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6.10.20(화)

[김병철 칼럼㉗] 가입부터 수령까지, 내 연금을 설계해 줄 사람은 어디에 있는가?

성기환 CP

2026-10-20 08:30:06

김병철 한국퇴직연금개발원 대표

김병철 한국퇴직연금개발원 대표

[글로벌에픽 성기환 CP] 지난 ⑰편부터 퇴직연금사업자가 가입자의 선택을 어떻게 설계해야 하는지 살펴봤다. 목표와 위험을 정하고, 멈춘 계좌를 다시 살피며, 퇴직급여를 노후소득으로 이어주는 일까지 왔다. 마지막 편에서는 가입부터 수령까지 이 길을 가입자의 입장에서 함께 설계할 사람은 누구인지 묻는다. [편집자주]

최근 한 세미나에서 주제발표를 마친 뒤 한 토론자가 필자에게 말했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들립니다. 현실과 너무 동떨어져 있어요.”

오랫동안 마음에 남은 말이다. 필자가 주장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원칙이었다. 퇴직연금은 가입자의 노후를 위해 운용되어야 하고, 선택지를 제시하는 사람은 그 선택이 어떤 결과를 만드는지 살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한국의 현장에서는 그 당연한 말조차 현실과 먼 이상론처럼 들릴 수 있다.
이번 연재에서 만난 가입자들의 자리를 다시 돌아보자.

입사할 때는 자신의 나이와 형편에 맞는 목표를 세우지 못한 채 펀드 목록부터 마주했다. 적립하는 동안에는 예금 만기가 지나 계좌가 멈췄지만, 무엇을 바꿔야 할지 설명해 주는 사람이 없었다. 퇴직할 때는 별도 계좌를 만들었다가 평생 모은 돈을 목돈으로 꺼낼 뻔했다. 은퇴 뒤에는 국민연금이 나오기 전 생활비와 훗날의 병원비를 어떻게 나누어 받아야 할지 막막했다.

시기는 달랐지만 질문은 하나였다.

“처음 가입할 때부터 모으고 굴리고 나누어 받을 때까지, 제 입장에서 이 연금의 길을 함께 설계해 줄 사람은 누구입니까?”

이 질문에 선뜻 답할 수 있는 곳이 없다. 한국에 연금 상담을 하는 사람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은행의 자산관리 담당자(PB), 보험설계사, 투자권유 인력, 재무설계사와 퇴직연금 상담조직이 각자의 영역에서 도움을 준다. 문제는 가입·운용·이직·퇴직·수령을 하나의 계획으로 묶고 실제 행동까지 이어주는 기능이 시장의 기본서비스로 자리 잡지 못했다는 데 있다.

상품을 설명하는 사람과 삶을 설계하는 사람은 다르다
보험에 가입할 때는 설계사가 가족 상황과 필요한 보장을 묻고 적합한 내용을 조합해 제안한다. 그런데 수십 년의 노후를 책임질 퇴직연금 앞에서는 가입자가 상품설명서와 계산기를 받아든 채 스스로 설계자가 되도록 요구받는다.

필자는 이 빈자리를 채우는 기능을 ‘선택설계사’, 연금에서는 ‘연금설계사’라고 부르고 싶다. 지금 존재하는 법정 자격의 이름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가입자의 삶을 묻고, 여러 선택의 결과를 보여주며, 적합한 길을 권하고 실제 행동으로 연결하는 역할을 말한다.

그 일은 은퇴할 때 수령 방법을 골라주는 데서 시작하지도, 거기서 끝나지도 않는다. 가입할 때는 나이와 형편에 맞는 목표와 위험 수준을 정한다. 모아가는 동안에는 예금과 주식 등에 돈이 알맞게 나뉘어 있는지 살핀다. 이직하거나 퇴직할 때는 흩어진 계좌를 이어주고, 은퇴 뒤에는 국민연금과 생활비·비상자금을 연결해 노후 월급을 만든다. 삶이 바뀌면 계획도 다시 점검한다.

선택설계가 가입자가 걸어갈 길을 만드는 일이라면, 선택설계사는 그 길을 개인의 삶에 맞게 안내하는 사람 또는 기능이다. 길만 있고 안내할 사람이 없거나, 상담만 있고 실행할 길이 없어서는 안 된다.

모든 사람에게 비싼 종합자문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이런 서비스를 들으면 먼저 비용이 걱정된다. 모든 가입자에게 고액의 개인자문을 제공하는 것은 현실적이지 않다. 그렇다고 다시 “알아서 고르라”고 돌려보낼 이유도 없다. 한국에서는 필요한 도움을 세 층으로 나눠볼 수 있다.

1층은 표준설계다. 대부분의 가입자에게 사업자가 지금의 수수료 안에서 목표 진단, 멈춘 계좌 알림, 연령대에 맞춘 기본 운용·수령안을 제공한다.

2층은 개인상담이다. 직장을 옮기며 계좌를 합치거나, 예금과 주식의 비중을 바꾸거나, 국민연금이 시작되기 전 생활비를 설계해야 할 때 사업자 내부 상담자나 위탁 전문가가 필요한 부분을 함께 살핀다.

3층은 종합자문이다. 여러 연금과 부동산, 부채와 세금, 상속까지 가구 전체를 살펴야 한다면 별도 비용을 내는 독립적인 자문이 필요하다.

평범한 직장인 대부분은 1층과 2층 사이에 있다. 부동산과 상속까지 모두 펼쳐볼 필요는 없지만, 상품설명서만으로 자신의 계좌를 움직이기도 어렵다. 가입과 운용, 이직과 퇴직의 고비마다 자기 처지에 맞는 안을 짜 줄 사람이면 된다.

세 층은 서로 경쟁하지 않는다. 앞 단계에서 해결되지 않는 사람을 다음 단계로 연결해야 한다. 좋은 자문도 금융기관의 계좌에서 실행되지 않으면 종이 위 계획으로 남는다. 반대로 사업자가 자기 상품만 권하면 설계가 아니라 판매가 된다. 누가 왜 그 안을 권했는지 기록하고, 비용과 사업자 자신의 이익이 개입했는지도 밝혀야 한다.

해외는 이 당연한 말을 제도로 옮기고 있다

같은 고민은 해외에도 있다. 영국 금융감독당국은 연금과 투자에 관한 기존 안내·자문 시장에서 충분한 도움을 받지 못하는 사람이 약 2천300만명에 이른다고 추정했다. 이에 따라 2026년 4월부터 금융회사는 비슷한 상황의 고객에게 ‘준비된 제안’을 먼저 보여줄 수 있게 됐다. 모든 사람이 비싼 종합자문을 받지 않아도 다음 행동을 선택할 수 있게 하려는 것이다.

영국은 무료로 선택지를 설명하는 공적 안내, 공통된 상황에 맞춘 준비된 제안, 개인의 전체 형편을 살피는 금융자문을 구분한다. 호주도 퇴직연금기금이 제공하는 기본 정보와 도구, 해당 기금 계좌에 관한 개인상담, 별도 비용의 포괄자문을 나눠 제공한다.

두 나라에도 완성된 답이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복잡한 결정을 개인에게 맡겨둔 채 상품설명서만 건네서는 부족하다는 점, 필요한 도움을 단계별로 제공하고 다음 단계로 연결해야 한다는 점은 이미 정책의 출발점이 됐다.

선택설계가 작동하려면 역할이 이어져야 한다

선택설계는 질문 몇 개나 좋은 상담자 한 사람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목표를 묻고 결과를 보여주며, 적합한 안을 권하고 실제 실행과 사후점검으로 잇는 과정이 끊기지 않아야 한다.

국가는 조언과 판매의 경계를 정하고, 가입자의 동의 아래 국민연금과 퇴직연금 정보를 함께 볼 수 있는 기반을 만들어야 한다. 회사는 좋은 사업자를 고르고, 근로자가 재직 중이나 퇴직할 때 필요한 상담을 받을 시간과 경로를 마련해야 한다.

퇴직연금사업자는 이 과정의 중심에 있다. 가입 화면의 질문부터 적립 중의 계좌 관리, 퇴직 뒤의 지급까지 모두 사업자의 시스템에서 실행되기 때문이다. 내부 상담자와 디지털 도구로 지원하고, 직접 해결하지 못하는 문제는 외부 전문가에게 연결해야 한다.

선택설계사는 제도와 상품의 말을 가입자의 삶의 말로 바꾸고, 흩어진 소득과 자산을 하나의 계획으로 묶는다. 사업자 안에서 일하든 외부에서 돕든 권유의 범위와 비용, 책임은 분명해야 한다.

가입자는 설명을 들은 뒤 권유를 받아들이거나 고치거나 거절한다. 최종 결정은 가입자의 몫이다. 그러나 최종 결정권이 있다는 말과 모든 과정을 혼자 설계해야 한다는 말은 같지 않다.

선택의 책임과 선택설계의 책임을 나눠야 한다

⑰편에서 우리는 마트의 진열대를 통해 ‘선택설계’라는 말을 꺼냈다. 우유를 집는 사람은 소비자지만, 무엇을 눈높이에 놓을지는 마트가 정한다. 퇴직연금도 마찬가지다. 가입자가 마지막 버튼을 눌렀다고 해서 그 앞의 질문과 메뉴, 권유를 만든 사람의 책임까지 사라지지는 않는다.

그 뒤의 글들은 회사의 적립금운용위원회부터 개인의 퇴직연금계좌까지, 선택설계가 어떻게 작동해야 하는지 살펴본 과정이었다. 질문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였다. 가입자가 선택하기 전과 선택한 뒤의 길을 누가 만들고 책임질 것인가?

선택설계는 상품 진열대나 사전에 정해둔 기본 운용방법인 디폴트옵션 하나를 정하는 일이 아니다. 은퇴할 때 수령 방법만 골라주는 기술도 아니다. 입사 첫날의 질문부터 마지막 연금을 받는 날까지 선택의 길을 끊기지 않게 만드는 일이다. 이 과정 없이 선택권만 주고 모든 판단과 실행을 개인에게 넘기는 계약형 제도는 완성됐다고 보기 어렵다.

세미나 토론자의 말처럼 이 글도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라는 당연한 말로 들릴 수 있다. 그러나 그 원칙이 현실과 동떨어져 보인다면, 원칙이 지나치게 앞서서가 아니라 한국의 퇴직연금이 기본에서 그만큼 멀어져 있기 때문일 것이다. 현실이 원칙에서 멀다는 이유로 원칙까지 낮출 수는 없다.

좋은 선택은 가입자가 혼자 찾아낸 정답이 아니다. 누군가 삶을 묻고 가능한 길을 보여주며, 적합한 안을 권하고 그 권유에 책임질 때 비로소 만들어진다. 한국 퇴직연금에 지금 필요한 것은 상품을 하나 더 파는 사람이 아니라, 가입부터 수령까지 선택을 연금으로 완성해 줄 사람이다.

[글로벌에픽 성기환 CP / keehwan.sung@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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