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성일 이음연구소장, 경영학박사.
500년 전, 조선에도 이와 놀랍도록 닮은 제도가 존재하였다. 지금의 제도와 유사점이 있지 동일하다는 것은 아니다. 이런 제도들 중 하나로서 농업을 근간으로 삼았던 조선이 어떻게 가장 취약한 백성들을 보듬었는지 보여주는 지혜로운 제도, ‘휼전(恤田)’이 있다. 휼전은 단순한 시혜나 일시적인 구휼을 넘어, 국가가 책임지고 약자의 삶을 지속적으로 보살피려 했던 약속이자, 시대를 앞서간 연금제도의 원형이었다.
땅으로 전한 국가의 온기, 휼전
휼전(恤田)의 글자를 풀어보면 그 의미가 명확해진다. ‘긍휼히 여길 휼(恤)’과 ‘밭 전(田)’이 합쳐진 이름 그대로, ‘어려운 처지의 백성을 긍휼히 여겨 내어주는 땅’을 의미한다. 하지만 조선의 휼전은 단순히 토지를 소유하게 하는 것이 아니었다. 국가나 왕실이 소유한 특정 토지를 지정하여, 그곳에서 나오는 소출(곡식 등)이나 소작료를 수취할 수 있는 권리, 즉 ‘수조권(收租權)’을 부여하는 방식이었다.
휼전과 현대 연금제도의 놀라운 평행이론
휼전의 운영 방식을 깊이 들여다보면, 현대 연금제도와 소름 돋을 만큼 닮아있는 네 가지 핵심 원리를 발견할 수 있다.
첫째, ‘보호와 지원’이라는 동일한 목적성이다. 현대 연금제도의 근본 철학은 질병, 노령, 장애, 실업 등 사회적 위험에 처한 국민의 인간다운 삶을 보장하는 것이다. 휼전 역시 그 목적이 명확했다. 대상은 주로 공신이나 관료의 후손 중 생계가 막막해진 이들, 나이가 많아 관직에서 물러났으나 생활이 어려운 퇴직 관리, 남편을 잃은 아내와 부모를 잃은 아이들, 그리고 장애로 인해 자립이 불가능한 이들이었다. 국가 공동체의 가장 약한 고리를 보호하여 사회 전체의 안정을 꾀한다는 점에서, 휼전과 연금은 ‘사회적 연대’라는 동일한 가치를 공유한다.
둘째, ‘정기적인 소득 보장’이라는 운영 방식의 유사성이다. 연금의 가장 큰 특징은 매달 또는 매년 정해진 시기에 꾸준히 지급된다는 점이다. 이는 수급자가 미래를 예측하고 안정적인 생활 계획을 세울 수 있게 하는 핵심 기능이다. 휼전 역시 마찬가지였다. 휼전에서 나오는 농작물이나 소작료는 매년 추수철을 기점으로 정기적으로 지급되었다. 흉년과 같은 변수는 있었지만, 국가가 그 권리를 보장하는 한, 수혜자는 매년 일정한 소득을 기대할 수 있었다. 이는 굶주림이 일상이던 시대에 최소한의 생존을 넘어, 삶의 존엄성을 지켜주는 강력한 안전장치였다.
셋째, ‘공적 자원의 활용’이라는 재원의 공공성이다. 국민연금이 우리가 낸 보험료와 기금 운용 수익으로 운영되듯, 모든 연금은 공적인 재원을 기반으로 한다. 휼전의 재원 역시 국가의 토지, 즉 공전(公田)이나 왕실 소유의 토지였다. 사적인 자선이 아니라, 국가가 가진 공적 자산을 활용하여 공동체의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는 점에서 휼전은 명백한 ‘공공부조’이자 사회정책의 일환이었다. 이는 통치자의 자비심에 기댄 우연한 선행이 아닌, 통치 시스템 안에 제도적으로 뿌리내린 복지 철학의 증거이다.
물론 휼전이 현대의 연금제도와 완전히 같다고 말할 수는 없다. 재원 조성이 국민의 기여(보험료)가 아닌 국가의 토지 소출에 기반했고, 수혜 대상이 전 국민이 아닌 특정 계층에 한정되었으며, 운영 방식이 농업 경제의 틀 안에 있었다는 명백한 시대적 한계가 존재한다.
하지만 우리는 휼전이라는 제도를 통해 500년 전 조선 사회가 가졌던 복지에 대한 깊은 통찰을 읽어야 한다. 국가는 백성을 지켜야 할 책임이 있으며, 특히 스스로를 돌볼 수 없는 약자는 공동체가 함께 보듬어야 한다는 철학이 ‘휼전’이라는 제도로 구현된 것이다. 이는 ‘복지’가 단순히 물질적 풍요의 문제가 아니라, 공동체를 유지하는 핵심적인 가치이자 통치의 근간이라는 점을 보여준다.
오늘날 우리는 고령화, 소득 불평등, 새로운 형태의 사회적 위험 앞에서 더욱 정교하고 촘촘한 사회안전망을 요구하고 있다. 이러한 시대적 과제 앞에서 500년 전 조선의 ‘휼전’은 우리에게 깊은 울림을 준다. 조선은 이미 알고 있었다. 가장 약한 사람이 무너질 때 사회 전체가 흔들린다는 것을. 그리고 그들을 일으켜 세우는 것이 곧 국가의 힘이라는 것을 말이다.
휼전은 박제된 역사가 아니라, 오늘날 우리가 더 나은 사회를 만들기 위해 끊임없이 되새겨야 할 살아있는 지혜의 유산이다.
[글로벌에픽 신규섭 금융·연금 CP / wow@globalepic.co.kr]
<저작권자 ©GLOBALEPIC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