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6.11.02(월)

[김병철 칼럼㉘] 가만히 있어도 좋은 길로 가는 연금…정부 개혁안에 담긴 ‘넛지’의 힘

성기환 CP

2026-11-02 08:15:27

김병철 한국퇴직연금개발원 대표

김병철 한국퇴직연금개발원 대표

[글로벌에픽 성기환 CP] 지난달 29일 정부가 관계부처 합동으로 ‘퇴직연금 기능강화 방안’을 발표했다. 퇴직연금에 대한 최초의 노사정 공동선언을 구체화한 이번 방안은 아직 입법 전이다. 금융업권과 노사의 이해관계에 따라 여러 의견이 나오고 있지만, 이번 방안에는 우리 퇴직연금의 오랜 문제를 풀어갈 중요한 설계 원리가 담겼다. 바로 행동경제학의 ‘넛지(Nudge)’와 ‘기본값(Default)’이다. 정부 개혁안을 한 주제씩 해설하는 새 연재의 첫 편으로, 가입·운용·수령의 세 길목에 놓인 기본값을 살펴본다. [편집자주]

김 부장은 해마다 신입사원들에게 확정기여형(DC) 퇴직연금 상품을 설명한다. 스마트폰 화면에는 수많은 예금과 펀드가 떠 있고, 처음 듣는 금융 용어도 줄줄이 나온다. 설명이 끝날 무렵 한 신입사원이 묻는다.

“우리가 왜 금융 전문가가 되어야 합니까?”

당연한 질문이다. 가입자는 상품을 직접 고르고, 만기가 되면 다시 선택하고, 퇴직할 때는 연금과 일시금 중 하나를 정해야 한다. 제도는 폭넓은 선택권을 주었지만, 많은 가입자에게 그 선택은 자유보다 무거운 숙제에 가까웠다.
2025년 말 퇴직연금 적립금은 501조원을 넘어섰다. 그러나 투자상품 비중은 24.6%에 그쳤다. 5년 전보다 크게 늘었지만, 적립금의 상당 부분은 여전히 저축에 가까운 상품에 머물러 있다. 가입자가 금융을 잘 이해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너무 많은 판단을 개인에게 맡겨둔 구조의 결과일 수 있다.

이번 정부 방안은 그 출발점을 바꾸려 한다. 사람에게 더 열심히 공부하라고 요구하기보다, 가만히 있어도 비교적 좋은 길로 가도록 제도의 기본값을 바꾸는 것이다.

좋은 제도는 사람을 탓하지 않는다

행동경제학자 리처드 탈러와 캐스 선스타인은 선택의 자유를 남겨두면서도 사람들이 더 나은 방향으로 움직이게 하는 부드러운 개입을 ‘넛지’라고 불렀다.

사람은 복잡한 계산을 미루고, 익숙한 상태를 그대로 유지하려는 경향이 있다. 이를 ‘현상유지 편향’이라고 한다. 나쁜 제도는 “왜 공부하지 않았느냐”, “왜 제때 바꾸지 않았느냐”며 사람을 탓한다. 좋은 제도는 그런 인간의 모습을 인정하고, 아무것도 하지 않았을 때도 노후자금이 엉뚱한 곳에 멈추지 않도록 길을 만든다.

이번 방안에는 가입·운용·수령의 세 단계에 이런 기본값이 들어 있다.
첫 번째 넛지: 가입의 기본값…고르지 않아도 기금에서 출발한다

정부 방안은 근로자대표의 동의를 얻어 특정 기금형 퇴직연금을 사업장의 기본값으로 정할 수 있도록 했다. 기금형은 수탁법인이라는 별도 법인이 가입자의 적립금을 모아 전문적으로 운용하는 제도다.

지금까지는 가입자가 여러 금융상품 가운데 무엇을 고를지 먼저 결정해야 했다. 기금형이 기본값이 되면 개별 근로자가 상품부터 고르는 대신, 노사가 함께 정한 기금에서 출발할 수 있다. 다만 이 기본값이 어느 범위에 적용되고 개별 근로자가 어떻게 다른 길을 선택할지는 앞으로 법과 시행령에서 구체화해야 한다.

제도 밖의 근로자를 위한 더 큰 기본값도 마련됐다. 퇴직급여를 회사 밖에 적립하는 의무가 단계적으로 시행된 뒤에도 퇴직연금을 도입하지 않은 사업장은 중소기업퇴직연금기금, 이른바 ‘푸른씨앗’에 자동으로 가입시키되 일정 기간 안에 탈퇴할 선택권을 보장한다.

가입을 기본으로 하되 원하지 않으면 나갈 수 있게 하는 방식이다. 먼저 신청한 사람만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아무 행동을 하지 못한 사람도 제도 안으로 데려오는 넛지다.

두 번째 넛지: 운용의 기본값…상품 대신 하나의 포트폴리오가 움직인다

정부 방안에서 필자가 가장 반갑게 읽은 문장은 이것이다.

“기금형 내 단일운용 전략만 허용 → 가입자는 수탁법인만 선택”

필자는 기금형 퇴직연금 제도를 준비하기 위한 태스크포스(TF)의 운용 관련 분과에 참여하면서, 같은 원칙을 담은 자료를 제출한 적이 있다. 기금은 가입자마다 상품을 고르는 장터가 아니라, 여러 자산을 알맞게 섞은 하나의 포트폴리오로 운용되어야 한다는 제안이었다. 그래서 정부 방안의 이 한 줄이 더욱 반가웠다.

단일운용 전략에서는 가입자가 예금과 펀드를 하나씩 고르지 않는다. 수탁법인이 전체 자산을 하나의 원칙에 따라 운용한다. 가입자가 계좌를 자주 들여다보지 않아도 자금이 선택을 기다리며 멈춰 있지 않는다는 뜻이다.

물론 손실이 없다는 약속은 아니다. 수익과 손실은 가입자에게 돌아가며, 단일운용 전략을 어떤 방식으로 구성할지도 앞으로 정해야 한다. 달라지는 것은 투자 결과가 아니라 운용을 맡기는 방식이다. 개인에게 상품 선택을 맡기던 구조에서, 전문가가 하나의 포트폴리오를 만들고 관리하는 구조로 옮겨가는 것이다.

계약형에도 작지만 의미 있는 넛지가 들어갔다. 미리 디폴트옵션을 정한 가입자에게는 적용 예정 통보를 만기 4주 뒤가 아니라 만기 2주 전에 하도록 바꾼다. 돈이 만기 뒤 대기성 자금으로 머무는 시간을 줄이려는 장치다.

세 번째 넛지: 수령의 기본값…따로 말하지 않으면 연금으로 받는다

마지막 기본값은 은퇴의 순간에 작동한다.

지난해 퇴직급여를 받은 계좌 가운데 83.5%는 일시금 수령을 선택했다. 금액의 83.5%라는 뜻은 아니지만, 퇴직할 때 연금보다 일시금을 선택하는 계좌가 압도적으로 많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세제상 연금수령 혜택이 있어도 해지 버튼을 눌러 목돈을 받는 쪽이 더 쉬웠기 때문이다.

정부 보도자료는 일시금 수령 의사를 밝히지 않으면 자동으로 연금으로 지급하는 방향을 제시했다. 상세 방안에는 ‘연금수령 Opt-out 방식 도입 검토’라고 적혀 있어 아직 확정된 제도는 아니다. 그러나 기본값을 일시금에서 연금으로 돌리겠다는 방향은 선명하다. 일시금을 받을 자유는 남겨두되, 아무 말도 하지 않았을 때는 퇴직급여가 ‘노후 월급’으로 이어지게 하는 것이다.

연금과 일시금의 기대수익과 수령액을 미리 비교해 보여주도록 한 것도 좋은 넛지다. 가입자가 해지 버튼을 누르기 전에 “연금으로 받으면 매달 얼마를 받을 수 있는가”를 보게 하면 선택은 달라질 수 있다.

김 부장과 금융기관의 일도 달라진다

세 가지 기본값은 근로자만 돕는 것이 아니다. 기업 담당자와 금융기관의 일도 단순하고 분명하게 만든다.

기금형이 도입되면 김 부장은 직원마다 상품 선택과 만기를 일일이 챙기는 대신, 근로자대표와 함께 믿을 만한 기금을 고르고 제대로 운용되는지 살피는 일에 집중할 수 있다. 상품을 대신 고르는 부담은 줄지만, 좋은 기금을 선정하고 점검하는 역할은 남는다. 사용자의 규약 신고를 계약서로 갈음하도록 간소화하면서 근로자대표 동의와 의견청취 절차는 유지한 것도, 보호장치는 남기고 불필요한 번거로움은 줄인 설계다.

금융기관의 상담도 달라질 수 있다. 수많은 상품을 하나씩 소개하는 데서 벗어나, 기금이 어떤 원칙으로 운용되고 누가 관리하는지를 설명하는 상담으로 옮겨갈 수 있다. 복잡한 선택을 가입자에게 넘기는 경쟁보다 포트폴리오와 관리 역량으로 신뢰를 얻는 경쟁이 시작되는 것이다.

우리가 기다려온 방향에 가장 가까운 방안

필자는 지난 9월 퇴직연금혁신포럼에서 디폴트의 단위를 상품 하나가 아니라 가입·운용·이직·수령을 잇는 ‘평생의 기본경로’로 넓혀야 한다고 발표했다. 이번 방안은 그 길 가운데 가입·운용·수령의 세 곳에 구체적인 기본값을 놓았다.

그렇다고 이 방안이 어느 한 사람의 결과라는 뜻은 아니다. 지난 1년 동안 노동계와 경영계, 정부와 전문가들이 머리를 맞댄 결과다. 다만 필자가 오랫동안 주장해 온 방향이 정부 방안의 문장으로 나타났다는 점에서 반갑고, 그 설계의 방향을 높이 평가한다.

이번 방안의 장점은 가입자에게 더 많은 선택지를 던져준 데 있지 않다. 평범한 사람이 매 순간 금융 전문가가 되지 않아도 노후자금이 제 갈 길을 가도록 기본경로를 만들었다는 데 있다. 아직 입법과 하위규정이 남아 있지만, 우리가 그동안 찾던 설계에 가장 가까운 출발이다.

다만 기본값은 힘이 세다. 그래서 누가 그 길을 만들고 어떤 책임을 질 것인지가 중요하다. 다음 편에서는 이번 방안이 기본값 곁에 어떤 수탁자책임을 놓았는지 살펴본다.

[글로벌에픽 성기환 CP / keehwan.sung@daum.net]
<저작권자 ©GLOBALEPIC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주식시황

항목 현재가 전일대비
코스피 5,824.22 ▲93.48
코스닥 731.29 ▲6.91
코스피200 914.60 ▲14.82

가상화폐 시세

암호화폐 현재가 기준대비
비트코인 105,439,000 ▲181,000
비트코인캐시 381,900 ▲900
이더리움 3,083,000 ▲12,000
이더리움클래식 9,585 ▼25
리플 1,686 ▼2
퀀텀 1,030 ▲6
암호화폐 현재가 기준대비
비트코인 105,330,000 ▲120,000
이더리움 3,082,000 ▲12,000
이더리움클래식 9,595 ▼5
메탈 365 ▲1
리스크 263 ▼11
리플 1,686 0
에이다 260 ▼1
스팀 67 ▼0
암호화폐 현재가 기준대비
비트코인 105,420,000 ▲170,000
비트코인캐시 381,500 0
이더리움 3,084,000 ▲12,000
이더리움클래식 9,600 ▲5
리플 1,686 ▼2
퀀텀 1,385 0
이오타 53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