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부가 추진하는 50조 원 규모 '기금형 퇴직연금' 도입 계획에 대해 금융계와 학계의 논란에 뜨겁다.
국정기획위원회가 국정과제로 채택한 이 제도는 표면적으로는 연금 수익률 개선과 국민 노후보장 강화를 내세우지만, 그 이면에는 국가 통제 체제 구축이라는 우려스러운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진입장벽 50조, 과연 경쟁 촉진일까
정부는 네덜란드, 호주 등 연금 선진국 모델을 벤치마킹해 복수의 민간 기금 간 경쟁을 통한 시장 친화적 개혁을 표방한다. 그러나 '최소 50조원'이라는 자산 규모 요구는 사실상 신규 사업자의 시장 진입을 원천 차단하는 거대한 장벽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크다.
현재 수십 개 사업자가 치열하게 경쟁하는 퇴직연금 시장이 소수의 거대 금융자본만이 참여할 수 있는 '그들만의 리그'로 전락할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되는 이유다. 이는 정부가 인허가권, 관리감독권, 세제 혜택 등을 무기로 소수의 '선택된' 기금들을 손쉽게 통제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드는 것과 다르지 않다.
대체투자 허용, 노후자금의 정치적 사금고화 우려
기금의 벤처캐피털, 부동산, 사모펀드(PEF) 등 대체투자 허용 방침 역시 논란의 중심에 있다. 수익률 제고라는 명분 아래 국민의 소중한 노후자금이 정치적 목적 달성을 위한 수단으로 오용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부실기업 구조조정, 특정 산업 육성, 증시 부양 등 정치적 필요에 따라 이 거대 기금들이 '보이지 않는 손'의 통제를 받을 수 있는 통로가 열릴 수 있다는 지적이 설득력을 얻는 이유다.
이에 대해 기금형 옹호론자들은 호주의 강력한 독립 감독기구 APRA를 성공 사례로 제시한다. 퇴직연금 전문가들 중 몇몇은 이를 두고 "한국의 현실을 도외시한 탁상공론"이라고 비판한다. 감독 당국 간의 주도권 싸움을 뚫고 진정한 독립성을 갖춘 감독기구를 만드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정부 입맛에 맞는 인사를 수장으로 앉혀 '민간 기금'을 합법적으로 통제하려는 의도가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
정부는 "가입자가 기금으로 옮길지 선택에 맡기겠다"며 강제성이 없음을 강조한다. 그러나 바로 이 '선택권'이 기금형 제도의 실패를 예고하는 아킬레스건이 될 수 있다.
대다수 가입자들은 정부가 문제 삼는 '낮은 수익률'보다 국민연금 수령까지 버티기 위한 '원금 보존'에 더 무게를 둔다. 평생 모은 퇴직금을 정부와 정치권의 입김에 좌우될지 모르는 정체불명의 거대 기금에 선뜻 맡길 가입자는 거의 없을 것이다.
현재 국민연금 고갈 논란과 불투명한 운용으로 정부 기금에 대한 국민적 불신이 극에 달한 상황에서 또 다른 '관제 기금'에 소중한 사적 재산을 맡기라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특히 은퇴가 가까운 중장년층에게는 검증되지 않은 기금형으로의 이동이 감당할 수 없는 도박으로 여겨질 것이다.
확정급여형(DB)을 운영하는 기업 입장에서 기금형 전환은 아무런 실익 없는 선택이 될 수도 있다. 운용은 통제할 수 없는 외부 기금에 맡기고, 손실이 발생하면 그 부족분을 기업이 세금으로 메워야 하는 구조를 어떤 경영자가 받아들이겠는가. 결국 '권한 없이 책임'만 지라는 불합리한 요구다.
더욱이 한국의 대립적 노사관계에서 50조원 이상 기금의 수탁법인에 '노사동수'가 선행조건이라면, 수탁법인의 의사결정이 '정치적 투쟁의 장'으로 변질될 가능성마저 배제할 수 없다.
퇴직급여는 근로자 개개인이 평생의 땀으로 일군 소중한 재산이다. 국가의 역할은 그 재산을 통제하고 관리하는 것이 아니라, 국민이 '스스로의 노후를 책임지는 현명한 주권자'로서 자유롭게 선택하고 경쟁할 수 있는 투명하고 공정한 시장 환경을 만들어주는 것이다.
정부가 추진하는 50조원 규모의 기금형 퇴직연금은 혁신적 개혁이 아닌 국가 통제 체제 구축이라는 본질적 한계를 안고 있다. 근로자들의 불신과 기업들의 외면으로 인해 실패할 가능성이 높은 이 제도보다는, 진정으로 국민의 안정된 노후를 보장할 수 있는 시장 중심의 투명하고 공정한 개혁 방안을 모색하는 것이 더욱 절실하다. 그것이야말로 우리 모두의 안정된 노후를 위한 가장 확실하고 정의로운 길이 될 것이다.
[글로벌에픽 신규섭 금융·연금 CP / wow@globalepi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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