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퇴직연금개발원 대표.
지난 3편에 걸친 연재를 통해 우리는 퇴직연금이 '돈을 안전하게 지키는 금고'라는 첫 번째 목표는 달성했지만, '노후를 지키는 진정한 안전망'으로 진화하지 못하고 있음을 확인했다. 제도적 미비로 인해 근로자들은 낮은 수익률의 악순환에 빠지고, 조각난 퇴직금을 평생 연금으로 통합하지 못하는 아이러니에 직면해 있다.
하지만 시야를 넓혀 '연금 선진국'으로 불리는 나라들의 사례를 살펴보면, 퇴직연금 제도가 개인의 노후를 얼마나 든든하게 지켜줄 수 있는지 그 청사진을 엿볼 수 있다. 가령 호주의 경우, 근로자는 직장 생활을 시작할 때부터 자신만의 퇴직연금 계좌(Superannuation Account)를 생성하여 회사에 제출한다. 이후 직장을 수차례 옮겨도 이 코드는 평생 변하지 않고 근로자와 함께 이동한다. 회사가 바뀌더라도 퇴직급여는 이 단일 계좌에 꾸준히 적립되므로, 한국에서 발생하는 이직으로 인한 퇴직금 조각화 문제가 근본적으로 해소된다. 이 계좌는 은퇴 후 근로자에게 평생 지급되는 종신 연금의 재원이 되며, 일부는 사망이나 실직 같은 위험을 대비하는 보험 기능까지 포함하고 있다.
이러한 사례는 우리에게 중요한 질문을 던진다. 어떻게 그들은 근로자들의 금융 지식 수준이나 관심도에 관계없이 퇴직연금을 진정한 '연금'으로 만들고, 노후소득을 보장하도록 할 수 있었을까? 그 핵심 이유는 바로 '선택의 권한'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그들의 제도에 깊숙이 숨겨져 있기 때문이다. 선택의 권한은 사실 여러 가지 형태로 존재하며, 현명한 제도라면 가입자의 특성과 상황에 맞는 권한을 제공해야 한다.
주어진 권한은 단 하나: '스스로 선택'
하지만 우리나라 퇴직연금 가입자에게 주어진 권한은 오직 첫 번째, '스스로 선택하는 권한'뿐이다. 이는 퇴직연금 제도를 설계할 때, 퇴직급여를 보호하기 위해 '신탁계약'이라는 금융거래의 틀에 맞추는 과정에서 충분한 제도적 법률적 정비 없이 ‘스스로 선택하는 권한만을 강제화하는 불필요한 사족을 넣었기 때문이다. 이는 퇴직연금이라는 장기 노후 자산을 마치 일반 예금이나 펀드처럼 '자기 돈은 자기가 알아서 굴려야 하고, 스스로 책임져야 한다'는 논리로 접근한 결과이다.
문제는 대부분의 퇴직연금 가입자가 스스로 올바른 선택을 내릴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현실이다. 다음의 사례를 보자.
오실장은 50대 후반, 곧 임금피크제에 들어갈 예정이다. 임금피크제 하에서는 임금이 줄어들기 때문에, DB형을 그대로 유지하면 퇴직급여가 줄어들수 있다. 오실장은 이 손해를 피하기 위해, 임금이 줄어들기 전에 쌓아둔 적립금을 자기 주도적으로 굴리는 DC형으로 전환하기로 결정했다.
회사가 알려준 금융기관 계좌에 어렵게 접속한 오실장의 눈앞에는 복잡한 투자 상품들이 펼쳐졌다. 장기간 운용할 경우 노후 자산 증식에 필수적인 원리금비보장상품(실적배당상품)이 많았지만, 오실장은 망설이지 않고 원리금보장상품을 선택했다. 그는 30년간 적립된 소중한 노후 자산을 혹시라도 잃을까 두려웠다.
결국, 현행 제도는 가입자에게 '선택의 권한'을 주었다고 하지만, 이는 마치 복잡한 미로의 지도를 주지 않고 출구를 찾으라는 것과 같다. 노후 자산을 잃을까 두려운 근로자들은 가장 쉽고 안전해 보이는 원리금보장상품이라는 단 하나의 선택지로 내몰리게 된다.
이처럼 현재의 퇴직연금 제도는 근로자의 자유로운 선택을 보장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질적으로는 노후의 가치를 훼손하는 특정 선택(낮은 수익률)만을 강요하는 함정이나 다름없다. 우리는 '전문가에게 위임하는 권한'이나 '집단의 전문성을 활용하는 권한'을 허용해야 이 문제가 해결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실제로 해외의 많은 글로벌 기업들은 이러한 '선택의 함정'을 방지하기 위한 전문가의 역할을 제도적으로 충분하게 확보하고 있다. 회사에 신규 입사자가 들어오면, 기업은 수백 가지의 복잡한 상품 목록을 건네주는 대신, 재무 전문가 및 자문 기관의 심사를 거쳐 엄선된 3~4개의 핵심 투자 상품 포트폴리오만을 추천해 준다. 근로자에게 제공되는 설명서에는 해당 상품의 그동안의 성과와 함께 근로자의 연령, 위험 성향에 적합한지에 대한 쉬운 설명이 포함되어 있다. 근로자는 복잡한 시장 분석 없이, 전문가가 미리 걸러낸 3~4개의 포트폴리오 중에서 자신에게 맞는 단 하나만 선택하면 된다.
이러한 방식은 노후를 위한 최적의 결과(수익률)를 보장할 수 있는 구조적 안전장치로, 오실장과 같은 근로자가 무분별하게 나열된 수백가지의 상품중에서 "노후 자산을 잃을까 두려워" 낮은 수익률의 원리금보장상품을 스스로 선택하는 악순환을 근본적으로 차단한다.
진정으로 우리에게 필요한 선택의 권한은 '스스로 결정할 자유'가 아니라, '노후를 위한 최적의 결과를 얻을 수 있는 권한'이어야 한다. 즉, 개인의 금융 지식 수준이나 관심도에 따라, 퇴직연금이 장기적인 노후 소득을 보장할 수 있도록 하는 제도적 장치가 필요하다.
바로 우리가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자유가 아니라, 전문가에게 맡기거나 집단의 전문성을 활용하는 다른 형태의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있는 권한에 대해 고민해야 한다.
다음 5편에서는 이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고, 진정한 의미의 '노후급여'를 실현할 수 있는 첫 번째 대안, 기금형 퇴직연금에 대해 이야기해 보겠다
[김병철 한국퇴직연금개발원 대표/ wow@globalepi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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