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대 속에서 밀어붙인 '미래 먹거리'
햇반은 이재현 회장이 “10~20년 후를 내다보는 미래 먹거리를 만들겠다”는 의지에서 출발했다. 출시 전부터 "맨밥을 누가 사 먹겠느냐"는 의문이 따라붙었다. 사내에서도 실패 가능성이 높은 사업에 100억원을 투입하는 것은 과하다는 만류가 이어졌다. 이 회장은 즉석밥의 가능성을 믿고 직접 사업을 추진했다. 1996년 12월 국내 최초의 무균포장밥으로 햇반이 출시됐다.
투자는 멈추지 않았다. 1997년 외환위기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때에도 이 회장은 밥 사업에 대한 투자를 유지했다. 불황기에도 장기 전략을 지킨 결정이 오늘날 햇반의 기반이 됐다.
햇반의 초기 용기는 사각형이었다. 갑자기 밥이 부족할 때 꺼내 먹는 비상식이라는 개념에 맞춰, 쌓아 두기 편한 구조로 설계했다. 이후 전자레인지에 데우기 편하고 밥공기를 닮은 둥근 형태로 바뀌었다. 2000년대 들어 1~2인 가구가 늘고 생활 방식이 달라지면서 햇반은 집에서 지은 밥을 대신하는 일상식으로 자리 잡았다.
김숙진 CJ제일제당 식품마케팅실장 겸 한국사업본부장은 독립 후 밥솥 없이 필요할 때마다 햇반을 먹고 있다고 말했다. 제품이 소비자의 생활 방식과 맞닿아 있다는 점을 보여주는 사례다.
쌀 관리에서 살균까지 이어지는 공정
햇반의 경쟁력은 밥맛에서 나온다. CJ제일제당은 쌀 재배 단계의 모니터링과 수매 점검부터 건조, 보관, 도정, 취반까지 전 과정을 직접 관리한다. 국내 즉석밥 제조사 가운데 유일하게 자체 도정 시설을 갖추고 당일 도정한 쌀로 밥을 짓는다. 미강층을 벗겨낸 순간부터 수분이 줄고 산화가 시작되기 때문이다.
오예진 CJ식품연구소 수석연구원은 "갓 수확한 벼를 건조하고 보관하는 과정부터 모든 공정이 시작된다"며 "이것이 1년 쌀 품질을 좌우하는 첫 단추"라고 설명했다. 도정 조건도 품종과 날씨에 따라 매일 조정한다고 덧붙였다.
생산 과정에서는 밀봉 전에 쌀 표면을 먼저 살균하는 방식을 쓴다. 이 기술은 처음에 일본에서 들여왔지만 생산 라인을 운영하며 효율을 높이는 과정에서 자체 노하우로 발전했다. 회사는 특허 267건을 확보하며 경쟁사가 쉽게 따라오기 어려운 생산 기술을 갖췄다. 현장에서는 반도체 공장 수준의 청결도를 유지하며, 상온 기준 9개월의 유통기한을 보장하는 밀봉 공정이 이어진다.
밥맛에서 영양설계로
햇반의 다음 과제는 영양이다. 회사는 쌀과 곡물의 영양 구성을 설계하는 기술을 강화하고 있다. 단백질과 식이섬유를 늘리고 탄수화물과 열량을 낮추는 방향이다. 편리하고 맛있는 밥에서 개인의 식생활과 건강 관리에 맞춰 고르는 밥으로 제품을 나누겠다는 전략이다.
국내에서는 잡곡밥이 성장을 이끌고 있다. 햇반 가운데 잡곡밥 비중은 2019년 10%대에서 지난해 30%를 넘어섰다. 오는 12월에는 100% 식물성 단백질로 만든 '단백쌀'을 넣은 고단백 잡곡밥을 내놓는다. 이재현 회장이 강조해 온 "더 좋은 탄수화물을 고르는 시대"라는 방향과 맞닿아 있다는 평가다.
미국에서 자리 잡은 한국의 밥
햇반은 현재 60여 개국에 진출해 있다. 해외 사업의 중심은 미국이다. 해외 판매의 약 90%를 미국이 차지한다. CJ제일제당의 미국 즉석밥 사업 규모는 2021년부터 지난해까지 연평균 34%씩 늘었다. 길쭉한 장립종 쌀이 주류인 시장에서 햇반은 점유율 11.9%까지 올라왔다.
미국 소비자들이 쌀을 건강한 선택지로 인식하기 시작한 점도 성장의 배경이다. 치킨과 스테이크에 곁들이거나 부리토와 라이스 볼의 재료로 쓰는 사례가 늘고 있다. 김숙진 본부장은 교포만 한국 밥을 찾는다는 인식과 달리, 현지인들이 한국 밥을 사이드 디시로 먹는 방식이 늘었다고 설명했다. 그는 "그들의 일상에 우리의 밥이 깊숙하게 들어와 있다"고 말했다.
2028년 목표와 이재현 회장이 그린 밥의 미래
회사는 2028년까지 햇반을 국내외 연매출 1조 5000억원대 브랜드로 키운다는 목표를 세웠다. 지난해 햇반 매출은 1조 1800억원으로 역대 최대를 기록했다. 올해 누적 매출은 10조원에 이를 전망이다. 수출 비중도 지난해 15%에서 2028년 25%로 끌어올린다는 계획이다. 내년부터는 영국과 프랑스에서 시장조사를 시작해 유럽 진출을 준비한다. 수요가 늘면 미국 현지 생산 거점 설립도 검토하고 있다.
이재현 회장의 구상은 이미 15년 전부터 분명했다. 그는 "한식이 세계 식문화의 주요 카테고리를 차지할 수 있고, 비비고는 '코리아의 맥도날드'가 될 수 있다"며 해외 수출에 강한 의지를 보였다. 밥 한 공기에서 출발한 그의 판단이 이제 세계 식탁을 향하고 있다.
[글로벌에픽 안재후 CP / anjaehoo@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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