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 전 이건희 회장 프랑크푸르트 선언과 흡사한 상황...삼성 초일류 변신 벤치마킹
지난 6월 5일(현지시간) 미국 실리콘밸리 포시즌 호텔에서 열린 한 네트워킹 행사장. 이해진 네이버 이사회 의장이 200여 명의 실리콘밸리 투자자와 창업가들 앞에서 단호하게 선언했다. "네이버를 완전한 인공지능(AI) 기업으로 바꾸겠다."
2017년 네이버 경영에서 손을 뗀 지 8년 만에 이사회 의장으로 복귀한 그가 글로벌 빅테크의 심장부에서 밝힌 이 선언은 한국 IT업계에 큰 파장을 일으키고 있다. 특히 30년 전 고(故)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이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펼친 '신경영 선언'과 놀라울 정도로 유사한 상황이라는 점에서 주목받고 있다.
이 의장은 이날 행사에서 "AI는 인터넷과 모바일 수준의 거대한 파도"라며 "근본적으로 바뀌어야 된다는 생각이 모드 체인지의 계기가 됐다"고 말했다. 그는 또 "(네이버의 AI는 미국과 중국에 비해) 부족하다. (우리는) 늘 부족했다"면서도 "하지만 지금까지 검색을 포함해서 모든 것이, 부족한 상태에서 쌓아왔던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 싸움에 익숙하다"고 강조했다.
이런 냉정한 현실 인식과 동시에 드러낸 강한 변화 의지는 1993년 이건희 회장의 모습과 겹쳐진다. 당시 이건희 회장은 독일 프랑크푸르트 캠핀스키 호텔에서 사장단을 소집해 "마누라와 자식 빼고 다 바꾸자"며 삼성이 "양 위주의 의식, 체질, 제도, 관행에서 벗어나 질 위주로 철저히 변해야 한다"고 선언했다.
두 선언 모두 글로벌 경쟁 환경의 급변 속에서 기업의 생존을 위해서는 근본적 변화가 불가피하다는 위기의식에서 출발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네이버 벤처스 출범, '다윗의 돌멩이' 전략
이 의장은 이번 실리콘밸리 행사에서 네이버의 첫 해외 투자법인인 '네이버 벤처스' 설립을 공식화했다. 그는 "다윗이 골리앗을 이기려면 집중을 해야 하는데 지금은 그 돌멩이를 잡는 과정"이라며 "거대언어모델(LLM)도 있어야 되고, 클라우드도 있어야 되고, 기본적인 기술은 다 준비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이 의장은 "한국형 AI를 위한 고유 데이터 기반 구축과 글로벌 상거래 플랫폼 간 데이터 시너지에 방점을 찍겠다"며 선택과 집중 전략을 강조했다. 이는 모든 분야에서 경쟁하기보다 네이버가 강점을 가진 검색과 상거래 데이터를 활용한 차별화된 AI 전략을 구사하겠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삼성의 초일류 변신, 30년간의 성과
이건희 회장의 프랑크푸르트 선언이 주목받는 이유는 그 이후 삼성이 보여준 극적인 변화 때문이다. 삼성그룹은 1993년 '신경영' 선언 이후 국내 NO.1을 넘어 글로벌 초일류 기업으로 자리매김했다.
당시 삼성은 질보다 양을 추구하는 기업 문화로 인해 글로벌 경쟁력에 한계를 드러내고 있었다. 그러나 신경영 선언 이후 전자제품의 불량률이 전년 대비 30~50%까지 줄어들었고, 1995년 3월에는 품질이 미달인 애니콜 15만대를 불태우는 '화형식'을 단행하며 품질 경영에 대한 강한 의지를 보였다.
이러한 뼈를 깎는 변화 노력은 결국 삼성전자를 반도체와 스마트폰 분야에서 세계 1위 기업으로 만드는 원동력이 됐다. 삼성은 프랑크푸르트 선언 이후 30년간 매출과 시가총액에서 수십 배의 성장을 이뤄내며 명실상부한 글로벌 초일류 기업으로 발돋움했다.
네이버의 도전, 기회와 위험 요소들
이해진 의장의 실리콘밸리 선언이 삼성과 같은 성공으로 이어질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엇갈린 전망이 나온다.
긍정적 요소로는 네이버가 한국에서 구축한 독특한 생태계와 데이터 경쟁력을 들 수 있다. 이 의장은 "전 세계에서 고유 검색 엔진을 가지고 있는 거의 유일한 국가가 한국이고 유일한 기업이 네이버"라며 지식인, 블로그, 카페 등 사용자 생성 콘텐츠(UGC)의 힘을 강조했다.
또한 네이버가 포시마크, 월라팝 등 글로벌 상거래 플랫폼에 대한 투자를 통해 확보한 데이터와 네이버 벤처스를 통한 실리콘밸리 혁신 기술의 결합은 차별화된 경쟁력을 만들어낼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우려 요소도 만만치 않다. 무엇보다 네이버는 글로벌 무대에서 구글, 메타, 마이크로소프트 같은 빅테크 기업들에 비해 규모와 브랜드 면에서 여전히 '언더도그'라는 한계가 있다. 또한 라인 사태 이후 일본을 중심으로 한 글로벌 진출이 사실상 무산된 상황에서 미국 시장으로의 방향 전환이 과연 현실적인지에 대한 의문도 제기된다.
AI 시대의 '소버린' 전략, 지속가능성 관건
전문가들은 네이버의 성공 여부가 'AI 소버린(주권)' 전략의 실현에 달려있다고 분석한다. 이 의장이 강조한 "한국적 고유데이터"를 기반으로 한 AI 서비스가 글로벌 빅테크의 획일적인 서비스와 차별화를 이룰 수 있느냐가 핵심이다.
최수연 네이버 대표는 "실리콘밸리는 기술과 혁신의 산실로 역량있는 인재와 신기술이 모여드는 곳"이라며 "스타트업들이 어려움을 겪는 상황에서 네이버가 한국에 이어 북미에서도 역할을 해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다만 일각에서는 네이버의 글로벌 전략이 한국 시장을 지키기 위한 '공세적 방어'에 머물 가능성을 우려하고 있다. 진정한 글로벌 확장보다는 글로벌 거인들의 공세로부터 국내 시장을 보호하는 수준에 그칠 경우 지속가능성을 담보하기 어렵다는 지적이다.
30년 후를 바라보는 장기 비전
이해진 의장은 이번 복귀가 "CEO 등 경영진이 앞서 나가서 해야 될 때"라며 지원 역할에 집중하겠다고 밝혔지만, 그의 실리콘밸리 선언은 네이버의 향후 20-30년을 좌우할 중대한 이정표로 평가된다.
1993년 이건희 회장의 프랑크푸르트 선언이 30년 후 삼성을 글로벌 초일류 기업으로 만든 것처럼, 2025년 이해진 의장의 실리콘밸리 선언이 과연 네이버를 어떤 기업으로 변화시킬지 주목된다.
AI라는 거대한 파도 앞에서 '다윗의 돌멩이'를 고르고 있다는 이해진 의장. 그가 선택한 돌멩이가 골리앗을 쓰러뜨릴 수 있을지, 아니면 찻잔 속 태풍으로 그칠지는 앞으로 몇 년간의 실행력에 달려있을 것으로 보인다.
네이버의 실리콘밸리 도전이 제2의 프랑크푸르트 신화를 쓸 수 있을지, 전 세계 IT업계가 주목하고 있다.
[글로벌에픽 안재후 CP / anjaehoo@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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