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노태우 전 대통령 / 사진=연합뉴스
35년간 은폐된 비자금이 최태원 SK그룹 회장과 노소영 아트센터 나비 관장의 이혼소송 과정에서 돌연 드러나면서, 검찰은 1991년부터의 자금 흐름을 추적하기 시작했다. 노소영 관장이 이혼소송 과정에서 제출된 김옥숙 여사의 메모에 적힌 총 904억원 규모의 자금 내역과, 노 전 대통령이 최종현 전 SK그룹 회장에게 전달했다고 주장하는 비자금 300억원이 공식 사법부 기록에 올랐고, 이것이 검찰 수사의 단초가 되었다.
이혼소송이 폭로한 비자금의 실체
압수수색은 김 여사 자택에만 그치지 않았다. 노재헌 주중한국대사가 이사장 또는 상임이사로 있는 동아시아문화재단과 '보통사람들의시대 노태우센터'도 수사 범위에 포함됐다. 두 재단이 비자금의 입금 통로 역할을 했을 가능성을 검찰이 의심하고 있다는 뜻이다. 당시 노 전 대통령의 비서관들이 차명계좌 제공 혐의를 받는 만큼, 검찰은 이들의 자택도 압수수색해 관련 자료를 확보하려고 했다.
1991년 비자금부터 현재까지, 자금 흐름 추적
비자금의 시작점은 1991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노소영 관장 측은 노 전 대통령이 당시 최종현 전 SK그룹 회장에게 300억원을 전달했다고 주장했다. 또. 노 관장 측은 이 자금이 태평양증권 인수를 비롯한 선경(SK)그룹의 경영활동에 사용됐다고 주장했다. 최종현 전 회장이 담보로 제시한 선경건설(현 SK에코플랜트 전신) 명의 약속어음을 당시 거래의 증거물이라고 주장한 것으로 알려진다.
검찰이 추적해야 할 자금 흐름은 이 이상이다. 메모에 기록된 총 904억원이 어떻게 분산되고 은닉되었는지, 언제까지 비자금이 움직였는지를 파악해야 한다. 특히 범죄수익 은닉죄의 공소시효가 7년이므로, 검찰은 최근까지도 은닉 행위가 이루어졌다는 것을 입증하는 게 중요하다. 1991년 비자금 전달부터 현재까지의 모든 자금 흐름을 재구성해야만 공소시효 내에서 기소할 수 있다.
수사의 난관, 시간이 만든 벽
검찰이 마주한 현실은 가혹하다. 당사자인 노 전 대통령과 최종현 전 회장이 모두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법적 관계자들이 직접 자금 흐름을 증언할 수 없기 때문이다. 김 여사는 현재 91세의 고령으로, 사실관계 확인에 어려움이 예상된다. 노재헌 대사도 지난해 10월 이재명 정부의 첫 주중대사로 부임해 현재 중국에 머물고 있는 상태다.
추가로, 1993년 금융실명제 시행 이전의 자료가 불완전하다는 점도 수사의 복잡성을 높인다. 35년 전의 금융 거래를 현재의 기준으로 추적하고 입증하는 것 자체가 기술적 난제인 것이다. 검찰은 은닉 과정뿐 아니라 노 전 대통령이 실제로 비자금을 전달했는지, 그 자금이 범죄 수익인지를 동시에 밝혀내야 한다.

최태원-노소영 이혼 항소심 재판에 증거로 제출된 김옥숙 여사의 메모ⓒ유튜브채널 '어벤저스 전략회의' 캡쳐
법적 근거 마련, 독립몰수제 도입
이 와중에 흥미로운 변화가 입법부에서 일어났다. 전날 당사자가 사망해도 불법 재산을 몰수할 수 있도록 규정한 '독립몰수제'를 포함한 범죄수익은닉규제법 개정안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법안은 공포 후 1년 뒤 시행되며, 비자금의 국고 환수를 위한 법적 근거를 제공한다.
특히 개정안은 내란 등 헌정질서 파괴 범죄와 이에 근거해 획득한 직무상 지위를 이용한 뇌물·횡령·배임 범죄를 몰수 대상으로 명시했다. 이는 노 전 대통령 일가를 겨냥한 조항으로 해석된다. 독립몰수제가 시행되면, 노 전 대통령이 사망했어도 비자금의 불법성이 입증될 경우 국가가 해당 자산을 회수할 수 있는 길이 열린다는 의미다.
대법원이 남긴 법적 판단의 간극
지난해 10월 대법원 상고심에서 노태우 비자금 300억원을 노소영 관장의 이혼 기여분에서 명확히 제외했다. "원심이 인정한 바와 같이 피고의 부친 노태우가 원고의 부친 최종현에게 300억원 정도의 금전을 지원했다 하더라도, 이 돈의 출처는 노태우가 대통령으로 재직하는 동안 수령한 뇌물로 보인다"며 "선량한 풍속 그 밖의 사회질서에 반하고 반사회성·반윤리성·반도덕성이 현저해 법의 보호영역 밖에 있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대법원은 비자금이 실제로 최태원 측에 전달되었는지, 그 자금이 정확히 어디에 사용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최종 판단을 유보했다. 이는 비자금의 존재 여부 자체를 법원이 입증의 대상으로 삼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대법원의 파기환송 명령 이후 서울고등법원에서 진행되고 있는 파기환송심에서 이러한 사실관계가 다시 다루어질 예정이다. 검찰의 형사 수사는 대법원이 회피한 이 질문에 정면으로 답해야 한다.
1995년 조사에서 놓친 연결고리
흥미롭게도, 검찰은 과거에도 이 비자금과 맞닿아 있었다. 대검찰청 중앙수사부는 1995년 태평양증권 비자금 의혹과 관련해 최종현 전 회장을 조사했지만, 자금의 출처를 노 전 대통령 비자금과 연결되었다는 증거를 찾지 못했다. 당시 추징금 2628억원에도 이 비자금은 포함되지 않았다. 약 30년 후 이혼소송이라는 개인 분쟁 과정에서 비로소 다시 수면 위로 드러났고, 이제 검찰은 과거의 미제를 현재의 수사로 마무리하려고 한다.
공소시효와의 전쟁 … 시간 많지 않아
검찰은 증거 확보에 우선적으로 집중할 방침이다. 노 전 대통령의 비자금이 뇌물인지를 명확히 규명하고, 공소시효가 만료되지 않은 범죄수익 은닉 정황을 입증하는 데 주력할 것으로 예상된다. 다만 7년의 공소시효는 결코 충분하지 않다. 당사자 사망, 증인 확보의 어려움, 과거 자료의 불완전성을 감안하면, 검찰이 헤쳐 나가야 할 길을 결코 만만치 않다.
이혼소송이라는 개인의 혼인 분쟁에서 시작된 비자금 추적이, 35년의 침묵을 깨고 형사 수사의 영역으로 진입했다. 검찰과 입법부가 이 비자금을 어떻게 규명하고 처리할 것인가는 국가의 법치주의가 과거의 불법에 얼마나 책임 있게 대응하는가를 보여주는 시험대가 될 것이다.
[글로벌에픽 안재후 CP / anjaehoo@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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