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병철 한국퇴직연금개발원 대표.
네번째 칼럼을 통해 우리는 퇴직연금 가입자에게 주어진 '스스로 선택하는 권한'이 오히려 노후를 위한 최적의 결과를 가져오지 못했음을 확인했다. 대부분의 근로자는 노후 자산 증식에 필수적인 실적배당상품이 복잡하며, 상당한 금융 지식 없이는 제대로 이해하고 판단하기 어렵다.
결국 현행 계약형 제도는 가입자에게 '선택의 권한'을 주었지만, 이는 금융 지식의 부족과 무관심이라는 현실적 벽에 부딪혀 노후의 가치를 훼손하는 '선택의 함정'을 만들었다. 바쁜 직장인 개인이 수십 년에 걸친 연금을 꾸준히 관리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진정으로 우리에게 필요한 선택의 권한은 '스스로 결정할 자유'가 아니라, '노후를 위한 최적의 결과를 얻을 수 있는 권한'이어야 한다. 복잡하고 어려운 퇴직연금 운용의 짐을 개인의 어깨에서 덜어내고 안정적으로 높은 수익을 추구하기 위해서는, '전문가에게 위임하는 권한'을 실현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제 '전문가에게 위임하는 권한'을 제도적으로 실현하여, 운용 책임과 전문성을 금융 지식이 부족한 개인에게서 전문 운용 주체로 옮기는 혁신적인 변화가 필요하다. 이 요구를 만족시키며 노후 소득 보장이라는 제도적 목적을 달성하게 할 첫 번째 대안이자 제도적 틀이 '기금형 퇴직연금'이다. 여기서 '기금(基金)'이란 국민연금 기금처럼, 근로자의 노후 소득 보장이라는 특정한 목적을 위해 조성된 자금을 의미한다.
푸른씨앗이 입증한 전문가 위임 효과
김 대리의 상황을 보자. 김 대리는 15명의 직원이 근무하는 중소기업에 다닌다. 그는 최근 회사에서 가입한 중소기업퇴직연금기금 '푸른씨앗' 계좌를 확인할 때마다 행복하다. 다른 회사에 다니는 친구들은 매번 어떤 상품을 고를지 고민하고, 때론 손해 볼까봐 원리금보장상품에 가입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답답하고 안타까운 마음도 든다.
이들과 달리 김 대리는 운용에 전혀 신경쓰지 않는다. 기금 전문가들이 김 대리를 대신해 시장 상황에 맞춰 투자하고 위험을 관리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2025년 현재 30%에 가까운 높은 수익률을 확인한 김 대리는 "전문가에게 맡기니 이처럼 마음 편하게 노후 준비를 할 수 있구나"라고 생각하며, 자신이 마치 ‘숙련된 선장이 모는 안전하고 거대한 유람선(기금형)에 올라탄 승객 같다는 느낌을 받는다.
기금형 퇴직연금은 '푸른씨앗'처럼 현재 퇴직연금 제도가 가진 구조적 결함(낮은 수익률, 조각화, 선택의 함정)을 근본적으로 해결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기금형 퇴직연금 도입의 장점은 크게 세 가지다.
개인의 퇴직연금 적립금은 규모가 작아 효과적인 분산 투자가 어렵고, 이로 인해 원리금보장상품에만 치중하여 낮은 수익률의 악순환에 빠지게 된다. 기금형은 여러 사람의 자금을 집합하여 대규모로 조성함으로써 운용의 효율성인 '규모의 경제'를 극대화한다.
큰 규모의 자금은 더 우수한 전문 운용사를 유치하고, 다양한 자산에 분산 투자하여 안정적으로 위험을 관리하며, 운용 수수료까지 절감할 수 있다. 이처럼 전문가와 대형화를 통해 충분한 수익과 안정적인 위험 관리라는 퇴직연금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
둘째, 이직 시 퇴직금 조각화 문제를 해소해 '평생 통장'을 보장한다.
한국 직장인들은 이직이 잦다. 그에 따라 퇴직급여가 조각조각 분산돼 연금으로 통합하려는 노력이 제도적 장벽에 가로막히기도 된다. 기금형은 퇴직연금과 기업 간의 연계를 최소화해, 잦은 이직으로 인한 퇴직금 조각화 문제를 해결하고, 퇴직연금을 평생 가져가는 '연금 통장'으로 만드는 효과가 있다. 마치 호주처럼 근로자가 직장을 옮겨도 퇴직연금 계좌(Superannuation Account)가 평생 변하지 않고 이동하는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셋째, ‘선택의 함정’에서 벗어나 노후 준비의 안정감을 확보할 수 있다.
현행 계약형 제도는 근로자에게 복잡한 상품을 '스스로 선택'하고 책임지라고 강제한다. 하지만 기금형은 운용의 전문성을 외부 전문 주체에게 완전히 위임한다. 기업으로부터 독립된 외부에서 자금(기금이) 운용되기에 전문가들은 이 오직 가입자의 장기적인 노후 이익만을 위해 투자 결정을 내리게 된다. 이는 금융 지식이 부족한 근로자들에게 노후 준비에 대한 심리적 안정감을 제공하며, 비로소 퇴직연금이 노후 생활을 위해 설계된 제도라는 본래의 목적에 충실하게 만든다.
이미 도입된 푸른씨앗의 한계와 그 다음 단계로
이같은 장점을 가진 기금형 퇴직연금이 국내에 처음 도입되는 것도 아니다. 한국에는 이미 중소기업 근로자들의 노후 안전망 강화를 목표로 중소기업퇴직연금기금('푸른씨앗')이 도입되어 전문가 위임 운용 시스템이 성공적으로 작동하고 있다. 푸른씨앗은 규모의 경제와 운용의 전문성을 획기적으로 확보하는 데 중점을 두고 발전해왔다. 그 결과, 지난 3년간 높은 수익률과 안전성을 보여주며 '행복한 김대리'를 많이 양산하고 있다.
하지만 푸른씨앗은 30인 이하 소규모 사업장 근로자들만 누릴 수 있는 조치로, 이직 시 계좌의 연속성 또한 확보해 주지 않는다. 또한 장수 리스크를 완벽히 헤지(Hedge)할 수 있는 종신 연금 기능 등 여전히 제도적 보완을 통해 달성해야 할 과제가 남아있다.
결론적으로, 기금형 퇴직연금은 운용 책임과 전문성을 금융 지식이 부족한 개인에게서 전문 운용 주체로 옮기는 혁신적인 변화의 시작이다. '노후를 지키는' 진정한 안전망으로 진화하기 위한 가장 구체적인 해법'으로 제시된 것이 기금형 퇴직연금이라고 보면 된다.
다음 6편에서는 기금형 퇴직연금이 이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힘을 발휘하는 구체적인 작동 방식을 심층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특히, 기금형의 세 가지 핵심 요소인 규모의 경제, 외부 운용, 가입자 권한이 어떻게 현행 제도와 차별화되며, 노후를 위한 최적의 결과를 만들어내는지에 대해 더 깊이 들어가보자.
[김병철 한국퇴직연금개발원 대표 / wow@globalepi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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