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리콘밸리 진출과 '네이버 벤처스' 출범
이 의장의 복귀 후 첫 가시적 행보는 미국 진출이다. 오는 6월 5일 그는 최수연 네이버 대표, 김남선 전략투자 부문 대표와 함께 미국 실리콘밸리에서 벤처캐피털(VC) 및 스타트업 창업자 100여 명을 초청해 대규모 투자 네트워킹 행사를 개최한다. 이는 지난 3월 주주총회를 통해 복귀한 이 의장의 첫 공식 해외 일정이 될 전망이다.
이번 방문의 핵심은 실리콘밸리에 새로운 투자 법인 '네이버 벤처스' 설립을 공식화하는 것이다. 네이버 최고재무책임자(CFO) 출신으로 'M&A통'으로 불리는 김남선 대표가 이 법인의 수장을 맡을 것으로 예상된다. 김 대표는 서울대 재료공학과와 미국 하버드대 로스쿨을 졸업하고 미국 현지 로펌에서 변호사로 근무한 후, 라자드와 모건스탠리, 맥쿼리 등 글로벌 투자회사에서 경력을 쌓은 인물이다. 특히 2023년 1조6610억원 규모의 '빅딜'이었던 포시마크 지분 100% 인수를 주도적으로 성사시킨 바 있다.
조직 개편과 '레벨제' 도입으로 내부 혁신
이 의장은 복귀와 함께 대대적인 조직 개편에 나섰다. 가장 주목받는 변화는 새로운 인사 제도인 '레벨제' 도입이다. 이 제도는 전 직원을 대상으로 직무 성과와 전문성을 평가해 근속 연수와 관계없이 7단계로 등급을 나누고, 이를 성과 보상과 연동하는 시스템이다. 임원급인 '리더'를 제외하면 모두 '팀원'인 기존의 수평적 직급 체제를 바꿔 내부 경쟁을 유도하고 성과 중심 조직 문화를 정착시키겠다는 계산이다.
이는 그동안 스타트업으로서의 치열함 대신 '네무원(네이버+공무원)'이란 표현이 만들어질 정도로 안정적인 조직 문화가 자리 잡은 네이버의 현실을 직시한 조치로 보인다. 이 의장은 과거 한 사내 강연에서 "사내 게시판에서 '삼성에서 일하다가 편하게 지내려고 네이버로 왔다'는 글을 보고 너무 기가 막히고 억장이 무너졌다"고 공개 질타한 바 있다.
'테크비즈니스' 부문 신설과 최인혁 복귀 논란
이 의장은 또한 인도·스페인 등에서 기술 관련 글로벌 신사업을 발굴하는 '테크비즈니스' 부문을 신설하고, 자신의 최측근 인사로 분류되는 최인혁 전 최고운영책임자(COO)를 대표로 내정했다. 개발자 출신인 최 전 COO는 삼성SDS 시절부터 이 의장과 함께 일하며 네이버 창업 초기 공신 중 한 명으로 꼽히는 인사다.
AI 전략: '소버린 AI'와 '온서비스 AI'
이 의장이 제시하는 네이버의 AI 전략은 '소버린 AI(Sovereign AI)'와 '온서비스 AI(On-service AI)'라는 두 가지 핵심 축으로 구체화된다. '소버린 AI'는 각 국가 및 지역의 문화, 언어, 데이터 주권 및 규제 특수성에 최적화된 AI 솔루션을 개발·제공하는 전략이다. 글로벌 빅테크의 단일화된 거대 모델로는 충족시키기 어려운 특정 시장의 요구를 공략함으로써 데이터 주권을 중시하는 국가나 기업에게 매력적인 대안을 제시하려는 차별화된 접근이다.
'온서비스 AI'는 네이버의 검색, 커머스, 콘텐츠, 클라우드 등 모든 핵심 서비스에 AI 역량을 깊숙이 통합하여 사용자 경험을 개인 맞춤형으로 혁신하고, 서비스 자체의 경쟁력을 극대화함으로써 사용자 록인(Lock-in) 효과를 강화하려는 핵심 방어 전략이기도 하다.

왼쪽부터 최수연 네이버 대표, 이해진 네이버 이사회 의장, 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CEO), 제이 퓨리 엔비디아 총괄 부사장, 김유원 네이버클라우드 대표가 회동을 마친 뒤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네이버클라우드 제공
이미지 확대보기동남아 소버린 AI 확장과 엔비디아 협력
최근 이 의장과 팀네이버 경영진은 대만에서 진행된 엔비디아 클라우드 파트너 행사 'NCP 서밋'에 국내 유일 파트너사로 참석해 젠슨 황 엔비디아 CEO와 만나 동남아 소버린 AI 사업 확대를 논의했다. 이 자리에서 네이버클라우드는 태국 AI·클라우드 플랫폼 기업 '시암 AI 클라우드'와 태국어 기반 거대언어모델(LLM)과 AI 에이전트 공동 개발을 위한 업무협약을 체결했다.
양사는 각각 보유한 LLM 구축과 운영 경험과 방대한 태국어 데이터, GPU 인프라를 기반으로 올해 말까지 실제 서비스에 적용할 수 있는 태국어 특화 LLM을 구축하고 이를 기반으로 태국 내 수요가 높은 관광 특화 AI 에이전트를 선보일 예정이다. 이후 헬스케어, 공공 서비스, 학술 분야 등 AI가 필요한 다양한 산업으로 사업을 확장한다는 계획이다.
포시마크 북미 중심 재편과 김남선의 역할
이 의장은 북미 패션 중고거래 플랫폼 '포시마크'의 성장에도 신경을 쓰고 있다. 김남선 대표는 지난 3월 네이버 CFO에서 포시마크 이사회 집행의장으로 자리를 옮겨 포시마크의 경영효율화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지난 3월 포시마크 호주법인 청산 작업을 마무리했으며, 인도·영국 법인 정리 작업에도 속도를 내고 있다. 성과를 내고 있는 북미를 중심으로 사업을 재편하겠다는 취지다.
네이버가 인수하기 전 적자를 내던 포시마크는 작년 1·2·4분기에 흑자를 기록하며 수익성이 개선되고 있다. 포시마크는 월간활성이용자수 1840만명, 연간 활성 구매자수 800만명을 보유하고 있으며, 전체 사용자 중 MZ세대 비중이 80%에 달한다.
라인야후 사태와 지정학적 리스크
이러한 공격적인 확장 전략의 이면에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라인야후 사태라는 지정학적 난제가 자리하고 있다. 현재 일본 정부의 라인 개인정보 유출 사건 후속 조치로 촉발된 지분 매각 압박은 현재진행형이다. 라인야후가 네이버로부터의 기술적 독립을 추진하고, 네이버 측 핵심 임원이었던 신중호 CPO가 라인야후 이사회에서 제외되면서 네이버의 실질적인 운영 영향력 축소는 현실화되고 있다.
라인야후는 네이버 해외 매출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며 동남아시아 시장 확장 교두보 역할을 해왔기에, 지배력 약화는 글로벌 전략에 큰 타격이다. 역설적으로 이는 네이버가 특정 지역이나 파트너십에 대한 과도한 의존이 초래할 수 있는 위험을 명확히 인식하고 글로벌 시장 포트폴리오 다변화 노력을 가속하는 계기가 되고 있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도전과 기회가 공존하는 네이버의 미래
현재 네이버는 유튜브의 동영상 검색 잠식 및 구글의 공세로 인한 검색 시장 점유율 하락, 알리익스프레스·테무 등 중국계 커머스 플랫폼의 초저가 공세 등 국내 핵심 사업에서 전방위적인 도전에 직면해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AI 기술 혁신과 글로벌 확장은 선택이 아닌 생존과 지속 성장을 위한 필수가 됐다.
네이버웹툰의 글로벌 성공과 자체 초거대 AI '하이퍼클로바X'를 기반으로 한 클라우드 사업의 해외 진출, 축구장 41개 크기의 제2 데이터센터 '각 세종' 등은 긍정적 신호다. 이해진 의장의 경영 복귀와 일련의 공격적인 전략이 AI 시대를 맞아 네이버를 단순한 인터넷 기업에서 AI 기술 중심의 글로벌 기업으로 재정의하기 위한 중대한 승부수로 평가받는 이유다.
다만 글로벌 빅테크와의 치열한 경쟁, 라인야후 사태 해결, 막대한 투자에 따른 수익성 확보, 내부 조직 문화 정비 등 넘어야 할 산도 만만치 않다. 특히 미국 AI 투자, 신시장 개척, 헬스케어 등 다수의 대규모 프로젝트를 동시에 추진하는 데 따르는 실행 리스크 관리와 한정된 자원의 효과적 배분, 그리고 이를 뒷받침할 조직 역량 극대화가 이 의장의 비전 실현에 결정적 변수가 될 전망이다.
IT업계 관계자는 "이 의장 복귀 후 네이버의 조직개편과 행보가 'AI·해외'에 맞춰져 있다"면서 "자신의 비전을 실행할 방법으로 과감한 투자를 택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이해진 의장이 "더 공격적이고 활발한 일을 할 준비를 하고 있다"며 밝힌 AI 주도권 확보에 대한 강한 의지가 현실로 구현될지 귀추가 주목된다.
[글로벌에픽 안재후 CP / anjaehoo@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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