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모레퍼시픽이 연구 특화 생성형 AI 플랫폼 LEMON을 활용해 연구 시간을 12일에서 5분으로 단축했고, LG생활건강은 원료 개발 기간을 1년10개월에서 1일로 줄였다. 코스맥스는 색상 구현의 주관성을 수치화했고, 한국콜마는 피부 마이크로바이옴 기반 초개인화 진단을 소비자 손에 넘겨줬다. AI가 제품 기획과 연구, 생산, 소비자 경험까지 근본적으로 재편하는 산업 혁신을 불어오고 있는 것이다.

아모레퍼시픽 R&I센터 미지움 (사진=아모레퍼시픽 제공)
데이터의 힘을 깨닫다, 아모레퍼시픽 ‘LEMON’
아모레퍼시픽은 KT와 추진한 '데이터 하이웨이' 프로젝트를 통해 원료 정보와 처방 데이터, 연구 보고서, 특허, 논문 등을 축적해온 데이터를 AI가 활용할 수 있는 형태로 통합하고, 연구 특화 생성형 AI 서비스 'AI Assistant LEMON(Lab Efficiency Mode ON)'을 개발했다.
효과는 즉각적이었다. 연구원들을 대상으로 진행한 베타 테스트에서는 제품 기획 단계의 연구자료 및 규제 검토 시간이 기존 약 12일에서 약 5분으로 줄었고, 특정 원료의 연구 이력과 제품 적용 가능성 검토 역시 약 6일에서 5분 수준으로 단축됐다. 단순한 시간 단축을 넘어 연구의 속도와 정확성이 동시에 향상된 것이다.
아모레퍼시픽은 카메라 기반 AI 기술과 전문가 검증을 결합해 뷰티 컨시어지 플랫폼을 운영하고 있으며, 출시 이후 10개국에서 50만 건 이상 피부진단을 수행했고, 현재 10개 서비스를 운영 중이다. 더 나아가 생성형 AI를 활용한 대화형 쇼핑 서비스로 영역을 확대했다. 2025년 5월에는 온라인 아모레몰에 고객 상담 AI 챗봇 '아모레챗(AMORE CHAT)'을 도입해 고객의 뷰티 고민을 상담하고 맞춤형 제품을 추천하는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또한 OpenAI의 ChatGPT 플랫폼과 연계해 글로벌 소비자와의 대화형 상호작용을 강화하며 새로운 쇼핑 경험을 확대하고 있다.
AI가 신 물질 발견 … LG생활건강 ‘엑사원 디스커버리’
LG생활건강은 다른 접근을 시도했다. AI를 단순히 검색과 분석에 활용하는 데 그치지 않고, 신 물질 발굴 자체를 AI에 맡겼다.
LG생활건강은 LG AI연구원과 공동 연구에서 AI 모델을 활용해 물질의 용해도와 안전성을 개선한 화장품 효능 소재를 개발했고, 화장품 효능 소재 개발 과정에서 분자 단계부터 전체 연구 공정을 AI가 설계했다는 데 의미가 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안전성 확보다. 엑사원 디스커버리는 AI 시뮬레이션 단계에서 유해 성분이 발생할 가능성을 사전에 차단해 후보 물질에서 원천 배제시켰고, 이에 따라 사업화 가능한 물질만 선별할 수 있어 효율적으로 안전성 평가를 진행할 수 있게 됐다.
LG생활건강은 상용화 과정과 추가 연구를 거쳐 이르면 내년부터 궁중 피부과학 럭셔리 브랜드 '더후'에서 AI 기반 고효능 성분을 담은 화장품을 선보인다.

코스맥스 R&I센터 연구원들이 조색 작업을 진행 중인 모습. (사진=코스맥스)
색 맞추는 시간 단축 … 코스맥스 ‘스마트 조색 시스템’
제조 공정의 핵심인 조색 작업에서도 AI가 혁신을 일으키고 있다. 코스맥스는 약 3년간의 연구 끝에 AI 기반 '스마트 조색 AI 시스템'을 개발했으며, 이 시스템은 딥러닝 기술을 적용해 인간의 눈으로 지각할 수 있는 모든 색상값을 데이터로 변환했다.
전통적인 조색 작업은 연구원의 주관적 판단과 경험에 크게 의존하는 영역이었다. 색상을 맞추기 위해 색소 종류와 함량을 반복해서 바꾸면서 손으로 직접 샘플을 만들어야 했고, 숙련도에 따라 효율이 크게 달라졌다. 스마트 조색 AI 시스템은 색상의 차이를 수치화해 보여주기 때문에 연구원이 직접 실험을 거치지 않아도 새로 설계하는 처방의 색상을 예측할 수 있다.
코스맥스는 스마트 조색 시스템 외에도 여러 AI 기술을 R&D 전반에 적용하고 있다. 기초 화장품 분야에서는 제품의 발림성과 점도·탄성 등 유변물성을 기계학습으로 분석하는 '텍스처 표준 측정 기술'을 자체 개발했고, 이를 활용해 개인의 피부 유형에 맞는 처방 설계에 활용할 수 있다.
더 나아가 2025년 12월에는 분자 구조만으로 향기를 예측할 수 있는 'AI 향기 예측 알고리즘 모델'을 개발했으며, 이는 후각적 관능평가로만 확인이 가능했던 기존 방식의 한계를 넘어 제품개발 초기단계부터 특이취를 예측할 수 있다. 코스맥스는 이 연구 성과를 국제 과학 학술지 '네이처'의 자매지인 '커뮤니케이션즈 케미스트리'에 게재했으며, 국내 기업이 향료 분야 연구를 네이처 자매지에 발표한 것은 이것이 첫 사례다.
소비자 진단 영역까지 … 한국콜마 ‘카이옴’
AI의 영향이 소비자와 만나는 접점까지 확대되고 있다. 한국콜마는 개인 맞춤 진단 플랫폼 '카이옴(CAIOME)'을 선보였으며, 이는 인공지능(AI) 기반 피부 마이크로바이옴 진단 및 맞춤형 스킨케어 솔루션을 제공하는 플랫폼이다.
카이옴은 신속 진단 방식으로 피부 내 상재균을 확인하고, 펜 모양의 광학 디바이스로 상재균을 분석한다. 더 인상적인 것은 분석 후의 과정이다. 연결된 앱을 통해 얼굴을 촬영하고 피부 상태를 확인하면, AI 알고리즘이 종합적으로 분석해 추후 맞춤형 화장품 개발 및 피부관리 솔루션을 제공할 수 있다.
카이옴은 피부를 가볍게 문지른 면봉을 시약에 적신 후 키트 위에 몇 방울 떨어뜨리는 간편한 사용법으로도 5분 내 피부 마이크로바이옴 생태계를 분석할 수 있고, 최대 수십만 가지의 개인 맞춤형 피부 솔루션도 제공한다.
기술 경쟁이 곧 시장 경쟁력이 되었다
K뷰티 기업들이 AI를 도입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반복적인 검색·분석·판단 업무를 AI에 넘김으로써 연구원들은 가설 수립과 기술 개발에 집중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아모레퍼시픽 R&I센터 CTO는 "좋은 AI는 좋은 데이터를 만났을 때 연구의 동반자가 될 수 있다"며 "앞으로 AI 플랫폼은 반복적인 탐색과 분석을 담당하고 연구자는 창의적인 질문과 기술 개발에 집중할 수 있도록 할 것"이라고 말했다.
소비자 추천용 도구에서 시작한 K뷰티의 AI는 이제 데이터 표준화에서 진단, 소재 개발, 생산 최적화까지 산업의 모든 층을 재편하고 있다. 맞춤형 화장품의 시대에 기술 경쟁력이 시장 경쟁력과 직결되는 현실이 도래한 것이다.
글로벌 맞춤형 화장품 시장은 단순한 트렌드를 넘어 이미 구조적으로 성숙 단계에 진입했다. 글로벌 화장품 시장은 2025년 약 3,778억 달러 규모로 추정되며, 2035년까지 연평균 6.2% 성장이 예상되는데, 이 성장의 핵심 동력은 AI 기반 초개인화 솔루션이다.
Fortune Business Insights 전망에 따르면 한국 화장품 시장도 2026년 93억 8천만 달러에서 2034년 170억 1천만 달러 규모로 확대될 것으로 예상된다. 이러한 성장 속에서 기술 격차는 곧 시장 선점의 우위로 작용한다.
다만 몇 가지 과제가 남아있다. AI가 제안한 신소재의 장기 안정성 검증, 대규모 데이터 축적 과정에서의 편향 문제, 그리고 규제 당국의 AI 기반 신원료 심사 기준 마련이 주요 과제로 남아 있다. 특히 GDPR 등 해외 개인정보 보호 규제와 데이터 보안 문제는 K뷰티 기업들의 글로벌 진출 시 높은 장벽으로 작용할 수 있다.
그럼에도 아모레퍼시픽의 데이터 통합이 5분의 기적을 만들었고, LG생활건강의 엑사원 디스커버리가 1년 10개월을 1일로 줄였으며, 코스맥스의 스마트 조색이 주관적 판단을 객관화했고, 한국콜마의 카이옴이 소비자의 손 안에 진단실을 옮겨놨다. 이들이 보여주는 길이 K뷰티의 미래이며, 동시에 글로벌 뷰티 산업 전체의 패러다임 전환을 선도하는 모습이다.
[글로벌에픽 안재후 CP / anjaehoo@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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