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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철 칼럼⑮] “모두가 1등이라는 기이한 시장, 진짜 1등은 어디에?”

성과 인증과 투명한 공시… 퇴직연금 경쟁을 깨우는 마지막 퍼즐 ‘환류(Feedback)’

신규섭 금융·연금 CP

2026-02-20 09:15:29

[김병철 한국퇴직연금개발원 대표] 지난 12편부터 우리는 미국 퇴직연금의 진화 과정을 벤치마킹하여 한국 계약형 제도의 해법을 모색해 왔다. 수탁자 책임이 있는 거버넌스를 세우고(12편), 제대로 된 디폴트옵션을 도입하며(13편), 단일 TDF로 규모를 키우는(14편) 과정이었다. 이번 15편은 이 시리즈의 완결편이다. 모든 시스템이 갖춰졌다 해도 결과에 대한 냉정한 ‘평가’와 ‘책임’이 없다면 무용지물이다. 시장에 건전한 경쟁을 불러일으킬 마지막 단계, ‘성과의 검증과 환류’를 다룬다. - 편집자 주

김병철 한국퇴직연금개발원 대표.

김병철 한국퇴직연금개발원 대표.



연말이 되면 기업의 인사 담당자 박 팀장의 책상 위에는 수십 장의 퇴직연금 제안서가 쌓인다. 그런데 제안서를 넘기던 박 팀장의 고개가 갸웃거려진다. A 증권사는 ‘최근 1년 수익률 1등’이라고 하고, B 은행은 ‘3년 장기 수익률 1등’이라고 주장한다. 성과가 처참하다고 알려진 사업자조차 교묘하게 구간을 나누거나 유리한 상품만 골라내어 ‘업계 1위’라는 왕관을 쓰고 나타난다. 박 팀장은 혼란스럽다.

“모두가 1등이라는데, 왜 우리 직원들만 수익률이 낮을까?”
이것이 대한민국 퇴직연금 시장의 기이한 풍경이다. 객관적인 심판도, 검증된 성적표도 없이 선수들이 저마다 승리했다고 외치는 운동장. 조작된 통계와 파편화된 공시 속에서 ‘진짜 실력자’는 가려지고, 가입자는 길을 잃는다. 이제 이 ‘가짜 1등’들의 잔치를 끝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성과를 인증하고, 정해진 룰에 따라 공시하며, 못하면 퇴출당하는 ‘환류(Feedback Loop)’ 시스템이 작동해야 한다.

미국의 교훈, “숫자의 정직함이 신뢰를 만든다”
미국 퇴직연금 시장도 1960~70년대에는 지금의 한국과 흡사한 혼란을 겪었다. 운용사들은 가장 성과가 좋았던 포트폴리오(Portfolio)만 골라 “우리가 최고”라고 광고했고, 성과가 나쁜 계좌는 슬그머니 통계에서 뺐다.

이 혼란을 잠재운 것은 법적 규제와 민간의 강력한 자정 노력이었다. 1974년 제정된 ERISA법은 퇴직연금 자산의 공정가치 평가와 외부 회계 인증을 의무화했다. 뒤이어 CFA(국제재무분석사) 협회는 ‘GIPS(국제투자성과기준)’라는 자율 규정을 도입해 수익률 세탁의 통로를 원천 봉쇄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컴포지트(Composites, 집합 계좌)’라는 개념이다. 미국 역시 한국처럼 개별 기업이나 가입자와 1:1 계약을 맺는 구조이기에 계좌마다 수익률이 다를 수밖에 없다. 미국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규칙을 만들었다.

“동일한 전략으로 운용되는 모든 계좌를 하나의 집합(Composite)으로 묶어, 그 전체의 가중평균 수익률을 공시하라.”

이는 단기 성과를 겨루게 만드는 장치가 아니라, 같은 전략을 얼마나 일관되게, 그리고 정직하게 수행했는지를 드러내기 위한 기준이다. 잘 나온 계좌 하나만 보여주는 속임수를 막고, 진짜 실력을 하나의 표준화된 숫자로 증명하게 한 것이다.

한국의 현실, 검증 없는 공시와 고장 난 환류 시스템
우리나라의 현실은 어떠한가. 현재 금융감독원 통합연금포털 등에 공시가 이루어지고는 있지만, 이는 단순히 사업자가 제출한 데이터를 검증 없이 나열하는 수준에 그치고 있다.

심지어 동일한 펀드인데도 사업자에 따라 수익률이 달리 공시되는 경우도 있었다. 이는 현재의 공시 수치가 외부의 독립적인 검증을 전혀 거치지 않은, ‘작성자의 편의’에 따라 만들어진 숫자임을 방증한다. 1%의 수익률 차이에 30년 뒤에 노후에는 30%의 차이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는 실수가 아니라 실패를 유도하는 저주가 될 수도 있다.

더 심각한 문제는, 검증되지 않은 공시가 사업자의 행동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점이다. 성과를 개선해도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반대로 성과가 부진해도 불리한 결과가 따르지 않으니, 사업자들은 수익률 경쟁 대신 접대와 마케팅에 몰두하게 된다. 수익률이 업계 최하위여도 회사의 대출 금리를 깎아주거나 담당자와 친분이 있으면 사업자 지위는 굳건하다. 이것이 한국형 ‘계약형 제도’가 20년째 제자리걸음인 진짜 이유다.

‘인증–공시–평가’의 선순환 구조를 구축하라
12편부터 14편까지 논의한 계약형 제도의 진화(Evolution)를 위한 벤치마크로 미국을 살펴보면서 그 마지막 퍼즐로 다음과 같은 ‘성과의 환류 시스템’ 참고할 것을 제안한다.

독립적인 ‘성과 인증’ 의무화: 퇴직연금 사업자가 공시하는 수익률은 반드시 제3의 성과 평가 기관으로부터 인증을 받아야 한다. 동일 펀드의 수익률 불일치와 같은 기초적인 오류부터 바로잡아야 시장의 신뢰가 살아난다.

‘컴포지트 방식’의 표준 공시 도입: 개별 계약의 차이를 핑계로 비교를 회피해서는 안 된다. 미국처럼 운용 전략별 집합 계좌 성과를 공시하게 하여, 가입자가 사업자의 운용 역량을 객관적으로 비교할 수 있는 규칙을 만들어야 한다.

‘냉정한 평가와 교체’의 제도화: 12편에서 제안한 기업 내 ‘상품 선정 위원회’는 공시된 데이터를 바탕으로 정기적인 사업자 평가를 수행해야 한다. 성과가 하위권인 사업자는 명확한 사유를 소명하게 하고, 개선되지 않으면 가감 없이 교체(Fired)해야 한다.

교체 가능성만 존재하는 시장과, 실제 교체가 일어나는 시장은 전혀 다르다. 후자의 경험이 축적될 때 비로소 경쟁은 현실이 된다.

투명한 성적표가 경쟁의 품격을 바꾼다
경쟁이 없는 시장은 고여 썩기 마련이다. 지금의 퇴직연금 시장이 원리금 보장 상품에 안주하고 마케팅에만 매몰된 이유는, 정직하게 실력을 겨룰 ‘공정한 성적표’가 없기 때문이다.

거버넌스(12편), 디폴트옵션(13편), 규모의 경제(14편), 그리고 성과의 환류(15편). 이 네 가지가 맞물려 돌아갈 때 계약형 제도는 비로소 ‘시스템’이 된다. 진짜 실력자가 누구인지 만천하에 드러날 때, 사업자들은 비로소 가입자의 수익률을 1%라도 더 올리기 위해 밤새워 고민하게 될 것이다. 그 치열한 경쟁의 결과물은 오롯이 근로자의 풍요로운 노후로 되돌아온다.

성과를 숨길 수 없는 투명한 공시와 냉정한 평가는 거버넌스 개혁의 마침표이자, 새로운 도약의 시작이다. 이제 우리는 ‘가짜 1등’을 가려내고, 실력으로 증명하는 ‘진짜 전문가’에게 500조 원의 키를 맡겨야 한다. 1,500조 연금 강국으로 비상하는 대한민국 퇴직연금의 날개는 바로 이 ‘정직한 숫자’ 위에서 펼쳐질 것이다.

[글로벌에픽 신규섭 금융·연금 CP / wow@globalepi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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