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ASML이 전 세계 EUV 장비 시장의 100%를 독점하고 있는 상황에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ASML의 최우선 고객사다. 연간 약 212억 유로(약 29조원)의 매출 중 삼성과 SK하이닉스가 차지하는 비중은 30% 수준으로, 한국 기업들이 ASML의 사업 성장을 견인하는 주요 축인 것이다. 업계에서는 푸케 CEO의 방한이 단순한 시설 개소식 참석을 넘어, 향후 한국 반도체 기업들과의 전략적 동맹 강화를 위한 신호탄으로 풀이하고 있다.
화성, ASML 아시아 전진기지로 우뚝
이번 방한의 주요 행사는 경기 화성시 동탄에 건설된 ASML의 신사옥 개소식이었다. 총 2400억원을 투자해 건설된 이 신사옥은 단순한 사무 공간이 아니다. 지하 4층부터 지상 11층까지, 연면적 7만4418㎡ 규모의 이 시설에는 한국지사 신사옥, 재제조센터(Local Repair Center), 심자외선(DUV)·EUV 트레이닝센터 등이 통합 운영된다. 특히 재제조센터는 대당 수천억원대의 EUV 장비를 현장에서 수리 및 유지보수 할 수 있는 핵심 거점이 될 예정이다.
이번 ASML CEO 방한의 가장 핵심적인 배경은 차세대 EUV 기술인 '하이 NA EUV'의 확산과 관련이 있다. 하이 NA EUV는 기존 EUV 장비보다 렌즈의 빛 집광능력을 나타내는 수치(NA)를 0.33에서 0.55로 끌어올린 차세대 장비다. 이를 통해 기존 EUV 장비보다 1.7배 더 미세한 트랜지스터를 인쇄할 수 있으며, 트랜지스터 집적도는 2.9배 높아진다.
특히 인공지능(AI) 시대가 본격화되면서 2나노미터 이하의 초미세 공정이 필수 요구사항이 되었다. 2나노 공정 구현을 위해서는 하이 NA EUV가 거의 필수 불가결한 상황이 되었기 때문이다. 대당 가격이 5500억원 수준으로 기존 EUV 장비(약 3000억원)보다 83% 비싼 만큼, 각국의 반도체 제조사들 간에 확보 경쟁이 치열해질 수밖에 없다.
현재 하이 NA EUV 장비의 연간 생산 가능량은 7~8대에 불과하다. 이러한 극도의 공급 부족 상황에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이미 선제적으로 하이 NA EUV 장비 도입을 진행 중이다. 삼성전자는 연내 하이 NA EUV를 한 대 도입한 후 내년 상반기 한 대를 추가 도입할 예정이며, SK하이닉스는 지난 9월 경기 이천 M16 공장에 하이 NA EUV를 반입했다.

네덜란드 반도체 장비업체 ASML의 크리스토프 푸케 최고경영자(CEO). 로이터연합뉴스
1조2000억원 규모 '공동 R&D 센터' 구축
지난해 12월 윤석열 전 대통령의 네덜란드 ASML 본사 방문 당시 피터 베닝크 ASML 전 CEO와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이 이 프로젝트에 서명했으나, 현재는 부지 선정 작업이 진행 중인 상태다. 이 센터에는 전용 EUV 연구소와 R&D용 라인이 설치되어, 삼성전자와 ASML이 함께 미래 반도체 개발에 나설 계획이다.
공동 R&D 센터의 완성은 삼성전자에 전략적 우위를 제공한다. 특히 2027년 양산을 목표로 하고 있는 1.4나노 공정의 개발 과정에서 ASML과의 긴밀한 협력을 통해 기술적 우선권을 확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경계현 전 삼성전자 사장이 공항에서 기자들에게 "앞으로 하이 NA EUV 장비에 대한 기술적 우선권을 삼성이 갖게 될 것 같다"고 언급한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다.
글로벌 파운드리 전쟁에서 위상 강화
푸케 CEO의 한국 방문은 결국 글로벌 반도체 산업의 패권 경쟁에서 한국의 위상 변화를 반영하고 있다. TSMC가 파운드리 시장 절대 강자로 군림하는 가운데 삼성전자는 지난 몇 분기 동안 적자를 면치 못했다. 현재 파운드리 시장 점유율에서 TSMC는 67% 대의 점유율을 유지하고 있는 반면, 삼성전자는 10% 미만에 머물러 있는 상황이다.
이러한 격차를 극복하기 위해 삼성전자는 적극적인 설비 투자와 기술 개발에 나서고 있다. 최근 2조 6000억원대의 EUV 공정 투자를 발표하며, 메모리 전용 라인을 처음 구축하고 파운드리 부문에서도 2나노 하이 NA로 승부를 펼칠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다. SK하이닉스도 HBM(고대역폭 메모리) 시장에서 선도적 지위를 확보하기 위해 하이 NA EUV 도입을 서두르고 있다.
인텔의 공격적인 파운드리 진출, TSMC의 확실한 기술 우위, 그리고 일본 라피더스의 정부 지원 기반 2나노 시장 진입 등 글로벌 반도체 제조 경쟁은 더욱 치열해지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국의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ASML과의 전략적 협력을 통해 기술적 격차를 줄이겠다는 의지를 다시금 표출하는 것이다.
이재용·최태원 회동 … 한-네 반도체 동맹 강화
업계에서는 푸케 CEO가 동탄 신사옥 개소식을 마친 후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과 최태원 SK그룹 회장과 별도로 만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이재용 회장은 유럽 출장 때마다 ASML 본사에 들렀으며, 최태원 회장도 2023년 12월 ASML 본사를 방문한 바 있다. 이러한 정기적인 만남은 단순한 사업 미팅을 넘어, 한국과 네덜란드 간 반도체 동맹이 얼마나 깊이 있는지를 보여준다.
한국 기업들이 ASML의 핵심 고객이자 전략적 파트너로서의 지위를 확고히 하고 있는 가운데, ASML 측도 한국에 대한 투자와 협력을 지속적으로 확대하고 있다. 푸케 CEO의 '한국 100회 이상 방문' 언급은 단순한 수치가 아니라, ASML이 한국 시장을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는지를 나타내는 방증인 것이다.
[글로벌에픽 안재후 CP / anjaehoo@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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