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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철 칼럼⑱] ‘원리금보장’이라 믿었는데…수백억 퇴직연금이 한 증권사 위험에 몰렸다

성기환 CP

2026-08-10 08:21:11

김병철 한국퇴직연금개발원 대표

김병철 한국퇴직연금개발원 대표

[글로벌에픽 성기환 CP] 지난 ⑰편에서는 퇴직연금사업자가 가입자의 선택지를 설계한다는 사실을 살펴봤다. 그렇다면 DB형 퇴직연금에서 사업자가 ‘원리금보장형’으로 제안한 상품의 위험은 누가 확인해야 할까? 수백억원의 적립금이 한 발행사의 신용위험에 몰려 있었던 실제 사례를 통해 ‘누가 결정하고 책임지는가’를 살펴본다. [편집자주]

“이제 실적배당형 상품에도 조금 투자해보면 어떨까요?”

회의가 끝나갈 무렵 퇴직연금 담당자인 김 부장(가명)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나는 하지 말라고 답했다.

퇴직연금의 수익률을 높여야 한다고 강조해온 내가 왜 실적배당형 투자를 말렸을까? 실적배당형 투자가 나빠서가 아니었다. 위험자산을 선택하고 관리할 준비가 그 회사에는 아직 돼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날 내가 본 것은 ‘원리금보장’이라 불리며 안전하다고 믿었던 수백억원의 적립금이 특정 증권사 한 곳의 신용위험에 몰려 있는 모습이었다.

최근 나는 직원 수백 명 규모인 한 회사의 적립금운용위원회에 외부위원으로 참석했다. 확정급여형(DB) 퇴직연금을 운영하는 회사였고, 적립금은 수백억원에 달했다.

법은 상시 근로자 300인 이상 사업장의 DB형 퇴직연금에 적립금운용위원회를 두고 매년 한 차례 이상 회의를 열도록 정하고 있다. 다만 적립금이 법정 최소적립금에 미달한 경우가 아니라면 외부 자산운용 전문가를 반드시 포함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이 회사도 위원회는 매년 열었지만 외부 전문가가 참여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회사 담당자들은 전문적인 조언을 반겼다. 질문도 많았고 새로운 의견도 기꺼이 받아들였다. 수백억원의 적립금 규모를 생각하면 외부위원 수당도 큰 부담이 아니었다. 전문가를 일부러 멀리했다기보다, 참여시킬 동기와 계기가 없었던 것이다.

통장은 여러 개지만 돈을 갚을 사람은 한 명이었다

회의 자료를 펼치자 아찔한 사실이 눈에 들어왔다. 전체 적립금의 80% 가까이가 한 증권사가 발행한 주가연계파생결합사채(ELB)에 쏠려 있었다.
회사는 여러 퇴직연금사업자와 나누어 계약하고 있었다. 은행과 증권사, 보험사에 돈을 분산해 맡겼으니 위험도 나누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서로 다른 사업자들이 결과적으로 같은 증권사가 발행한 ELB를 제안했다.

통장은 여러 개였지만 돈을 갚아야 할 주체는 한 증권사였다. 겉으로는 여러 금융기관에 나누어 맡겼지만 실제 신용위험은 한곳에 집중되어 있었다.

지난 ⑰편에서 살펴본 선택설계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최종적으로 상품을 선택한 주체는 회사였지만, 선택지를 제시한 것은 퇴직연금사업자들이었다. 그리고 그 선택들이 합쳐지면서 적립금 대부분이 한 발행사에 몰렸다.

원리금보장은 무위험이라는 뜻이 아니다

ELB는 증권사가 자신의 신용으로 발행하는 채권 형태의 상품이다. 쉽게 말해 투자자가 증권사에 돈을 빌려주고, 증권사는 만기에 원금과 미리 정한 조건에 따른 수익을 지급하겠다고 약속하는 구조다.

여기서 ‘원리금보장’은 국가나 퇴직연금사업자가 대신 갚아준다는 뜻이 아니다. ELB를 발행한 증권사가 정상적으로 존속하고 약속을 지킨다는 전제 아래 원금을 지급한다는 의미다.

은행 예금처럼 예금자보호법의 보호를 받는 것도 아니다. 발행한 증권사가 부도나거나 파산하면 원금 손실이 발생할 수 있다. 특정 발행사에 적립금을 지나치게 몰아주지 않는 것이 위험관리의 기본인 이유다.

적립금운용위원회는 두 가지 질문을 던졌어야 했다.

“얼마나 위험한가?” “그 위험을 감수할 만큼 충분한 금리를 받고 있는가?”

당시 비슷한 만기와 신용등급의 일반 채권 수익률과 비교하면, 그 ELB가 특정 증권사의 신용위험을 집중적으로 부담할 만큼 충분한 위험 대가를 주고 있다고 보기도 어려웠다.

장기 노후자금을 왜 매년 1년짜리로 갈아타는가

만기 구조도 문제였다. 적립금 대부분이 1년 만기 상품에 들어 있었고 만기도 연말에 집중돼 있었다. 해마다 같은 시기에 만기가 돌아오면 회사는 그때의 시장 금리로 다시 가입해야 한다.

하지만 퇴직연금은 내년에 모두 지급할 돈이 아니다. 곧 퇴직할 근로자의 급여는 짧게 운용할 수 있지만, 먼 미래에 지급할 돈까지 매년 1년짜리 상품으로 갈아탈 이유는 없다. 퇴직 시점과 예상 지급 규모에 맞춰 만기를 나누어야 한다.

단기 상품이라고 항상 안전한 것도 아니다. 1년마다 재가입하면 금리가 하락할 때마다 더 낮은 금리를 받아들여야 한다. 이것이 재투자위험이다.

0.1%포인트 높은 상품을 찾는 것보다 먼저 해야 할 일은 따로 있었다. 미래의 퇴직급여 지급 일정을 예측하고, 만기를 분산하며, 발행사별 투자 한도를 정하는 운용 원칙을 세우는 일이었다. 이를 문서로 정리한 것이 투자정책서, 즉 IPS다.

실적배당형 투자를 못 하는 진짜 이유

그날 나는 DB형 퇴직연금에서 실적배당형 상품의 비중이 낮은 이유를 다시 보게 됐다. 기업이 보수적이거나 담당자가 손실을 두려워하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더 근본적인 원인은 위험자산을 결정하고 감시할 거버넌스, 즉 체계적인 의사결정 구조가 없다는 데 있었다.

주식이나 채권형 펀드에 투자하려면 먼저 목표수익률과 감당할 수 있는 손실 한도를 정해야 한다. 앞으로 지급할 퇴직금과 현재 굴리는 적립금의 시기를 맞추는 자산부채종합관리(ALM)도 필요하다. 시장이 크게 흔들릴 때 누가 어떤 기준으로 대응할지도 미리 정해두어야 한다.

하지만 당시 위원회 자료와 사업자 제안서에서는 이런 준비를 찾기 어려웠다. 원리금보장형 상품의 발행사 쏠림 위험조차 파악하지 못한 상태에서 실적배당형 비중만 늘리는 것은 불에 기름을 붓는 일이었다. 내가 “하지 마라”고 답한 이유다.

독립적 전문가의 부재, 그리고 사업자의 한계

그렇다면 외부위원 한 사람을 참여시키면 문제가 해결될까. 현실은 그리 간단하지 않다. 특정 금융기관의 이해관계에서 자유로우면서 퇴직연금과 자산운용을 함께 이해하는 전문가가 시장에 충분하지 않기 때문이다.

퇴직연금제도를 아는 것과 수백억원의 자산을 실제로 설계하고 관리하는 것은 다른 능력이다. 법과 상품에 익숙하다고 장기 자산배분과 위험관리까지 잘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퇴직급여 지급 일정에 맞춰 자산의 만기와 위험을 설계해 본 경험이 필요하다.

회사가 스스로 운용 원칙을 세우기 어렵고 독립적인 전문가도 구하기 힘들다면, 결국 가장 가까이에서 만나는 퇴직연금사업자에게 도움을 기대하게 된다. 그러나 바로 이 지점에서 계약형 퇴직연금의 구조적 한계가 드러난다.

여러 퇴직연금사업자와 계약하면 각 사업자는 대개 자신이 맡은 적립금만 본다. 다른 금융기관에 어떤 상품이 얼마나 들어 있는지는 알기 어렵다. 각자 하나의 조각은 보지만 회사 전체의 그림은 보지 못하는 ‘정보 분절’ 구조다.

그 결과 각각은 무난해 보이는 상품을 제안했더라도 이를 합치면 특정 발행사의 신용위험에 적립금 대부분이 몰릴 수 있다.

그렇다고 사업자의 책임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전체 적립금 현황을 직접 볼 수 없다면, 적어도 다른 사업자에게 맡긴 자산까지 합산해 발행사별 투자 비중을 점검해야 한다고 안내해야 한다. 단순히 금리가 높은 단품 상품을 제시하는 데 그칠 것이 아니라, 회사가 전체 위험과 만기 구조를 관리할 수 있도록 기준과 자료를 제공해야 한다.

퇴직연금사업자가 상품 판매자를 넘어 회사 전체의 위험을 함께 살피는 컨설팅 파트너로 바뀌지 않는다면, ‘원리금보장’ 뒤에 숨은 위험은 다른 회사에서도 반복될 수밖에 없다.

위험을 볼 사람이 먼저다

퇴직연금사업자는 상품을 제안한다. 회사는 그중 하나를 고른다. 적립금운용위원회는 그 선택이 회사와 근로자의 장기 이익에 맞는지 판단해야 한다.

지금 필요한 것은 위원회라는 형식을 갖추거나 외부위원 자리를 채우는 일이 아니다. 사업자의 제안을 검증할 전문성, 실제 자산운용 경험, 이해상충으로부터의 독립성, 그리고 판단을 기록하고 확인하는 절차가 필요하다.

질문할 줄 아는 전문가와 이를 뒷받침하는 거버넌스가 먼저 서야 한다. 실적배당형비중을 높이는 일은 그다음이다.

지금은 ‘원리금보장’이라는 말만 믿을 때가 아니다. 그 이름 뒤에 어떤 위험이 숨어 있는지 볼 사람이 먼저다.

다음 편에서는 위원회가 세운 원칙을 누가 어떻게 실행해야 하는지 살펴본다. 전문 운용기관에 맡길 수 있는 역할은 무엇이며, 위원회가 끝까지 책임져야 할 본질적인 역할은 무엇인가.

[글로벌에픽 성기환 CP / keehwan.sung@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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