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2월 19일 이재명 대통령은 금융위원회 업무보고에서 금융지주사의 장기 집권 및 폐쇄적 지배구조를 "부패한 이너서클(Inner Circle)"이라며 강도 높게 비판한 바 있다. 이후 촉발된 이번 지배구조 개편 작업은 단순 권고를 넘어 법 개정까지 염두에 둔 만큼, 금융권 전반에 지각변동을 일으킬 것으로 관측된다.
회장 연임 1회 제한·특별결의 도입...'참호 구축' 막는다
금융위원회와 금융감독원은 '지배구조 선진화 태스크포스(TF)'를 통해 오는 3월 말까지 금융회사 지배구조 개선방안을 확정·발표할 계획이다. 개선방안은 금융지주 회장 중심으로 굳어진 권한 구조를 완화하고, 이사회와 주주 견제 기능을 강화하는 데 초점을 맞추는 것으로 전해졌다.
연임 시에는 주주총회의 '특별결의'를 통해 의결 요건을 강화하는 방안도 논의 중이다. 현재는 출석 주주의 의결권 과반수 찬성, 주식 총수의 4분의1 이상 출석 요건만 맞추면 되는 '일반결의' 안건에 해당한다. 하지만 '특별결의' 안건이 되면 출석 주주의 3분의2 이상 찬성, 주식 총수의 3분의1 이상 출석 등 더욱 엄격한 주주 동의가 필요해진다.
또한 금융당국은 사외이사의 독립성을 높이기 위해 3년 단임제를 도입하는 방안도 검토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사외이사가 연임을 전제로 현직 CEO와 장기간 관계를 형성하는 구조 자체를 끊겠다는 의도다. 현재 금융지주 사외이사 임기는 통상 2년 임기 후 1년 단위로 연임하는 '2+1년' 구조로, 최장 6년까지 재직이 가능하다.
이찬진 금융감독원장은 금융지주 이사회 구성을 두고 "CEO와 이사들의 임기가 함께 가는 구조"라며 "골동품만 남는다"고 공개 비판한 바 있다.
8대 금융지주 특별점검 완료...셀프 연임·사외이사 평가 부실 적발
금융감독원(이하 금감원)은 지난달 19일부터 8대 금융지주(KB·신한·하나·우리·농협·iM·BNK·JB금융)에 대한 특별점검을 진행했다. 지배구조 관련 실제 운영 현황 전반에 대한 점검을 실시했으며, 특히 '사외이사 혜택'에 대한 집중 점검이 이뤄진 것으로 전해졌다.
하나금융지주가 회장 후보 1차 명단(롱리스트) 확정 직전 이사의 재임 가능 연령(만 70세)을 명시한 지배구조내부규범을 변경해 함영주 현 회장에게 유리하도록 개정한 부분, BNK금융지주의 내·외부 후보군 대상 후보 서류 접수 기간이 추석 연휴 등으로 인해 실제로는 5영업일에 불과했던 점 등이 문제로 지적됐다. JB금융은 회장 연령 제한 규정을 '재임 중 70세 도래 시 직 유지 가능'으로 변경해 3연임의 길을 열어준 점이 논란이 됐다.
신한금융은 이사회 역량 매트릭스(BSM) 상에서 소비자 보호·리스크 관리·내부통제·재무회계·정보기술(IT) 전문가들을 이사회에 고루 편성해야 하지만, 소비자 보호와 리스크 관리를 하나의 전문성 항목으로 묶어 관리했다. 이는 각 분야의 전문성을 고루 확보해야 한다는 지침을 자의적으로 해석하여 이사회 구성의 다양성을 해친 사례로 지적됐다.
KB금융 사외이사 5명 3월 임기 만료...회추위 구도변화 올수도
금융권의 최대 관심은 KB금융지주에 쏠리고 있다. 주주 통제권 강화를 포함한 선진화 방안은 금융지주회사법 개정이 필요해 오는 11월 양종희 회장의 임기가 만료되는 KB금융이 첫 적용 사례가 될 것이라는 관측 때문이다.
또한 KB금융은 사외이사 7명 중 5명이 3월 말 임기 만료를 앞두고 있다. 이사회 구성 변화가 곧 회장후보추천위원 판단 구도의 변화로 직결될 수 있다는 점에서 차기 회장 선임 절차의 불확실성이 다른 금융지주보다 크다는 평가가 나온다.
KB금융은 지난해 당기순이익(지배기업 지분 순이익 기준)이 5조8천430억원으로 2024년보다 15.1% 늘어난 것으로 잠정 집계됐다고 지난 5일 밝혔다. 이는 역대 최대 연간 순이익으로, KB금융은 2년 연속 국내 금융지주 순이익 1위 자리를 지켰다.
양종희 회장은 지난 2023년 11월 취임해 올해로 임기 3년차 마지막 해를 맞고 있다. 연임 1회 제한이 적용돼도 초임인 양 회장이 연임될 가능성은 높지만, 선임 절차 전반에 대한 부담은 피하기 어렵다는 분석이 우세하다.
국민연금의 역할 주목...일반투자 목적 유지는 KB금융뿐
최대주주인 국민연금의 최근 행보도 주목된다. 국민연금은 KB금융 지분 8.56%를 쥐고 있는 최대주주다. 지난달 16일 국민연금은 지난해 말 기준으로 KB금융 지분율이 8.56%에서 8.68%로 변경됐다고 공시했다.
국민연금은 2020년 2월 KB금융 주식보유 명목을 '단순투자'에서 '일반투자'로 바꿨다. 일반투자는 경영권에 영향을 줄 목적은 없지만 배당 확대 등 적극적인 주주 활동을 할 수 있다는 의미다. 반면, 주식시장에 상장한 신한·하나·우리 등 금융지주 세 곳은 국민연금이 올초 일반투자에서 단순투자로 지분 보유 목적을 변경했다.
현행 자본시장법상 일반투자는 사외이사 추천이나 주주제안 등 보다 적극적인 주주 활동이 가능한 범주다. 지배구조TF 이후 국민연금의 사외이사 추천이 현실화될 경우 KB금융은 양종희 현 회장의 연임 여부를 결정하는 차기 회장 선임 절차부터 직접적인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 구조다.
이찬진 금융감독원장은 지난 10일 금융지주 회장 간담회에서 "전 국민을 대표하는 기관의 주주 추천 등 사외이사 추천 경로 다양화와 사외이사 임기 차등화 등을 통해 독립성을 갖춘 후보 추천위원회 구성과 공정한 운영이 뒷받침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소급적용 없어...제도 개편은 미래 선임부터 적용
다만 금융당국은 이번 금융지주 지배구조 개편안을 소급 적용하지 않을 것이라는 입장을 밝혔다.
이억원 금융위원장은 지난달 28일 기자간담회에서 "지배구조 선진화 TF는 제도개선을 염두에 두고 하는 것"이라며 "구체적으로 특정 사안을 겨냥하는 건 전혀 아니"라고 말했다. 또 "계속해서 제도적으로 필요한 부분은 바꾸고, 이게 기반이 돼 시장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말했다.
금융당국은 연임 제한이나 특별결의 요건 등 새로운 규정은 법 시행 이후 최초로 임기가 도래하는 회장부터 적용할 방침이다. 이미 연임을 확정한 신한금융, 우리금융, BNK금융 회장에게는 소급 적용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과도한 규제" vs "개선 필요성"...엇갈린 시각
금융권에서는 당국의 지배구조 개편이 과도한 규제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된다. 금융권 관계자는 "교수 출신 일색의 사외이사 구성을 문제 삼지만 관련 규정이 워낙 엄격해 지금도 유능한 인사를 모시기가 쉽지 않다"며 "단임제 도입으로 임기가 짧아지면 사외이사 후보군은 더 줄어들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4대 금융지주(KB·신한·하나·우리)의 사외이사 32명 중 23명(71.9%)의 임기가 오는 3월 말 만료된다. 하나금융이 8명으로 가장 많고, 신한금융 7명, KB금융 5명, 우리금융 3명 등이 뒤를 이었다.
반면 전문가들은 지배구조 개선의 필요성에 공감하고 있다. 김우진 한국금융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정부가 기업의 주주가치 제고 노력을 지원하기 위한 밸류업 프로그램, 상법 개정 등을 추진함에 따라 지배구조 개선에 대한 필요성도 커지고 있다"며 "국내 금융그룹의 사외이사 제도는 미국 등 금융 선진국과 비교해 제도와 운영 측면에서 괴리가 큰 것이 사실"이라고 말했다.
권대영 금융위원회 부위원장은 지난달 16일 열린 지배구조 선진화 TF 첫 회의에서 "은행지주회사는 엄격한 소유규제로 소유가 분산됨에 따라 주인 없는 회사의 특성을 갖고 있다"며 "이로 인해 지주회장의 선임 및 연임과정에서 폐쇄성과 참호구축 문제에 대한 비판이 지속 제기돼 왔다"고 지적했다.
금융당국은 3월 말까지 지배구조 개선안을 마련한 뒤, 이를 반영한 '금융회사의 지배구조에 관한 법률' 개정안도 마련할 방침이다. 금융지주회사법 개정이 필요할 경우, 이르면 올해 하반기부터 적용될 가능성도 거론되고 있어 KB금융의 회장 선임 절차가 새로운 제도의 시험대가 될 전망이다.
[글로벌에픽 성기환 CP / keehwan.sung@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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