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성일 이음연구소장(경영학 박사)
기금형에서의 수탁법인(금융기관 개방형) 선정이나 계약형에서의 퇴직연금사업자(금융기관) 선정을 왜 근로자가 아닌 사용자가 독점적으로 결정하는가. 이것은 명백한 구조적 오류이자, 대리인 문제(Agency Problem) 발생의 온상이다.
1. '청지기 이론'이라는 이름의 허상
일각에서는 퇴직연금 운영에 있어 사용자의 역할을 '청지기(Steward)'로 규정하려 한다. 대리인이 주인의 이익을 위해 자발적으로 헌신할 것이라는 이 달콤한 낙관론은 현실을 철저히 외면한 결과다.
기업은 퇴직연금사업자를 고를 때 수익률 데이터보다 대출 관계나 거래 편의를 우선순위에 둔다. 중소기업일수록 이 왜곡은 심각하다. 결과적으로 근로자는 더 좋은 수익률을 낼 수 있는 사업자를 선택할 기회조차 박탈당한다. 이것이 우리가 매일 목격하는 퇴직연금 시장의 부끄러운 자화상이다.
2. '오픈형 규약 금지'의 재검토가 필요하다
과거 고용노동부가 오픈형 규약을 금지했던 논리는 현재와 같은 사용자의 과도한 권한의 위험보다 근로자의 이익이 더 클 것으로 본 점은 타당했다. 그러나 의외로 사용자는 이 권한을 자신들의 본분이 대리인임을 망각하고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수단으로 활용되는 경우가 너무 많다.
다시 말해서, 당시의 금지 조치는 이제 '근로자의 선정권'을 가로막는 족쇄가 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부연하자면, 오픈형 규약 금지는 오히려 부작용만 낳고 있다. 퇴직연금사업자를 하나 추가하려면 근로자 과반의 의견을 구하는 행정력 낭비가 발생한다. 이 경우 사용자는 번거로움을 피하기 위해 수익률이 낮아도 나몰라라 하고 기존 사업자를 고수한다.
3. 기금형 도입, '선정 권한'의 재설계가 핵심이다
기금형 제도의 경우 근로자의 선정권을 무시하는 경우가 생긴다면 그 결과가 직접적으로 근로자에게 이르러 이는 더 큰 잠재적 위험을 초래할 수 있다. 초기 설계에서 '선정 권한'을 제대로 분리하지 못하면 기금형 수탁법인의 수익률에 대한 책임에서 사용자도 선관주의 위반 대상 당사자로 포함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해법은 간명하다. 과거 규약 심사지침에 존재했던 '사용자 또는 근로자에게 위임하는 방안'을 지금 즉시 부활시켜야 한다. 제도 초기부터 근로자가 퇴직연금 사업자를 선택하거나 변경할 수 있는, 최소한 사용자에게만 귀속된 선정권을 근로자와 공유하는 '오픈형 플랫폼 환경'을 구축해야 한다.
4. 더 이상 미룰 수 없다
우리는 '퇴직연금 수익률 저하'를 탓하며 퇴직연금사업자의 탓으로만 돌려 오는 경향이 너무도 뚜렷하다. 그러나 진짜 범인에는 '선택권이 없는 근로자'와 '독점적 권한을 쥔 사용자'라는 잘못된 구조도 포함되어야 한다.
기금형 퇴직연금은 근로자의 노후 자산이라는 본질에 충실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제도 설계의 첫 단추부터 다시 끼워야 한다. 사용자의 독점적 선정권을 내려놓게 하고, 근로자에게 실질적인 선정권을 돌려주는 것. 그것이 기금형제도 성공의 제1 조건이 될 것이다.
기금형 퇴직연금의 성공은 '누가 더 잘 운용하는가'가 아니라, '누가 더 근로자의 선택을 존중하는가'에 달려 있다. 지금 당장, 퇴직연금 사업자 선정권을 근로자에게 돌려주자. 그것이 최소한의 정의다.
[글로벌에픽 성기환 CP / keehwan.sung@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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