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한투자증권 노동길 애널리스트는 최근 발간한 '국내 주식전략' 리포트에서 "이번 AI 투자 논쟁의 핵심은 수요 붕괴 여부가 아니라 투자 회수의 속도가 당초 기대보다 늦어질 수 있다는 점"이라며 "지연(delay)과 취소(cancel)를 동일하게 해석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실제로 브로드컴은 AI 매출이 빠르게 확대되고 있음에도 AI 사업의 마진이 과거 대비 낮아질 수 있다고 언급했다. 이는 수요 둔화 신호가 아니라 AI 사업이 기존 고마진 칩 매출 구조에서 시스템, 인프라 구축형 사업으로 이동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고객 맞춤형 설계, 고급 패키징, 네트워크 통합이 늘어나면서 단기적으로 마진 희석이 불가피해진 것이다.
오라클의 경우는 더 직접적이다. AI 데이터센터를 중심으로 한 대규모 자본지출 확대가 확인됐지만, 일부 프로젝트의 일정 지연 가능성이 거론되며 투자 대비 현금흐름 전환의 가시성이 흔들렸다. 시장은 '투자가 계속되느냐'보다 '언제부터 의미 있는 수익으로 연결되느냐'에 더 민감하게 반응했다.
국내 주식시장은 더 가혹한 조정을 겪고 있다. 코스피는 이 과정에서 미국 시장보다 더 가파른 하락을 기록했다. 외국인이 2거래일간 코스피를 2조원 가까이 순매도한 것이 대표적이다. 한국 주식시장은 AI 투자 사이클에서 중간재 공급자, 특히 반도체 역할을 갖고 있어 투자 지속 여부가 수출, 평균판매단가, 가동률, 실적에 곧바로 연결되는 구조다.
미국에서 AI 투자에 대한 불확실성이 커질수록 글로벌 자금은 성장 자산의 할인율을 재평가하고 안전자산 선호를 강화한다. 불확실성은 달러 강세로 이어지며 동시에 주식시장 변동성을 확대시킨다. 한국은 펀더멘털 변화와 무관하게 외국인 베타 축소 대상이 되는 것이다.
노 애널리스트는 한국 주식시장을 판단하는 핵심 변수로 세 가지를 제시했다.
첫째, 빅테크 자본지출의 절대 수준이다. 증가율 둔화 자체는 자연스러운 정상화 과정일 수 있지만, 중요한 것은 투자 총액이 유지되는지 여부다. 절대 수준이 유지된다면 발주와 물량 경로도 유지된다.
둘째, 메모리 믹스의 질적 변화다. HBM(고대역폭메모리) 비중 확대가 단순한 가격 효과가 아니라 실제 물량과 채택 확산으로 이어지는지를 확인해야 한다. DRAM 비트 성장률, 고객 수 확대, 세대 전환 속도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셋째, 환율과 변동성이다. 원화 헤지 비용과 변동성은 외국인 베타를 여는 스위치 역할을 한다.
과거 반도체 사이클에서도 실적과 주가 간 시차 패턴이 반복됐다. 2018년 상반기까지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실적은 사상 최고치를 경신했지만 주가는 이미 하락 국면에 진입해 있었다. 반대로 2020년 하반기 실적은 여전히 부진했지만 주가는 선행 반등했다. 실적은 투자 사이클의 후행 지표 성격을 갖는다는 의미다.
노 애널리스트는 "의미 있는 실적은 다음 분기 혹은 하반기 출하 가이던스가 유지되고, HBM 고부가 믹스 상향이 확인되며, 고객사 투자 일정에 지연 없음을 명시할 때"라며 "과거 한국 반도체 사이클에서도 반복적으로 확인됐듯이 delay 국면은 단기적인 가격 조정을 유발했지만 중기 실적 경로를 훼손하지는 않았다"고 설명했다.
구조적 하락은 투자 취소와 자본지출 축소가 확인된 이후에만 나타났다는 게 그의 분석이다. 현재까지의 정보는 일관되게 delay 시나리오를 지지하고 있어, 주가 조정 양상을 급격한 가격조정보다 기간조정 과정으로 해석할 수 있다는 것이다.
투자전략으로는 반도체 비중을 유지하되 1월 실적 발표에서 출하·믹스·자본지출 가이던스 확인 전까지 공격적 확대는 유보할 것을 제안했다. 반도체 장비는 타이밍 리스크에 가장 직접적으로 노출돼 있어 빠른 비중 확대 실익이 뚜렷하지 않다는 판단이다.
반면 전력, 변압기, 전선 등 AI의 후방 인프라는 병목 이동의 직접적 수혜 영역으로 상대적 방어력을 가질 수 있다고 봤다. 자본지출 절대 수준이 유지되고 DRAM 및 HBM 비트 성장률과 출하 가이던스가 지속된다면 베타 기회는 다시 열릴 수 있다는 것이다.
노 애널리스트는 "현재로서 자본지출 레벨 하향이나 메모리 물량 가이던스 후퇴의 확률은 높지 않다"며 "조건을 확인하며 베타 재확대를 준비할 구간"이라고 강조했다.
[글로벌에픽 신규섭 금융·연금 CP / wow@globalepi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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