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노소영 아트센터 나비 관장_연합뉴스
세기의 이혼 소송으로 드러난 비자금 의혹
비자금 논란의 발단은 노태우 전 대통령의 딸 노소영 아트센터 나비 관장과 최태원 SK그룹 회장의 이혼 소송 과정에서 시작됐다. 지난해 5월 서울고법은 최 회장이 노 관장에게 재산분할로 1조3808억원을 지급해야 한다고 판결했는데, 이 과정에서 노 관장 측이 제출한 증거가 사회적 파장을 일으켰다.
노 관장 측은 '선경 300억'이라고 적힌 모친 김옥숙 여사의 메모와 함께 선경건설(현 SK에코플랜트) 명의 50억원짜리 약속어음 6장을 법정에 제출했다. 이는 그동안 실체가 드러나지 않았던 노태우 전 대통령 일가의 '안방 비자금'을 스스로 공개한 것이다. 노 관장은 재산분할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하기 위해 '이 비자금이 기업 성장의 종자돈이 됐다고 주장했다.
1년간 수사 진척 없어 ... 시민단체 강력 반발
문제는 이처럼 스스로 공개한 ‘안방 비자금’이 부메랑이 되어 돌아왔다. 시민단체 등은 비자금 실체를 규명하고 환수해야 한다고 공세를 펼쳤으나 공개된 지 1년이 지나도록 실질적인 수사 진척은 없는 상황이다. 검찰이 노 전 대통령 일가의 금융계좌를 추적해 자금 흐름을 파악하고 있다는 소식만 전해질 뿐이다.
군사정권범죄수익국고추진환수위원회(이하 환수위)는 6월 10일 발표한 성명에서 "노태우 비자금이 세상에 알려져 충격을 준지 1년 동안 국민들은 비자금 존재에 대해 분노하고 있지만 검찰과 국세청 등 사정당국의 비호아래 비자금은 여전히 청산되지 않고 있다"고 강력히 비판했다.
환수위는 "지난 1년간 검찰과 국세청에 수많은 고발과 조사 촉구를 했지만, 여전히 당사자들에 대한 소환조사조차 진행되지 않고 있다"며 "오히려 사정당국은 수사 대상자들이 증거를 인멸하거나 숫자를 맞추는 등의 시간을 벌어주는 등 국민들 바램과는 정 반대의 행보를 보이고 있다"고 지적했다.

5·18 기념재단 원순석 이사장(왼쪽)과 차종수 부장이 지난해 서울 대검찰청에서 노태우 전 대통령의 부인 김옥숙씨와 아들 노재헌·딸 노소영씨 등을 범죄수익은닉의 규제 및 처벌 등에 관한 법률 위반으로 고발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문제의 심각성은 비자금 규모와 그 은닉 방식에 있다. 환수위에 따르면 “노태우 전 대통령과 그 가족들은 지난 30여년동안 ‘노태우 비자금은 모두 국고로 환수되었다’고 주장하며 거짓 사과쇼를 벌여왔다. 하지만 실제로는 1,400여억원대의 비자금이 그 가족들에 의해 불법으로 은닉, 상속되어 왔음이 노소영 관장의 이혼소송 과정에서 만천하에 드러났다”고 말했다.
환수위는 또한 “노 관장은 비자금 실체에 대해 '가족들만 아는 비밀로 하기로 했다'고 밝히며 공개했고, 법원은 이 비자금을 근거로 불법 비자금을 개인재산으로 인정하는 판결을 내렸다. 이로 인해 범죄수익이 합법적 재산으로 둔갑하는 전례를 남기게 됐다”고 비판했다.
비자금 규모가 1000억원 이상에 달할 것이란 관측도 제기되고 있으며, 노태우 전 대통령의 아들 노재헌 이사장이 이끄는 동아시아문화센터 등을 통해 은닉 자금이 계속 흘러들어가고 있다는 주장도 지속적으로 제기되고 있다.
정치권도 소극적 대응... "청문회 한 번 없었다"
정치권의 대응도 미온적이라는 지적이다. 환수위는 "국회 등 정치권 역시 비자금이 공개된 이래 노태우 비자금 당사자들을 직접 불러 청문회 한번 하지 않았고, 끝까지 환수하기 위한 법안 하나 처리된 것이 없을 정도로 노태우 비자금 세력들을 비호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지난해 10월 국정감사에서 비자금 환수와 관련자 수사 필요성이 논의됐고, 당시 심우정 검찰총장이 "법과 원칙에 따라 검토하겠다"고 밝히기도 했다. 하지만 12·3 비상계엄과 탄핵 국면, 조기 대선 등을 거치며 '노태우 비자금' 문제가 정치권 관심사에서 벗어나 버렸다.
노 전 대통령 일가의 해명도 없었다. 노 관장과 노 이사장 등은 국감 증인으로 채택됐으나 뚜렷한 이유 없이 불출석했고, 오히려 국감 기간에 노 전 대통령 서거 3주기 추모 행사를 챙겨 강한 질타를 받기도 했다.
시민단체들은 정권이 바뀌면서 이재명 대통령에 기대를 거는 분위기다. 이 대통령이 후후보시부터 군사정권 비자금 문제에 대해 단호한 입장을 보였기 때문이다.
이 대통령은 대선 후보시절 "노태우, 전두환 등 군사정권의 비자금에 대해서는 끝까지 책임을 묻겠다"며 "민사상 소멸시효도 배제해 상속자들한테까지도 민사상 배상 책임을 끝까지 물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환수위는 "이재명 대통령의 '군사정권의 비자금에 대해서는 끝까지 책임을 묻겠다'는 약속과 관련해 국민들은 이번에야말로 노태우 군사정권 은닉비자금의 실체가 드러날 것으로 굳게 믿고 있다"며 "이 대통령은 신속하고 엄정한 수사가 진행될 수 있도록 해 달라"고 촉구했다.

군사정권범죄수익국고환수추진위원회가 국회 앞에서 노태우 비자금 관련 집회를 하고 있다. (사진=군사정권범죄수익국고환수추진위원회)
국민 여론도 강력한 처벌 요구
국민들도 비자금에 대해 철저한 규명과 환수를 요구하고 있다. 518기념재단이 지난 5월 발표한 여론조사 결과에 따르면, 전 국민의 73%가 노태우 비자금에 대해 '철저하게 조사해 엄정하게 처벌하고 전액 국고로 환수해야 한다'고 답했다. 환수위는 "이는 노태우 비자금에 대해 잘 모르는 일부를 제외하면 사실상 전 국민이 철저한 규명과 환수를 요구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518기념재단은 이재명 대통령 취임식이 있었던 지난 6월 4일 '이재명 대통령과 새로운 정부에게 바란다!'는 제목으로 '전두환·노태우 등 신군부 세력의 비자금 환수를 위한 철저한 수사와 처벌, 관련 특별법의 제정'을 요구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환수위 관계자는 "비자금 청산 차원을 넘어 대한민국 바로 세우기 차원에서 노태우 비자금에 대한 철저한 조사와 엄정한 책임을 묻는 절차가 진행돼야 한다”며 “이에 대한 여론이 높아지는 만큼 과거사 청산에 대해서 새 정부가 의지를 보여야 할 시점”이라고 말했다.
[글로벌에픽 안재후 CP / anjaehoo@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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