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국민은행 신관. [사진=KB국민은행]](https://cgeimage.commutil.kr/phpwas/restmb_allidxmake.php?pp=002&idx=3&simg=202608270907490525007cc35ccc5c112222163195.jpg&nmt=29)
KB국민은행 신관. [사진=KB국민은행]
퇴직연금 실물이전 서비스 본격화와 최근 증시 상승에 따른 위험자산 선호 확대가 맞물리면서, 553조9천억원에 달하는 퇴직연금 시장의 주도권이 빠르게 증권사로 넘어가고 있다. 은행권의 이번 조치 역시 자금 유출을 막기 위한 방어책으로 풀이된다.
다만 체결시차·상품 수·법령이라는 '3중 한계'가 여전한 만큼, 이 정도 조치로는 격차를 좁히기 역부족이라는 평가도 나온다.
호가 접수 후 5분 단위 체결…30분만에 계좌에
기존에는 ETF를 매도한 뒤 그 매도대금으로 다른 종목을 사려면 다음 거래일까지 기다려야 했지만, 국민은행이 회계·전산 시스템 개발을 거쳐 이 지연을 없앴다. 다만 가입자가 여전히 매매 가격이나 체결 시점을 직접 지정할 수는 없다.
국민은행의 체결 속도는 신한·하나·농협 등 다른 은행보다 빠른 것으로 평가된다. 국민은행의 이런 선제적 행보를 계기로 다른 시중은행들도 퇴직연금 ETF 거래 시스템 개선에 나선 것으로 보인다. 하나은행은 오는 9월 시행을 목표로 같은 시스템을 준비 중이며, 우리은행 역시 전산 개발에 착수한 것으로 전해졌다.
증권업계에서도 다른 은행들의 합류를 기정사실로 보는 분위기다. 한 증권사 퇴직연금 관계자는 "타 은행들도 무조건 도입할 것"이라며 "다만 시스템통합(SI)업체 개발 일정에 따라 은행별로 오픈 시기는 다를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증권사 점유율 29.8%, 165조…ETF만 60조 몰려
은행권이 서둘러 시스템을 정비한 이유는 명확하다. 금융감독원 통합연금포털 집계 결과 올해 2분기(6월 말) 기준 증권사의 퇴직연금 시장 점유율은 29.8%로 지난해 말(26.2%) 대비 3.6%포인트 상승했다. 반면 같은 기간 은행(50.8%)과 보험사(19.4%)의 점유율은 각각 소폭 하락한 것으로 나타났다.
동일 업권 내 이동을 제외한 순유입 기준으로도 증권사는 4조1천513억원이 늘어난 반면 은행은 3조9천714억원이 빠져나가, 실물이전 서비스 자체가 '은행→증권' 머니무브의 통로로 작용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2분기만 놓고 봐도 증권사 퇴직연금 적립금은 165조원으로 전분기 대비 23조4천억원(16.5%) 늘었다. 이는 동기간 은행(6.6%)과 보험(4.3%)의 적립금 증가율을 2~3배 웃도는 가파른 성장세다.
이런 자금 이동의 배경에는 실제 수익률 격차가 있다는 분석이다. 6월 기준 퇴직연금 원리금비보장 상품 중 주식형 상품군의 최근 1년 수익률은 82.8%로 채권형 상품군(3.2%)을 크게 웃돌았는데, 올 들어 코스피가 가파른 상승세를 보인 영향이 크다.
단기 변동성도 만만치 않았지만, 반도체 등 주력 IT 기업들의 실적 호조와 미국 다우존스의 최고치 경신에 힘입어 위험자산 선호 심리는 여전히 상존하고 있다는 관측이 우세하다.
이런 위험자산 선호가 확산되면서 전체 퇴직연금 시장의 구성도 달라지고 있다. 올 2분기 전체 적립금은 전분기보다 45조1천억원(8.9%) 늘어난 553조9천억원으로 사상 최대치를 새로 썼다. 가입자가 직접 운용을 결정하는 DC형(163조3천억원)과 IRP(166조4천억원)가 증가분을 견인한 반면, 기업이 운용하는 DB형은 224조2천억원으로 상대적으로 정체됐다.
이런 흐름을 만든 데는 ETF가 결정적 역할을 했다. 증권사에 쌓인 퇴직연금 165조원 가운데 원리금비보장 상품 비중은 아직 35.7%에 그치지만, 금액으로는 이미 58조9천억원에 달한다. 이 자금 상당수가 ETF·펀드 등 시장성 상품으로 운용되고 있다.
연속 재매수는 국민銀뿐…특정금전신탁 계약 구조가 발목
이 같은 '은행→증권' 머니무브를 저지하기 위해 은행권이 당일 재매수 시스템을 속속 도입하고 있지만 증권사와의 격차를 줄이는 데 역부족이란 게 전문가들의 진단이다.
우선 매매 방식에서 차이가 난다. 국민은행은 호가 접수 후 5분 단위로 체결되는 반면, 신한은행은 15~30분 단위, 하나·농협은행은 종목별로 체결 방식이 달라 통상 30분 단위로 처리된다.
증권사가 지정가·시장가·조건부지정가·최유리지정가·최우선지정가·시간외종가 등 다양한 주문 유형을 지원하는 것과 달리, 은행권에서는 이런 세부 주문 자체가 불가능하다.
연속 재매수 기능을 갖춘 곳도 아직 국민은행뿐이다. 신한·하나·농협은행은 아직까지 이 기능을 지원하지 않고 있다.
이런 한계는 애초에 라이선스 구조에서 비롯된 것으로 풀이된다. 금융위원회는 지난 2021년 유권해석에서 "은행에 허용된 투자중개업은 수익증권 판매 업무를 의미한다"며, ETF 등 상장증권 위탁매매는 여기 포함되지 않는다고 밝힌 바 있다. 이 때문에 은행은 증권사처럼 가입자 명의의 위탁매매 계좌를 통해 시장에 직접 주문을 넣을 수 없다.
결국 은행은 가입자와 특정금전신탁 계약을 맺고 수탁자로서 증권사에 주문을 대신 넣을 수밖에 없는데, 이는 가입자의 개별 주문을 즉시 체결시키는 게 아니라 일정 시간 모아 전달하는 '집합주문' 구조를 벗어날 수 없다는 의미로 풀이된다.
지정가·시장가 등 실시간 주문 유형을 지원하지 못하는 것도 이런 라이선스 한계 때문이다. 이번 국민은행의 당일 매도·매수 시스템 역시 실제 주문은 제휴 증권사가 넣는 구조를 유지해 이런 법적 제약과 충돌하지 않도록 설계됐다.
상품 800개 vs 200개…본업 차이가 부른 인프라 격차
거래 가능한 상품 자체의 격차도 크다. 증권사는 상장된 ETF 900여 개 중 800개가량을 별도 절차 없이 취급하고, 신규 상장 종목도 당일 바로 거래할 수 있다.
반면 은행은 내부 상품위원회 심의를 거쳐 자산운용사와 상품 취급 계약을 맺고 전산시스템에 등록해야 비로소 거래가 가능해, 거래 가능 종목이 150~200개 수준에 머물러 있다. 이런 가운데 하나은행은 분할매수형(FBT) 상품을 개발하고 채권형·미국 상장 ETF까지 라인업을 넓히며 은행권 내에서 차별화를 시도하는 대표 사례로 꼽힌다.
이런 격차의 배경에는 본업의 차이가 있다는 견해도 있다. 은행 본업은 예금·대출이지만 증권사는 종합자산관리·위탁매매가 본업인 만큼, 증권사들이 수천억원을 들여 모바일트레이딩시스템(MTS)을 개선하고 투자 콘텐츠를 확충하는 것과 같은 투자를 은행권이 단기간에 따라가기는 구조적으로 쉽지 않다는 분석이다.
다만 은행권은 ETF 매매 관련 수수료 면제·인하 카드를 내놓으며 수익 포기를 감수하고 있다. 신탁 보수로 수익을 내던 은행권이 수수료 수익까지 포기하면서 가격 경쟁력 확보에 공을 들인 셈인데, 그만큼 자금 이탈 방어에 무게를 두고 있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원금보장 중심 사업구조가 걸림돌…신탁 구조개편도 절실
증권업계는 이런 은행권의 움직임에 대해 평가절하하는 분위기다. 한 증권사 퇴직연금 관계자는 "은행들이 연속 재매수, 5분 단위 집합주문 같은 기능을 앞다퉈 개발하고 있지만, 은행권 내에서 경쟁일 뿐 증권사 수준에 훨씬 못 미친다”고 잘라 말했다.
은행권이 원리금보장형 중심의 방어적 사업 구조와 특정금전신탁 계약 구조의 근본적 한계를 깨지 못한다면 증권사와의 격차는 계속 벌어질 수밖에 없다는 전문가들의 중론이다. 단순한 재매수 속도 개선을 넘어 신탁 운용 방식의 전반적 개편과 자산관리 인프라 투자가 병행돼야 한다는 지적이다.
규제 환경도 은행권에 우호적이지만은 않다. 고용노동부는 은행권 일부의 ETF 실시간 매매 허용 건의에 대해 확정된 바 없다고 선을 그었고, 금융위원회와 증권업계 역시 업무 범위 침해를 이유로 신중론을 유지하고 있다. 은행권이 2021년에도 같은 요청을 했다가 무산된 전례가 있어, 이번에도 규제 문턱을 넘기는 쉽지 않을 것이라는 관측이 우세하다.
결국 규제 완화에 기대기보다 은행권 스스로 자금 유출을 막아낼 실질적 체질 개선을 이뤄낼 수 있을지가 향후 퇴직연금 시장의 최대 관건으로 지목된다.
[글로벌에픽 성기환 CP / keehwan.sung@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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