위임(委任) 욕구’를 키워왔다.

기금형 마케팅은 이 ‘위임 욕구’를 정조준한다. “당신은 더 이상 고민하지 마십시오. 최고의 전문가들이 당신의 노후를 위해 밤낮으로 뛰겠습니다.” 이 메시지는 단순히 전문가의 실력을 홍보하는 것을 넘어, 가입자를 선택의 고통과 책임의 무게로부터 해방시켜주는 ‘심리적 구원’의 프레임을 제공한다.

계약형 시장이 가입자에게 ‘선택의 자유’를 주었다면, 기금형은 ‘선택하지 않을 자유’라는 감성적 가치를 제안하며 시장의 패러다임을 전환시킬 것이다.

감성의 창과 방패, 기금형 마케팅의 실전 시나리오

기금형 수탁법인들은 앞서 분석한 가입자들의 심리적 약점을 파고드는 구체적인 마케팅 전략을 펼칠 것이며, 이는 기존 계약형 시장에 상당한 충격을 줄 것이다.

첫째, 프레이밍 전쟁의 서막: ‘희망’ vs ‘불안’. 초기 시장 경쟁은 ‘수익률’이라는 동일한 팩트(Fact)를 어떤 감성적 프레임에 담아 전달하느냐의 싸움이 될 것이다. 기금형은 “경쟁을 통한 수익률 제고”라는 ‘이득(Gain) 프레임’을 통해 가입자들에게 ‘희망’과 ‘기대’라는 긍정적 감정을 자극하며 공격적으로 나설 것이다. TV 광고에서는 유능한 펀드매니저들이 역동적으로 시장을 분석하는 모습을 보여주며 “당신의 잠자는 퇴직연금을 깨워라”와 같은 슬로건을 외칠 것이다.

반면, 기존 계약형 사업자들은 방어적 입장에서 “손실 가능성”이라는 ‘손실(Loss) 프레임’으로 맞대응할 가능성이 높다. “검증되지 않은 고위험 투자, 당신의 노후는 안전합니까?”와 같은 메시지로 ‘불안’과 ‘공포’를 자극해 가입자들의 이탈을 막으려 할 것이다.

하지만 이미 낮은 수익률에 대한 피로감이 누적된 시장에서, 이러한 방어적 전략은 오히려 ‘변화를 두려워하는 기득권’이라는 부정적 이미지만 강화할 수 있다. 결국, 미래에 대한 긍정적 비전을 제시하는 기금형의 ‘희망 프레이밍’이 더 강력한 설득력을 얻게 될 것이다.

둘째, 사회적 증거의 확산, ‘1등 캡처’와 ‘갈아탄 동료’. 기금형 마케팅의 가장 강력한 무기는 ‘사회적 증거(Social Proof)’의 활용이다. 대부분의 해외 기금형제도에 포함되어 있는 ‘성과평가 및 공시’ 제도는 기금형 마케팅에 날개를 달아줄 것이다.

매 분기 발표되는 ‘수익률 랭킹 1위’라는 타이틀은 그 어떤 논리적 설명보다 강력한 구매 유인이 된다. 1위 기금의 수익률 그래프는 온라인 커뮤니티와 소셜미디어에서 캡처 이미지 형태로 바이럴처럼 퍼져나갈 것이며, 이는 “남들이 다 저기로 가는데, 나만 가만히 있어도 되나?”라는 군중심리를 자극하게 될 것이다.

결론적으로, 다가올 퇴직연금 시장의 경쟁은 ‘제도 설명회’가 아닌 ‘감성 콘서트’에 가까울 것이다. 새롭게 시장에 진입하는 기금형 수탁법인들은 가입자들이 합리적 계산이 아닌 감성적 끌림으로 움직인다는 사실을 간파하고, 그들의 심리적 약점을 정교하게 파고들 것이다.

그들은 ‘안전(국가 감독)’, ‘공정(내 편)’, ‘희망(수익률)’, ‘편리함(위임)’, ‘자유(이전권)’라는 감성적 키워드를 반복적으로 노출하며, “퇴직연금은 원래 은행이나 증권사에 맡겨두는 것”이라는 낡은 기준점을 “퇴직연금은 실력 있는 기금 브랜드를 비교하고 옮기는 것”이라는 새로운 기준으로 바꾸어 놓을 것이다.

[글로벌에픽 성기환 CP / keehwan.sung@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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