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6.08.04(화)

[김병철 칼럼⑰] 가입자가 골랐으니 수익률에 대한 책임도 가입자 몫인가

성기환 CP

2026-08-03 08:18:13

김병철 한국퇴직연금개발원 대표

김병철 한국퇴직연금개발원 대표

[글로벌에픽 성기환 CP] 지난 ⑯편에서는 거버넌스의 품질이 퇴직연금 성과를 결정한다고 했다. 이번에는 계약형 퇴직연금의 보이지 않는 거버넌스를 살펴본다. 가입자가 상품을 직접 골랐다는 이유로 퇴직연금사업자의 책임까지 사라질 수 있는가. 그 답을 ‘선택설계’에서 찾는다. [편집자주]

대형마트 신선식품 코너에 가면 손이 가장 잘 닿는 눈높이 진열대, 이른바 ‘골든존’이 있다. 마트가 소비자에게 가장 먼저 보여주고 싶은 상품들이 그 자리를 차지한다.

소비자는 그 진열대에서 우유 하나를 집어 카트에 담는다. 분명 소비자가 직접 고른 상품이다. 하지만 어떤 우유를 눈높이에 올리고 어떤 우유를 맨 아래에 둘지는 소비자가 결정하지 않았다.

최근 나는 퇴직연금사업자의 거버넌스 품질을 평가하는 용역을 진행하고 있다. 사업자들의 의견을 듣는 과정에서 가장 민감한 쟁점 역시 이것이었다. 계약형에서 가입자가 직접 상품을 골랐는데, 왜 사업자의 거버넌스와 책임을 평가해야 하느냐는 것이다.
그 논리를 한 문장으로 줄이면 이렇다.

“가입자가 직접 골랐으니 결과와 책임도 가입자의 몫이다.”

이것은 오랫동안 퇴직연금사업자들이 익숙하게 취해온 입장이었다. 수익률이 기대에 미치지 못하면 가입자가 원리금보장 상품만 찾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최종 선택도 가입자가 했으니 사업자에게는 책임이 없다고 여겨왔다.

과연 그럴까? 가입자는 금융기관이 차려놓은 진열대 밖의 상품을 고를 수 없다. 어떤 상품을 라인업에 올릴지, 무엇을 눈에 띄는 최상단에 배치할지, 선택을 미룰 때 어느 길(디폴트옵션)로 보낼지는 금융기관이 먼저 정한다.

이 글에서 말하려는 것은 단순하다. 계약형 퇴직연금사업자 역시 분명한 수탁자다. 가입자가 마지막 버튼을 누르기 전에, 사업자는 연금 수익률을 좌우할 진열대의 높이와 위치를 이미 결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기본값 하나가 가입률을 바꿨다
2001년 미국의 경제학자 브리기테 매드리언과 데니스 셰이는 한 기업의 401(k) 퇴직연금 제도 변화를 연구했다.

예전에는 근로자가 직접 신청서를 내야 퇴직연금에 가입할 수 있었다. 회사는 방식을 바꿨다. 입사하면 자동으로 가입되고, 원하지 않는 근로자만 빠져나가도록(Opt-out) 했다.

선택의 자유는 그대로였다. 가입 행동을 바꾼 핵심적인 변화는 처음 서 있는 자리, 즉 기본값(Default)이었다. 그런데 가입률은 80%대로 치솟았다. 금융교육을 더 한 것도, 높은 수익률을 약속한 것도 아니었다. 사람들이 처음에 서 있는 기본값을 바꿨을 뿐이다.

사람은 언제나 모든 선택지를 꼼꼼히 비교해 최선의 답을 고르지 않는다. 복잡하고 먼 미래의 일일수록 결정을 미루고, 이미 놓여 있는 길을 따라가기 쉽다. 기본값을 정하는 일은 단순한 행정이 아니다. 수많은 직장인의 노후 자산에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투자 의사결정이다.

다만 이것은 자동가입을 전제로 한 미국의 디폴트옵션 사례다. 한국과 제도가 다르다고 반박할 수 있다. 그렇다면 기본값을 넘어, 가입자가 실제로 상품을 고르는 진열대의 구성을 한 단계 더 살펴보자.

진열대의 구성이 포트폴리오를 바꿨다

행동경제학자 슐로모 베나치와 리처드 세일러는 퇴직연금의 상품 메뉴가 가입자의 자산배분에 미치는 영향을 연구했다.

연구 결과 일부 가입자는 주식형·채권형 상품의 위험과 기대수익을 정교하게 계산하기보다, 제시된 상품의 수에 맞춰 투자금을 비슷하게 나누는 경향을 보였다.

이른바 ‘1/n’ 방식이다. 상품이 네 개라면 돈을 네 갈래로 나누는 식이다. 또한 메뉴에서 주식형 상품의 비중이 높을수록 가입자의 주식 투자 비중도 높아지는 경향이 나타났다.

앞서 언급한 마트 진열대와 똑같다. 가입자가 직접 상품을 골랐다는 사실만 봐서는 안 된다. 진열대에 어떤 상품들이 올라와 있었는지, 무엇이 가장 눈에 띄는 위치에 배치되었는지를 함께 따져야 한다.

미국 401(k)의 상품 메뉴를 책임지는 주체와 한국 퇴직연금사업자의 법적 지위가 완전히 같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가입자가 최종 선택을 하기 전에 누군가가 선택의 범위와 순서를 정하고, 그 설계가 실제 선택에 영향을 준다는 사실은 같다.

세일러와 캐스 선스타인은 이처럼 사람의 선택이 이뤄지는 환경을 만드는 일을 ‘선택설계(Choice Architecture)’라고 불렀다. 퇴직연금에서 선택설계자인 퇴직연금사업자는 단순히 상품을 진열하는 판매자가 아니다. 가입자의 장기 연금 성과를 좌우하는 보이지 않는 거버넌스의 주체다.

퇴직연금사업자는 수탁자다

계약형의 퇴직연금사업자와 기금형의 수탁법인은 법률상 명칭이 같지 않다. 그러나 형식과 이름이 다르다고 본질적인 책임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현행 근로자퇴직급여보장법 제33조 제1항은 퇴직연금사업자가 법을 준수하고 “가입자를 위하여 성실하게” 업무를 수행해야 한다고 명시한다. 법 조문만 보더라도 사업자의 업무가 누구의 이익을 향해야 하는지는 명확하다.

실제로 하는 일은 더 명확하다. 사업자는 가입자가 보게 될 상품의 범위와 정보, 화면과 설명을 설계한다. 사전지정운용상품(디폴트옵션)을 설계해 사용자에게 제시하고, 일반 퇴직연금 상품 중 무엇을 눈에 띄는 곳에 둘지 정한다. 비용과 성과를 어떤 방식으로 보여줄지도 결정한다.

가입자의 돈을 대신 골라 운용해주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수탁자 책임을 면할 수는 없다. 사업자는 가입자가 선택할 환경과 길을 대신 설계한 주체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퇴직연금사업자는 분명한 수탁자이며, 자신이 만든 선택설계의 결과에 책임 있는 태도를 보여야 한다. 이는 무조건 높은 수익률을 보장하라는 뜻이 아니다.

왜 그 상품을 진열대에 올렸는지, 비용과 위험을 충분히 비교했는지, 사업자 자신의 이익과 가입자 이익 간의 충돌을 잘 통제했는지, 성과가 부진한 상품을 어떻게 점검하고 라인업에서 빼냈는지를 설명하고 개선하라는 뜻이다.

낮은 수익률은 누구의 책임인가?

지금까지 퇴직연금사업자들은 그 동안의 낮은 수익률을 주로 제도와 가입자 탓으로 해석하곤 했다. 계약형이라 어쩔 수 없고, 가입자가 원리금보장형만 찾으며, 최종 선택도 가입자가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기본값 하나가 가입률을 바꾸고, 진열대의 구성이 가입자의 자산배분을 바꾼다. 그렇다면 수익률의 책임에서 사업자 역시 자유로울 수 없다. 진열대를 만들고 선택의 길을 설계한 퇴직연금사업자의 수탁자 역할이 무엇보다 중요하기 때문이다.

기금형과 경쟁할 준비가 돼 있는가?

독립된 이사회가 운용 목표와 책임을 정하고 전문가가 실행하는 기금형 퇴직연금이 도입되면, 계약형과 기금형의 거버넌스 품질과 성과는 시장에서 선명하게 비교될 것이다. 그때에도 계약형 사업자가 “가입자가 직접 골랐으니 우리 책임은 없다”라는 논리만 고수하기는 어렵다.

선택권을 제공한다는 것이 수탁자 책임의 면제가 될 수 없다. 선택에는 선택한 가입자의 책임이 있지만, 선택지를 만든 선택설계자에게는 더 무거운 수탁자 책임이 따른다.

퇴직연금사업자들이 이 수탁자 책임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시장의 신뢰와 경쟁력을 잃게 될 것이다. 반대로 자신이 수탁자임을 인정하고 진열대 하나, 기본값 하나까지 책임 있게 설계한다면 계약형도 기금형과 성과와 신뢰로 경쟁할 수 있다.

다음 질문은 ‘누가 결정하는가’다

사업자가 수탁자라면 그 책임을 실제로 수행할 주체와 절차가 필요하다. 다음 편에서는 상품 진열대와 기본값을 누가 승인해야 하는지, 가입자의 목소리를 이 결정 구조에 어떻게 반영해야 하는지 살펴본다.

[글로벌에픽 성기환 CP / keehwan.sung@daum.net]
<저작권자 ©GLOBALEPIC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주식시황

항목 현재가 전일대비
코스피 6,257.45 ▼338.00
코스닥 737.35 ▲17.59
코스피200 986.72 ▼60.09

가상화폐 시세

암호화폐 현재가 기준대비
비트코인 90,464,000 ▲97,000
비트코인캐시 303,200 ▼1,400
이더리움 2,643,000 ▼1,000
이더리움클래식 9,380 ▼10
리플 1,530 ▼1
퀀텀 923 ▲1
암호화폐 현재가 기준대비
비트코인 90,430,000 ▲33,000
이더리움 2,644,000 ▼2,000
이더리움클래식 9,380 0
메탈 290 0
리스크 107 ▲1
리플 1,530 ▼1
에이다 276 0
스팀 53 ▼1
암호화폐 현재가 기준대비
비트코인 90,460,000 ▲110,000
비트코인캐시 303,500 ▼700
이더리움 2,644,000 0
이더리움클래식 9,375 ▼65
리플 1,528 ▼4
퀀텀 933 0
이오타 48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