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화오션 하청업체와 전국금속노동조합 거제통영고성 조선하청지회(조선하청지회)는 18일 1년2개월의 교섭 끝에 새 단체협약에 잠정 합의했다고 발표했다. 서울 장교동 한화 본사 앞 30m 철탑에서 97일간 고공농성을 벌여온 김형수 지회장은 19일 조합원 투표 결과에 따라 지상으로 내려올 예정이다.
이번 합의는 단순한 임금협상의 타결을 넘어 조선업계 전반에 걸친 노사관계 개선의 신호탄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상여금 100% 인상과 원청의 결단
상여금 지급이 포함된 단체협약은 원칙적으로 조선하청지회 조합원에게만 적용되지만, 조합원이 아닌 하청노동자에게도 '격려금'이라는 이름으로 같은 금액이 지급된다. 한화오션 하청노동자들이 2만명에 가깝고, 상여금·격려금이 원청이 하청업체에 주는 기성금에서 지급된다는 점을 감안하면 원청의 결정 없이는 불가능한 합의였다.
이번 합의로 한화오션 하청노동자들의 연간 소득이 일정 부분 증가할 것으로 예상된다. 월 기본급이 300만원인 하청노동자의 경우 기존 연간 150만원이던 상여금이 300만원으로 늘어나, 실질적인 소득 향상 효과를 체감할 수 있을 전망이다.
이 밖에도 노사는 정규직에 해당하는 상용공 확대를 위해 노력하기로 하고, 노조 조합원 취업방해 목적의 '블랙리스트' 작성 금지와 산업재해 은폐 방지를 위한 조항도 단체협약에 신설했다. 특히 산업재해 예방과 관련된 조항 신설은 조선업계의 높은 산재 발생률을 고려할 때 매우 의미 있는 진전으로 평가된다.
김승연 회장 태도변화가 결정적 역할
교섭 타결의 배경에는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의 태도 변화가 결정적 역할을 했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1981년 젊은 나이에 회장에 취임한 김승연 회장은 40여 년간 한화그룹의 총자산을 288배, 매출을 60배로 키우며 그룹을 성장시켜왔다.
한화그룹의 상생경영은 단순한 구호가 아닌 실질적인 성과로 이어지고 있다. 한화시스템의 경우 '함께 미래를 열다, 미래를 함께 하다'라는 슬로건 하에 협력사와의 동반성장을 위한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으며, 이러한 철학이 이번 하청노동자 문제 해결에도 적용된 것으로 보인다.
과거 갈등 청산, 새로운 노사관계 모색
한화오션은 2022년 대우조선해양 시절 51일간 도크 점거 파업으로 인한 손실 배상을 요구하며 노조 간부들을 상대로 제기한 470억원 규모의 손해배상 청구 소송도 취하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한화오션 관계자는 "상생과 협력 원칙을 실현하기 위해 대승적으로 손해배상 소송 취하를 준비 중"이라고 설명했다.
이번 470억원 손해배상 소송 취하 결정은 단순한 법적 분쟁의 해결을 넘어 한화오션이 과거와 결별하고 새로운 노사관계를 구축하려는 의지를 보여주는 상징적 조치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2022년 도크 점거 파업은 당시 대우조선해양의 생산 차질을 불러일으켜 큰 사회적 이슈가 되었으나, 이제 한화오션은 이를 과거사로 정리하고 미래지향적 관계 구축에 나선 것이다.
또한 한화오션은 본사 노조인 금속노조 대우조선지회와 진행 중인 모든 고소·고발 건에 대해서도 상호 일괄 취하하기로 합의했다고 발표했다. 양측은 근로 조건 협상 과정에서 업무 방해 등의 이유로 20건 안팎의 고소·고발을 진행해온 것으로 전해진다.
이러한 포괄적인 갈등 해소 조치는 한화오션이 단순히 이번 하청노동자 문제만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전사적으로 노사관계 정상화에 나서고 있음을 보여준다. 업계에서는 이번 조치가 조선업계 전반의 노사관계 개선에 긍정적 영향을 미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노조법 개정 요구 더욱 거세질 듯
이번 교섭 타결을 계기로 하청업체 노사관계에 미치는 원청의 영향력이 확인된 만큼, 이재명 대통령이 공약한 노동조합법 2·3조 개정 요구도 더욱 거세질 것으로 전망된다.
현행 노조법상 하청업체 노조는 원청과 직접 교섭할 수 없고, 하청업체와만 교섭할 수 있다. 하지만 실질적으로는 원청의 의사결정이 하청업체 노동자들의 근로조건에 결정적 영향을 미치는 상황이다. 이번 한화오션 사례에서도 상여금 인상과 470억원 손해배상 소송 취하 모두 원청인 한화오션의 결정에 달려 있었다.
이김춘택 조선하청지회 사무장은 "원청이 (하청업체) 뒤에서 나오지 않고 결정만 하는 것은 노사 간 대립과 갈등만 키우는 것"이라며 "노조법 개정을 통해 하청 노조와 원청 간 직접 교섭을 가능하게 하고 책임 있는 결정을 만드는 것이 노사관계에 훨씬 좋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노동계에서는 이번 사례를 들어 원·하청 직접교섭의 필요성을 더욱 강하게 주장할 것으로 예상된다. 특히 조선업뿐만 아니라 자동차, 철강 등 원·하청 구조가 복잡한 제조업 전반에서 유사한 요구가 확산될 가능성이 높다.
정치권에서도 이번 사례를 계기로 노조법 개정 논의가 더욱 활발해질 것으로 보인다. 이재명 대통령은 대선 공약으로 노조법 2·3조 개정을 통한 원·하청 직접교섭 허용을 내세웠는데, 이번 한화오션 사례가 그 필요성을 보여주는 실증 사례로 활용될 전망이다.
이번 합의가 조선업계는 물론 제조업 전반의 원·하청 관계 개선에 어떤 파급효과를 가져올지 주목되고 있다. 특히 김승연 회장의 상생경영 철학이 실제 성과로 이어진 만큼, 다른 대기업들도 유사한 접근법을 검토할 가능성이 높다는 분석이다.
[글로벌에픽 안재후 CP / anjaehoo@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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