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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직연금. [이미지=연합뉴스]
고용노동부가 "확정된 바 없다"며 진화에 나섰지만, 500조원 규모로 올라선 퇴직연금 시장 주도권을 쥐기 위한 금융업권 간 셈법과 법리적 공방은 사상 전례 없는 수준으로 치달아 오르고 있다.
노동부 주관 워크숍 발언이 불 댕긴 '금융업권 전쟁'
발단은 고용노동부가 지난 11~12일 개최한 퇴직연금 워크숍이었다. 은행·보험·증권사 등 대형 퇴직연금 사업자 10곳과 금융감독원 관계자 등이 참석한 이 자리에서 은행권이 퇴직연금 계좌(DC형·IRP) 내 ETF 실시간 매매 허용을 건의했고, 이 내용이 "정부가 전향적으로 검토 중"이라는 취지로 언론에 보도되면서 증권업계가 즉각 반발하고 나섰다.
정부의 즉각적인 부인으로 '정부 주도의 제도 개편'이라는 목소리는 한풀 꺾였지만, 금융업계에서는 당국의 이례적으로 빠른 해명이 오히려 이 사안의 폭발력을 드러낸다는 평가가 나온다.
사태의 본질은 퇴직연금 시장 지형의 급격한 재편에 있다는 분석이다. 금융감독원이 지난 5월 공개한 '2025년 우리나라 퇴직연금 투자 백서'에 따르면 지난해 말 기준 국내 퇴직연금 적립금은 501조4천억원으로 전년 대비 69조7천억원(약 16.1%) 증가하며 처음으로 500조원을 돌파했다.
시장이 커질수록 ETF 실시간 매매라는 단 하나의 기능 차이가 업권의 생존을 가르는 변수로 부상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숙원 풀려는 은행·보험 "가입자 차별 해소 시급"
은행·보험업권의 절박함에는 복합적인 구조적 이유가 있다. 현재 은행·보험을 통해 퇴직연금(IRP·DC형)에 가입한 고객이 ETF를 거래하려면 신탁 방식을 거쳐야 한다.
이 같은 구조적 불이익은 퇴직연금 시장에만 국한된 문제가 아니다. 은행권은 특히 요구불예금 등 핵심예금(저원가성 예금)의 이탈이 지속되면서 예대마진 수익성까지 동시에 압박 받고 있다. 대출 금리는 당국의 가계부채 규제로 인상이 사실상 막혀 있고, 저원가로 조달하던 핵심예금마저 빠져나가면서 순이자마진(NIM)이 축소되는 이중고에 시달리고 있다는 분석이다.
은행권이 퇴직연금 내 ETF 신탁 판매를 NIM 축소의 대안 수익원으로 활용하며 버티는 가운데, 증권사로의 자금 이탈까지 가속화하자 ETF 실시간 매매 허용 요구를 더욱 강하게 밀어붙이게 됐다는 분석이 나온다.
실제로 숫자가 은행권의 '위기감'과 증권업계의 '판정승'을 증명한다. 금융당국 등에 따르면 2024년 10월 실물이전 제도 시행 이후 2025년 4월 말까지 약 6개월간 증권업권으로 총 9천103억원의 자금이 순유입된 반면, 은행권에서는 9천389억원에 달하는 뭉칫돈이 순유출됐다.
이 같은 양극화는 금융업권별 적립금 통계에서도 고스란히 나타난다. 2025년 말 기준 ETF 거래가 용이한 증권업권의 적립금은 131조5천26억원으로 전년 대비 21% 이상 폭증하며 가파른 성장세를 보였다. 반면 보험업권(104조7천415억원)의 시장점유율은 21.1%까지 밀려났다.
이처럼 수익률 중심의 ETF 투자 열풍이 전체 퇴직연금 시장의 판도를 흔들자, 실시간 매매가 불가능해 자금 유출을 지켜봐야만 하는 은행권이 '동일기능 동일규제' 카드를 꺼내 들고 전면에 나선 셈이다.
한 은행권 관계자는 "일반 ETF를 실시간으로 중개해 달라는 게 아니라, 적어도 퇴직연금 부문에서만큼은 동일한 환경·동일한 규제 속에서 공정하게 경쟁이 이루어져야 하는 것 아니겠느냐"고 밝혔다. 이 관계자는 "증권사에서는 실시간 매매가 되고 은행은 안 된다면, 같은 상품 라인업을 갖고도 가입자 유인이 처음부터 달라지는 기울어진 운동장"이라고 덧붙였다.
배수진 친 증권업계 "라이선스 없는 위탁매매, 전업주의 훼손"
증권업계는 은행권의 논리를 정면으로 반박하며 강경 대응에 나섰다. ETF 실시간 위탁매매는 단순한 펀드 판매를 넘어 상장증권을 다루는 증권사 고유의 '투자중개업' 영역이라는 입장이다. 금융위원회는 2021년 은행권의 관련 비조치의견서 요청에 대해 "ETF 위탁매매는 은행에 허용된 집합투자증권 투자중개업 범위에 포함되지 않는다"는 유권해석을 내린 바 있다. 이 해석이 바뀌지 않는 한 제도 개편은 금융위와의 추가 협의가 필수적이라는 게 업계 공통의 인식이다.
법리적으로도 은행권의 요구는 근거가 취약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ETF는 자본시장법상 집합투자증권(펀드)이지만, 거래소에 상장돼 주식처럼 실시간으로 매매된다. 이를 중개하는 행위는 자본시장법상 투자중개업 라이선스를 보유한 증권사만 할 수 있는 영역으로, 은행이 퇴직연금 계좌 내 ETF 실시간 매매 허용을 요구하는 것은 사실상 주식 매매 중개 허용을 요구하는 것과 법적으로 다를 바 없다는 논리다.
한 금융투자업계 관계자는 "퇴직연금은 자산을 담는 껍데기(계좌)일 뿐이며, 알맹이인 ETF를 실시간으로 거래시키는 것은 자본시장법상 명백한 상장증권 매매 중개 기능"이라며 "라이선스도 없는 은행에 실시간 브로커리지를 허용하는 것은 금융 전업주의 근간을 훼손하는 무면허 특혜이자 시장 질서 교란"이라고 날을 세웠다.
증권업계는 맞대응 카드로 ▲퇴직연금 디폴트옵션(사전지정운용제도) 내 은행 예·적금 상품 제외 ▲증권사 발행어음의 퇴직연금 운용자산 편입 등을 당국에 강력히 건의하며 역공에 나섰다. 이는 은행의 ETF 영역 침투 시도에 대해 은행의 안정형 상품 영역을 역으로 압박하는 맞교환 카드로 풀이된다.
조용한 수혜자 자산운용업계…반사이익 기대 속 관망
이번 논란에서 조용히 이해득실을 저울질하는 제3의 관찰자도 있다. 자산운용업계다. 은행권에 ETF 실시간 매매가 허용되면 판로가 넓어지는 구조여서 내심 환영하는 분위기지만, 증권사 눈치에 공식 입장은 내놓지 않고 있다.
한 자산운용업계 관계자는 "ETF 채널이 넓어질수록 운용사에는 유리하지만, 증권사가 워낙 강하게 반대하는 상황이라 공개적으로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라고 밝혔다.
은행권 일각에서는 정면 돌파 대신 규제 샌드박스를 통한 우회로도 모색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다만 금융업계에서는 투자중개업 라이선스 체계와 정면으로 충돌하는 사안인 만큼 샌드박스 적용도 쉽지 않을 것이라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한 금융업계 관계자는 "업의 특성이 엄연히 다른 만큼 이 부분을 풀어주기는 구조적으로 쉽지 않다"고 밝혔다.
기금형·의무화 맞물려…판 커지는 500조 전쟁
이번 논란이 쉽사리 수면 아래로 가라앉지 않는 데는 부처 간 관할 충돌이라는 구조적 문제도 자리한다.
퇴직연금 제도의 법령과 정책은 고용노동부 소관이지만, 적립금이 투자되는 금융상품과 시장 감독은 금융위원회 권한에 속한다. ETF 실시간 매매 허용은 고용부가 단독으로 결정할 수 없는 구조이며, 두 부처 간 정책 조율이 선행돼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고용노동부는 해명자료에서 "기금형 도입을 포함해 퇴직연금제도의 발전을 위한 다양한 방안을 폭넓게 검토 중"이라고 밝혔다. 기금형 논의가 본격화하는 시점에 ETF 매매 개방 이슈가 맞물리면서 향후 제도 개편 과정에서 두 의제가 복합적으로 얽힐 가능성도 제기된다.
결국 핵심 쟁점은 가입자의 편익을 위해 자본시장법상 투자중개업의 범위를 예외적으로 인정할 것인가, 아니면 금융 제도의 안정성과 라이선스 체계를 고수할 것인가로 귀결된다.
두 가치 모두 금융 시스템의 근간에 해당하는 만큼 어느 한쪽의 논리가 일방적으로 관철되기 어렵다는 게 전문가들의 공통된 시각이다. 정부가 2027년부터 100인 이상 사업장을 시작으로 퇴직연금 의무화를 단계적으로 추진하기로 한 만큼, 적립금 규모가 커질수록 금융업권 간 공방은 ETF 열풍과 맞물려 금융권의 가장 뜨거운 화두로 남을 것으로 보인다.
[글로벌에픽 성기환 CP / keehwan.sung@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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