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병철 한국퇴직연금개발원 대표
다음 회의를 준비하던 김 부장(가명)은 거래중인 금융회사들이 보내온 퇴직연금 운용보고서를 책상 위에 펼쳐 놓았다.
은행 보고서에는 예금이, 증권사 보고서에는 ELB가, 보험사 보고서에는 이율보증형 상품이 담겨 있었다. 각각의 잔액과 수익률은 자세히 적혀 있었다.
그런데 보고서를 모두 펼쳐 놓아도 한 가지는 보이지 않았다. 회사 전체 적립금이 어떤 종류의 자산과 만기로 구성돼 있는지, 위험이 어디에 얼마나 몰려 있는지, 위원회가 정한 목표수익률과 허용위험한도에 맞게 운용되고 있는지를 한눈에 보여주는 자료가 없었다.
처방전은 여러 장이어도 환자는 한 사람이다
여러 진료과에서 약을 처방받는 환자를 생각해보자. 각 의사는 자신이 맡은 질환에 맞는 약을 처방한다. 그러나 각각의 처방이 적절해도 이를 모두 합치면 예상하지 못한 위험이 생길 수 있다. 그래서 환자의 전체 상태를 살피는 주치의가 필요하다.
DB형 퇴직연금도 다르지 않다. 여러 사업자가 각자 적절한 상품을 제안했더라도, 이를 합친 결과가 회사 전체에 적합한지는 별도의 문제다.
앞서 ⑱편에서 살펴본 회사가 그랬다. 여러 사업자와 거래하고 있었지만, 사업자들이 제안한 상품을 합쳐보니 전체 적립금의 80% 가까이가 한 증권사의 신용위험에 노출돼 있었다. 계좌는 나뉘었지만 위험은 나뉘지 않았다.
회사의 DB 적립금은 여러 사업자가 제공한 상품의 합계가 아니라 하나의 포트폴리오다. 가까운 시일 안에 지급할 퇴직급여는 현금화하기 쉬운 자산으로 준비하고, 당장 지급할 필요가 없는 돈은 더 긴 만기의 자산과 적절한 투자상품에 나누어 담아야 한다. 특정 발행사나 상품에 위험이 몰리면 줄이고, 목표에서 벗어난 자산 비중은 다시 맞춰야 한다.
계좌는 여러 곳이어도, 전체를 볼 책임은 분명해야 한다
현행 한국의 계약형 DB 구조에서 필요한 가장 단순한 출발점은 역량 있는 퇴직연금사업자 한 곳을 선정해 전체 적립금을 보게 하는 것이다. 거래와 정보가 한곳에 모이면 위원회가 정한 목표와 위험이 실제 자산배분에 어떻게 반영됐는지 설명할 책임도 분명해진다.
물론 한 사업자에게 맡긴다고 문제가 저절로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그 사업자가 자사나 계열사 상품만 제안한다면 통합관리가 아니라 새로운 집중위험이 생긴다. 다른 금융회사 상품과 외부 전문가 자문까지 연결하고, 이해상충을 통제할 수 있는 개방형 역량이 전제돼야 한다.
기업이 여러 사업자에게 적립금을 나누어 맡기는 데에도 이유가 있다. 한 사업자가 회사 전체를 책임 있게 관리해준다는 믿음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러 곳으로 나눈 뒤에는 각 사업자가 자기 계좌만 보게 되고, 다시 아무도 전체를 보지 않는 문제가 생긴다. 이 순환을 끊어야 한다.
여러 사업자와 거래를 유지한다면 그중 한 곳을 통합보고를 맡는 주관사업자로 정하는 방법이 있다. 현행 법령도 복수 사업자와 계약한 DB 사용자에게 간사기관을 두도록 하고 있다. 다만 간사기관은 재정검증과 부담금 산정, 정보 통지 등 제도의 통일적 운영을 담당하지만, 회사 전체 적립금을 자산배분하고 운용하는 주체는 아니다.
따라서 간사기관이라는 기존 접점을 활용해 통합보고와 전문자문을 연결하는 주관사업자 구조로 발전시킬 필요가 있다. 계약과 정보공유 체계를 정비해 주관사업자가 다른 사업자의 계좌까지 합친 통합보고서를 만들고, 필요한 투자자문과 성과평가를 연결하도록 하는 것이다.
해외 DB 연금도 한 가지 방식으로만 운용되지 않는다. 직접 운용, 투자 컨설턴트의 자문, 전문기관 위임 등 방식은 달라도 공통점은 분명하다. 전체 포트폴리오를 누가 보고, 누가 자문하고 실행하며 평가하는 지의 책임선이 명확하다는 것이다.
기업의 규모와 역량에 따라 길은 달라진다
모든 기업에 같은 운용구조를 요구할 수는 없다. 적립금 규모와 퇴직급여 지급구조, 내부 인력과 감당할 수 있는 비용이 다르기 때문이다.
적립금 규모가 상대적으로 작은 기업은 가까운 시일에 지급할 유동성을 따로 확보한 뒤, 나머지를 목표수익률과 위험 기준에 맞는 단일 펀드나 공동형 펀드로 단순하게 운용할 수 있다.
부산 시내버스 회사들이 조합을 중심으로 수요를 모으고, BNK부산은행과 미래에셋자산운용을 연결해 공동으로 펀드를 이용한 사례는 이러한 공동화의 한 가능성을 보여준다.
적립금이 커지고 이용하는 상품이 많아지면 전체자산 관점의 자문과 평가가 필요하다. 주관사업자가 통합보고서를 만들고, 투자컨설팅회사와 평가회사가 자산배분과 성과·위험을 독립적으로 점검하는 구조를 생각할 수 있다.
규모가 매우 큰 기업은 내부에 전문인력을 두거나 전문기관에 더 넓은 운용 역할을 맡기는 방안을 검토할 수 있다. 다만 OCIO와 같은 위임운용을 한국의 현행 DB 운용지시 구조에 연결하려면 권한과 책임, 계약과 법률관계를 먼저 분명히 해야 한다.
어떤 방식을 택하든 원칙은 하나다. 회사 전체 적립금을 하나의 포트폴리오로 보고, 위원회가 정한 목표와 위험을 실제 자산배분과 운용으로 옮길 주체가 있어야 한다.
퇴직연금사업자에게 요구되는 역할도 여기에서 분명해진다. 사업자가 모든 투자판단을 대신하라는 뜻이 아니다. 기업이 자기 규모와 역량에 맞는 전문가와 운용방식을 선택하도록 통합정보와 선택지를 제공하고, 실행 가능한 구조로 연결해야 한다는 뜻이다.
사업자에게 물어야 할 다섯 가지
김 부장이 다음 회의 전에 퇴직연금사업자에게 요청해야 할 것은 금리가 높은 상품 목록이 아니다. 다음 질문에 답하는 한 장의 통합보고서다.
1. 통합 진단 : 여러 사업자와 계좌에 흩어진 전체 적립금을 자산·만기·발행사별로 합쳐 보여줄 수 있는가?
2. 만기 배분 : 예상 퇴직급여 지급 일정에 맞춰 단기 유동성 자산과 중장기 투자자산을 어떻게 나누었는가?
3. 목표 반영 : 위원회가 정한 목표수익률과 허용위험한도를 어떤 자산배분과 점검 기준으로 옮겼는가?
4. 이해상충 통제 : 자문·운용·성과평가를 누가 맡으며, 각 기관의 이해상충은 어떻게 관리하는가?
5. 권한과 비용 : 통합보고와 전문자문에 관한 권한·책임·비용이 계약서와 수수료 체계에 어떻게 반영돼 있는가?
기업이 부담하는 운용관리수수료에 어떤 통합보고와 전문자문 서비스가 포함되는지도 따져보아야 한다. 더 깊은 외부자문을 이용할 수 있는지, 비용은 누가 부담하며 어떤 책임을 지는지도 계약에 분명히 남겨야 한다.
계좌는 나눠도, 전체를 볼 책임선은 하나여야 한다
회사는 여러 금융상품과 여러 퇴직연금사업자를 선택할 수 있다. 하지만 회사 전체 적립금이 어디에 투자돼 있고 어떤 위험을 지고 있는지 설명할 책임까지 여러 조각으로 나뉘어서는 안 된다.
위원회는 목표와 위험을 정하고 성과를 평가해야 한다. 퇴직연금사업자는 그 결정이 실제로 실행될 수 있도록 전체 정보를 모으고 필요한 전문성을 연결해야 한다. 운용사와 컨설팅회사, 평가회사는 각자 맡은 범위에서 전문성을 제공해야 한다. 각자의 역할이 분명하게 연결될 때 DB 적립금은 비로소 상품의 묶음이 아니라 하나의 포트폴리오로 운용될 수 있다.
그러나 실행할 길을 마련해도 단기 손실의 책임이 재무담당자 개인에게 돌아간다면 새로운 선택은 이뤄지기 어렵다. 다음 편에서는 김 부장이 다시 예금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이유와 신중한 결정을 조직이 보호하는 절차를 살펴본다.
[글로벌에픽 성기환 CP / keehwan.sung@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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