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의 주관으로 개최된 '샌프란시스코 AI 서밋'(일부에서는 'K-AI 서밋'으로도 불림)에는 젠슨 황 엔비디아 CEO, 샘 올트먼 오픈AI CEO, 다리오 아모데이 앤트로픽 CEO가 미국을 대표했고,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 최태원 SK그룹 회장, 정의선 현대자동차그룹 회장, 이해진 네이버 의장이 한국을 대표했다.
이들이 나눈 협력의 규모는 경이로웠다. 5년간 9500억 달러, 우리 돈으로 약 1400조원 규모의 반도체·AI 인프라 협력이 체결된 것이다. 이는 삼성전자 2000억 달러, SK그룹 5000억 달러, 네이버 100억 달러 등 한국 기업들의 개별 협력을 합산한 총 예상 파이프라인 규모다. 단일 행사에서 발표된 투자·협력 규모로는 한국 산업사에서 유례를 찾기 어려운 수치다.
이번 협력이 주목받는 이유는 규모만이 아니다. 한국 기업들이 메모리 반도체에서 머물지 않고 파운드리, 데이터센터, 나아가 피지컬 AI까지 AI 산업 생태계 전역으로 역할을 확대했다는 점에서 한국의 전략적 위상이 크게 상승했음을 보여준다. 동시에 이는 미·중 기술경쟁이 심화되는 지정학적 경쟁 구도에서 한국이 AI 공급망 안정화의 핵심축으로 자리매김했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정부가 행사장에서 미국의 주요 기업 지도자들과 회동하는 모습은 단순한 외교 행사를 넘어선다. 그것은 한국이 글로벌 AI 공급망 구축에서 빠질 수 없는 파트너로 인정받았다는 신호다.
세계 AI 공급망 두고 벌어지는 전략 재편
각 기업이 그린 '턴키(턴키)' 전략…반도체에서 데이터센터까지
삼성전자 도전: 파운드리로 '날개' 펴다
삼성전자는 미국 반도체 설계 기업 브로드컴과 2030년까지 5년간 2000억 달러 이상의 협력을 체결했다. 연평균 400억 달러, 지난해 삼성 DS 부문 매출(약 130조원)의 약 2.2배 규모에 해당한다. 협력의 핵심은 삼성이 메모리와 파운드리, 첨단 패키징을 동시에 제공하는 '원스톱 턴키(turn-key)' 역량을 앞세운 것이다.
브로드컴은 구글, 아마존, 마이크로소프트 같은 빅테크가 엔비디아 의존도를 낮추려고 자체 개발하는 AI 가속기를 설계하는 회사다. 삼성은 브로드컴이 설계하는 차세대 AI 가속기에 고대역폭메모리(HBM)를 공급한다. 동시에 브로드컴의 고속 데이터 통신 반도체에 2나노미터 이하의 첨단 공정을 적용한다. 메모리가 필요하면 메모리를, 첨단 칩 생산이 필요하면 파운드리를 제공하는 식으로, 빅테크 고객의 모든 요구를 한 회사에서 충족시킬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업계 관계자는 "메모리와 파운드리, 첨단 패키징까지 갖춘 종합반도체기업(IDM)인 삼성전자의 턴키 역량이 주효했다"고 평가했다. 이 협력이 계획대로 진행되면 삼성 파운드리 사업의 경쟁력 강화는 물론, 주요 빅테크를 고객으로 확보하는 전기가 될 것으로 예상된다.
SK그룹 포석: 메모리에서 데이터센터까지 일관된 전략
SK하이닉스는 엔비디아에 차세대 AI 메모리를 장기 공급하고, 동시에 마이크로소프트의 데이터센터 구축에 필요한 AI 서버용 메모리를 중장기 공급하기로 했다. 이는 단순한 메모리 판매를 넘어 고객사가 요구하는 최적화된 제품을 함께 개발하는 협력을 의미한다.
SK텔레콤은 더 적극적으로 나섰다. 엔비디아로부터 차세대 GPU를 공급받아 2027년부터 국내에 최대 2기가와트(GW) 규모의 AI 팩토리를 단계적으로 구축할 계획이다. 동시에 앤트로픽과는 국내 AI 데이터센터 협력을 이어가고, 아마존 웹 서비스(AWS)와도 데이터센터 구축을 논의하고 있다. SK텔레콤이 메모리 공급자를 넘어 AI 인프라 사업자로 진화하려는 움직임이다.
현대차와 네이버, AI 생태계의 새로운 플레이어
현대자동차그룹은 전통 자동차 제조업체의 경계를 넘어서고 있다. 엔비디아와 함께 도시 전체의 인프라를 AI로 연결하는 '도시 단위 피지컬 AI' 구축에 나섰다. 자율주행차 개발, 로봇 플랫폼 구축, 지능형 공장까지 아우르는 포괄적 협력이다. 정의선 회장은 "우리가 추구하는 궁극적인 피지컬 AI는 도시 레벨의 통합 지능화를 실현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아울러 웨이모와는 조지아주의 현대차 메타플랜트에서 생산하는 아이오닉 5 기반 자율주행 파운드리 협력을 계속 이어가기로 했다.
네이버는 엔비디아와 글로벌 자산운용사 브룩필드와 함께 최대 100억 달러 규모의 AI 팩토리 투자·금융 지원을 추진한다. 빅테크에 대한 의존도를 줄이면서 한국의 언어와 문화에 맞춘 '소버린 AI' 구축을 목표로 한다. 네이버는 자체 데이터센터 기술과 클라우드, AI 모델을 통합해 제공할 준비를 하고 있다. 이해진 의장은 "세계의 다양성을 지키려면 국가와 집단, 개인마다 여러 AI가 나타나고 활동할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삼성SDS는 앤트로픽과 전략적 파트너십을 체결하고, 클로드 기반 기업용 AI 서비스 시장 확대에 나선다. 이준희 삼성SDS 대표는 "앤트로픽의 AI 기술력과 삼성SDS의 산업별 디지털 혁신 경험을 결합해 국내 AI 시장의 성장을 함께 주도하려는 출발점"이라고 설명했다.
한국의 전략적 위상, 그러나 과제는 여전히 크다
한국 기업들이 확보한 이 협력들은 미·중 기술경쟁이 심화되는 지정학적 환경에서 나온 결과다. 미국 빅테크들은 중국의 추격을 견제하고 공급망을 다각화하려 한국과의 협력을 강화하고 있다. 동시에 한국 기업들도 향후 글로벌 AI 공급망 재편 과정에서 주도적 위치에 선다면 협상력을 대폭 강화할 수 있게 됐다. 이는 메모리 반도체만으로는 가능하지 않았던 전략적 이득이다.
그러나 이 전략적 성과가 지속되려면 피해야 할 함정들이 있다. 첫째, 특정 기업에 대한 의존을 줄이고 독자적인 AI 역량을 확보해야 한다. 특히 HBM의 공동개발 권한, 2나노 이하 파운드리 공정의 수율 향상, 첨단 패키징의 독자 기술 확보 등에서 실질적 격차를 좁혀야 한다. 첨단 기술 통제가 국제 질서의 주요 이슈로 떠오르는 시대에, '기술 주권' 관점에서 한국만의 AI 인프라와 생태계를 다져야 한다는 의미다. 미국 빅테크와의 협력이 아무리 커도, 국내 AI 인프라 기반이 취약하면 언제든 위기에 직면할 수 있다.
둘째, 현실적인 인프라 제약을 극복해야 한다. SK텔레콤이 추진 중인 2기가와트(GW) 규모의 AI 팩토리는 어마어마한 전력을 소비한다. 이를 공급할 국내 전력 인프라가 충분한지, 반도체 팩토리 같은 주요 에너지 수용시설의 허가 과정이 얼마나 신속하게 진행될 수 있는지가 관건이다. 동시에 AI 인재 부족, 데이터센터 규제, 첨단 인프라 허가 지연 등도 풀어야 할 과제다.
또한 이번 협력이 단순한 '발표용 숫자'에 머물지 않도록 각 기업이 실질적인 실행력을 갖춰야 한다. 계약의 형태도 다양하다. 삼성과 브로드컴은 업무협약(MOU), SK와 엔비디아는 의향서(LOI) 수준의 합의가 이뤄졌다. 아직 본 계약 체결까지는 거리가 있다. 또한 협력 규모에 한국 기업의 구매액이 얼마나 포함됐는지, 각 기업의 실제 매출 기여도가 얼마나 되는지 등 세부 내용은 공개되지 않았다. 과거 국내 반도체 클러스터나 대규모 인프라 발표가 최초 계획의 일부만 실현된 사례들을 감안하면, 선언적 합의가 실제 투자로 얼마나 이어질 것인지도 주시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행사가 갖는 상징성은 크다. 세계 AI 산업을 주도하는 미국의 거물 기업 지도자들이 한국의 총수들과 한 자리에 모여 본격적인 협력의 틀을 짜는 장면 자체가 한국의 위상 변화를 보여준다. 앞으로는 한국이 AI 공급망에서 얼마나 실질적인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가, 그리고 이를 통해 기술 주권까지 확보할 수 있는가가 관건이다.
[글로벌에픽 안재후 CP / anjaehoo@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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