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병철 한국퇴직연금개발원 대표.
지난 칼럼에서 우리는 기금형 퇴직연금이 전문 운용 철학, 규모의 경제, 그리고 '선택의 함정'으로부터의 해방이라는 세 가지 원리를 통해 높은 수익을 달성할 수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이제 우리 앞에는 더 본질적인 질문이 놓여 있다. 이 기금을 누가 조성하고, 누가 책임질 것인가?
현행 계약형 제도가 실패한 이유는 명확하다. 금융 비전문가인 근로자에게 복잡한 상품 운용 책임을 떠넘겼기 때문이다. 기금형 제도가 추구해야 할 새로운 방향은 근로자들에게 '오직 나의 장기적인 이익만을 위해 책임질 최고의 전문가를 선택할 권한'을 실질적으로 부여하는 것이다.
기금의 조성 주체는 곧 수탁자를 지정하는 것이다. 그 수탁자가 책임 있는 독립성을 확보했는지, 그리고 근로자의 선택권을 충분히 보장하는지가 제도의 성패를 가른다. 이 기준으로 현재 논의되는 세 가지 기금 조성 모델을 살펴보자.
기업형 기금은 단일 기업 또는 복수의 기업이 공동으로 기금을 조성하는 전통적 방식이다. 하지만 이 모델은 두 가지 치명적 약점으로 인해 점차 소멸하는 추세다.
대기업에 다니는 박 차장을 떠올려보자. 회사의 유동성 악화 소문에 그는 불안하다. 회사가 검토 중인 '기업형 퇴직연금기금'이 더욱 그를 불안하게 만든다. 기금 운영 위원회가 수익률보다 회사 이익을 우선시해 계열사 채권에 투자하도록 압력을 가하거나, 기금 자산을 회사 재정에 활용하려 들지 않을까?
이것이 바로 기업형 기금의 본질적 문제다. 퇴직연금 자산은 회사 재정으로부터 완전히 독립되어야 하지만, 기업이 기금을 조성하면 의사결정에 개입할 여지가 생긴다. 수탁자 책임의 핵심인 충실의무가 기업의 이해관계에 의해 훼손될 위험이 존재하는 것이다.
더 큰 문제는 근로자의 선택권 박탈이다. 근로자는 회사가 조성한 기금에 종속될 수밖에 없고, 더 전문적이고 우수한 성과를 내는 다른 기금을 선택할 기회를 잃게 된다.
선진국에서 과거 많았던 기업형 기금들이 대부분 소멸하고, 특정 기업의 영향력에서 독립된 복수 기업형만 생존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기업형 기금은 그 구조적 위험 때문에 다른 제도가 정착된 이후 신중히 검토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공공기관형 기금은 국가나 공공기관이 제도 소외 계층 보호 같은 특정 정책 목적을 위해 조성하는 모델이다.
우리나라의 중소기업퇴직연금기금 '푸른씨앗'이 좋은 사례다. 30인 이하 소규모 사업장 근로자들의 안전망 강화를 목표로 성공적으로 작동하고 있다. 공익적 목적을 가진 기관이 운영함으로써 수탁자 책임도 충분히 강화됐다.
하지만 만약 공공기관형 기금만이 독점 운영된다면 어떻게 될까? 경쟁이 사라지면 기금 운용의 효율성과 서비스 개선 노력이 정체될 수 있다. 더 중요한 것은 근로자가 더 좋은 성과를 내는 기금으로 옮겨갈 자유를 침해한다는 점이다.
낮은 수익률의 근본 원인은 수탁자 책임이 없는 계약형 제도 하에서 금융 지식이 부족한 개인에게 운용 책임을 강제하는 구조적 결함에 있다. 그 책임을 민간 금융기관에 전가해 기금형 조성 주체에서 배제하는 것은 오히려 규모의 경제와 전문 운용 노하우를 활용할 기회를 상실하는 일이다.
따라서 공공기관형은 제도적 사각지대에 놓인 근로자를 위한 필수적인 안전망 역할에 집중하고, 경쟁과 전문성을 통한 선택권 강화는 민간금융기관 모델에 맡기는 것이 바람직하다.
금융기관형 기금, 선택의 자유가 만드는 경쟁
금융기관형 기금은 민간 금융기관(은행, 증권사 등)이 주도해 기금을 조성하는 방안이다. 이 모델은 근로자의 선택권 확대와 시장 효율성 강화라는 중요한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
금융기관형 기금의 참여는 퇴직연금 개혁의 전문성을 극대화하는 데 필수적이다. 이들은 전문 운용 노하우와 시스템을 갖추고 있으며, 신탁법 등 금융 관련 법률에 따라 수탁자 책임을 명백하게 요구받는다.
가장 중요한 장점은 근로자가 다수의 경쟁적인 금융기관형 기금 중에서 자신이 원하는 기금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선택의 자유가 주어지면, 기금들은 자연스럽게 더 높은 수익률과 투명한 공시, 그리고 낮은 수수료로 경쟁할 수밖에 없다. 이는 결국 가입자의 실질 수익률을 높이는 선순환으로 이어진다.
누가 당신의 노후를 지킬 것인가
퇴직연금 개혁의 성공은 수탁자 책임의 독립성 확보를 기반으로, 근로자에게 '최적의 전문가를 선택할 자유'를 보장하는 데 달려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정책적 방향은 명확하다.
기업형 기금은 수탁자 독립성 및 근로자 선택권 제한이라는 구조적 위험을 안고 있어, 제도의 주류 모델로 검토하는 것은 신중해야 한다.
공공기관형 기금은 공익적 목적 달성을 위한 필수적인 안전망 역할에 집중하는 것이 효율적이다.
금융기관형 기금은 엄격한 수탁자 책임을 부여하고 시장 경쟁을 통해 근로자들의 선택의 자유를 극대화하기에 주류 모델로 확대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기금 조성 주체를 정하는 것은 곧 수탁자의 역할을 지정하는 일이다. 이 수탁자가 기업의 이해관계로부터 독립되어 오직 근로자의 이익을 최우선으로 하도록 책임을 명확히 하는 것, 이것이 기금형 제도의 성패를 좌우할 것이다.
다음 칼럼에서는 이 중요한 수탁자가 자신의 책임을 실질적으로 이행하기 위해, 거대한 기금 자산을 누구에게, 어떤 방식으로 운용하게 할지 그 구체적인 방식과 시스템에 대해 심층적으로 논의하겠다.
[김병철 한국퇴직연금개발원 대표 / wow@globalepi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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