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수광 신임 DB그룹 회장.
이번 인사는 2020년 창업주 김준기 회장의 장남 김남호 회장이 취임한 지 5년 만에 이뤄진 것으로, 한국 재벌사에서 보기 드문 '가족경영에서 전문경영으로의 자발적 전환' 사례로 주목받고 있다.
1944년생인 이수광 신임 회장은 DB그룹과 함께 성장한 '산증인'이다. 전주고와 고려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경제기획원 사무관을 거쳐 1979년 DB그룹에 합류한 후 46년간 그룹의 핵심 사업들을 이끌어왔다.
그의 가장 큰 성과는 DB손해보험에서 나왔다. 사장 재임 기간 동안 혁신적인 수익구조 개선을 통해 회사를 국내 손해보험업계 선두주자로 끌어올렸다. 특히 해외사업 확장에서 탁월한 성과를 보였는데, DB손해보험의 미국 사업은 현재 12개 주에 4개 지점을 운영하며 2023년 약 7,000억원의 보험료 수입을 기록했다. 이는 국내 손해보험사 전체 해외 보험료 수입의 절반을 넘는 규모다.
베트남 PTI 지분 37.3% 인수 등 동남아시아 진출도 그의 전략적 안목을 보여주는 대표 사례다. 작년 7월부터 맡고 있는 한국농구연맹(KBL) 총재직은 겸임하기로 했다.
토요타 모델 벤치마킹한 지배구조 혁신
DB그룹은 이번 인사를 통해 "대주주와 전문경영인이 번갈아가며 경영을 맡는 일본 토요타와 같은 자율·책임경영 체제를 확고히 뿌리내리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이는 전문경영인 영입을 통해 성과를 극대화하면서 창업 일가가 그룹의 장기 비전을 제시하는 모델이다.
김남호 회장은 명예회장으로 추대되어 그룹의 비전과 발전 방향을 제시하는 역할을 맡게 된다. 실무 경영은 이수광 신임 회장을 중심으로 김정남 보험사업그룹장, 고원종 금융사업그룹장, 이재형 제조서비스사업그룹장이 함께 이끄는 전문경영인 체제로 완전히 전환됐다.
DB그룹이 전문경영인 체제를 선택한 배경에는 복잡해진 경영환경이 있다. 글로벌 무역전쟁 격화, 급격한 산업구조 변동, AI 혁명, 경영 패러다임 변화 등 다층적 도전에 직면해 있기 때문이다.
특히 그룹의 핵심인 보험사업은 고령화 심화와 디지털 전환 가속화로 사업모델 혁신이 시급하다. 금융사업 부문은 금리 상승과 규제 강화 속에서 새로운 성장동력을 찾아야 하고, 제조서비스 부문은 반도체 시장의 치열한 경쟁 속에서 기술 우위를 확보해야 한다.
2022년 말 보험·금융·제조서비스 3개 사업그룹으로 개편한 것도 이러한 변화에 대응하기 위한 선제적 조치였다. 각 사업 분야의 전문성을 극대화하면서 시너지 효과를 창출하겠다는 전략이다.
하지만 그룹은 이를 기회로 전환했다. 2017년 이근영 전 금감원장을 그룹 회장으로 영입해 위기를 넘겼다. 이후 2020년 김남호 회장 체제 출범 후 안정적인 성장세를 보이며 성과를 거뒀다. 특히 DB손해보험은 20조원 이상의 매출을 올리며 그룹 성장을 견인했다.
DB그룹의 이번 선택은 한국 재벌사에서 드문 사례다. 대부분 재벌이 3세, 4세 승계를 준비하는 상황에서 전문경영인에게 경영권을 이양한 것은 파격적이다.
이는 2024년 출범한 '기업밸류업 프로그램'과도 맞닿아 있다. 한국 기업들이 글로벌 시장에서 저평가받는 '코리아 디스카운트' 해소를 위해 지배구조 개선이 핵심 과제로 떠오른 상황이다.
이수광 신임 회장은 "해외 보험시장 진출 확대, 금융부문 대형화, 제조서비스부문 신성장동력 확충에 박차를 가하겠다"며 "전문경영인 체제의 장점을 살려 그룹의 지속가능한 성장을 이끌어나가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글로벌에픽 신규섭 금융·연금 CP / wow@globalepi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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