협력 범위는 개발비와 역할 분담, 지적재산권(IP) 배분 등 원칙을 협의하는 단계에서, KAI가 민항기 개발에 착수할 경우 엠브라에르가 기술 전수·인증 지원·프로그램 운영 노하우 등을 제공하기로 합의했다. 이는 KAI가 그간 해온 '민항기 구조물 공급'이라는 협력자 역할에서 벗어나 직접 개발에 나서는 '주체'로 도약하겠다는 선언과 다르지 않다. 이와 맞물려 한화그룹은 KAI 지분을 14.64%까지 높이며 연말까지 15% 돌파를 노리고 있어, 한국 항공우주 산업의 판도가 근본적으로 재편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민항기 개발 동반자 찾다
KAI는 지난 3일 이재명 대통령이 주재한 국가우주위원회에서 차세대 민항기 국제 공동 개발 추진을 제안한 이후, 불과 25일 만에 엠브라에르와의 협력을 구체화했다. 당시 김종출 KAI 사장은 "한국 항공 산업이 글로벌 일류 수준으로 도약하려면 군수 한계를 벗어나야 하며, 중형급 민항기 개발은 브라질 등과 국제공동개발을 추진하면 개발비 부담을 많이 줄일 수 있다"고 건의했다. 이 발언이 얼마나 빠르게 현실화되는지 보여주는 사례다.
이 대통령은 브라질 방문 기간 중 라운드테이블에 참석해 "한국과 브라질은 글로벌 항공 시장을 주도할 항공기 제조 강국이자 공급망 협력에 중요한 파트너로 동반 성장할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이는 단순한 기업 간 협력을 넘어 양국 정부가 전략적으로 후원하는 국가 프로젝트임을 명확히 한 것이다.
엠브라에르는 보잉·에어버스에 이은 지역용 항공기 분야 세계 1위이자 종합 항공기 제조 부문에서도 3~4위권에 위치한 기업으로, 대형수송기 C-390의 제작사이기도 하다. KAI는 2020년부터 C-390 사업에 구조물 공급 업체로 참여해왔기에, 이번 협력은 기존 관계의 연장선 위에서 차원을 높인 것이라 볼 수 있다. 무엇보다 KF-21 체계개발을 성공적으로 진행하며 완제기 설계·개발·인증 경험을 쌓은 KAI의 기술 역량은 엠브라에르와의 협력에서 실질적인 동등성을 확보하는 기반이 된다.
파이 크기가 달라진 시장
민항기 개발에 KAI가 적극 나서는 이유는 명확하다. 시장이 그만큼 크다는 뜻이다. 에어버스는 향후 20년간 42,060대의 신규 항공기에 대한 수요가 있을 것으로 예측했으며, 단일 통로 항공기가 이 수요의 81%를 차지할 것이다. KAI가 노리는 세그먼트인 중소형 항공기가 전체 수요의 대부분을 차지한다는 의미다.
기존 문서에서 제시한 중소형 항공기 3만3920대라는 수치는 에어버스의 최신 전망 기준 단일 통로 항공기 33,920대와 정확히 일치한다. 에어버스가 예상하는 42,060대 신규 항공기 수요 중 단일 통로 항공기는 33,920대로 전체의 81%를 차지한다. 이는 세계 항공 시장의 주류 세그먼트가 KAI가 겨냥하는 바로 그 영역이라는 증거다.
시장의 성장 배경도 견고하다. 에어버스는 글로벌 중산층 14억 명 증가와 도시화 확대에 힘입어 연간 여객 교통량 3.9% 증가를 예상하며, 2045년에는 연간 약 100억 명의 승객에 도달할 것으로 전망했다. 중산층이 늘고 도시화가 진행될수록, 항공 수요는 자동으로 증가한다. KAI가 이 파이에 도전장을 던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높은 벽 앞에서
다만 KAI가 민항기 개발에 성공한다고 해도 넘어야 할 산이 많다. 제약이 현실적이고, 전례도 쓰라리기 때문이다.
우선 재원이다. 중형 민항기 한 기종을 개발하려면 개발비만 약 15조원이 필요하다. 이는 국방부의 연간 예산에 버금가는 규모다. 한국의 기술과 자본만으로는 불가능하기에, KAI와 엠브라에르의 국제 공동 개발이 필수인 이유가 여기다.
인증 절차도 만만치 않다. 민항기는 한 번 하늘에 띄우기 전에 미국 연방항공청(FAA)과 유럽연합항공안전청(EASA) 등 국제 인증 기관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 이 과정에서 수년이 소요되며, 발생하는 비용도 막대하다. 규제와 외교적 변수까지 더해지면, 단순한 '기술 도전'을 넘어 '국정 과제' 수준의 역할이 필요하다.
KAI는 이미 실패의 맛을 본 경험이 있다. 2012년 KAI와 대한항공은 컨소시엄을 꾸려 2조원 규모의 중형 민항기 개발 사업을 추진했으나, 이듬해 사업성 부재와 협력사인 캐나다 봄바디어의 이탈로 중단됐다. 그로부터 14년이 지난 지금, KAI는 과거의 교훈을 안고 더 신중하면서도 더 적극적으로 다시 도전하고 있다.
경쟁 환경도 엄혹하다. 중국의 COMAC은 C919 개발을 성공시켜 이미 인증 단계에 들어갔고, 일본의 Mitsubishi SpaceJet도 막대한 투자에도 불구하고 인증 문제와 자금 부족으로 프로젝트를 중단한 사례가 있다. 이는 개발 능력만으로는 부족하며, 자본력과 글로벌 인증 네트워크, 그리고 정치적 지원이 모두 필요함을 보여준다. KAI가 엠브라에르와의 협력에 매달리는 이유가 바로 여기다.
한화, KAI에 '승부수'
한편 한화그룹의 움직임도 주목할 만하다. 한화그룹이 보유한 KAI 주식은 지난 24일 기준 1427만3300주로 집계됐으며, 지분율은 13.61%에서 14.64%로 1.03%포인트 확대되었다. 2대 주주의 지위를 공고히 하며 15% 돌파를 앞두고 있다.
15%의 숫자가 가진 의미는 크다. 공정거래법상 기업이 상장회사 지분 15% 이상을 취득하면 공정거래위원회에 기업결합을 신고해야 한다. 이는 단순한 투자자의 위치에서 경영권 인수를 노리는 '주도적 주주'로의 전환을 의미한다. 한화시스템은 현재까지 추가 매입 계획 5000억원 중 약 3211억원을 집행했으며, 이후 지분 매입이 지속되면 한화그룹의 KAI 지분율은 조만간 15%를 넘어설 예정이다.
한화가 KAI에 집중하는 이유는 장기적인 전략 때문이다. 한화가 보유한 우주 발사체와 위성, 항공엔진, 항공전자 기술에 KAI의 완제기 역량이 더해지면 우주·항공·방산 사업을 하나의 밸류체인으로 연결할 수 있다. 더 나아가 한화에어로스페이스의 엔진·우주발사체, 한화시스템의 항공전자, KAI의 완제기 기술이 삼각편대를 이루면, 미래의 도시공중이동(UAM)과 전기수직이착륙항공기(eVTOL) 분야까지 아우르는 종합 항공우주 그룹으로의 진화가 가능해진다.
민항기 개발이 가시화될 경우, KAI의 가치는 급상승할 수밖에 없다. 매출은 물론 수익성도 함께 높아지기 때문이다. 글로벌 방산 시장에서도 단일 무기 판매보다 현지 생산과 정비·보수·운영(MRO) 등을 묶은 통합 패키지 수요가 커지는 흐름이 한화의 구상에 힘을 싣고 있다. 민항기 엔진 유지보수, 항공전자 업그레이드, 부품 공급망에서 한화의 계열사들이 수익을 창출할 수 있는 구조가 완성되는 셈이다.
한국 항공산업의 갈림길
이번 협력이 성공으로 귀결된다면, 한국 항공산업의 지형도가 근본적으로 바뀐다. KAI는 군용기와 민항기를 동시에 개발하는 종합 항공 제조사로 거듭나고, 한화는 이를 통해 방산에서 민간 항공 시장으로의 진출 기반을 확보하게 된다. 특히 한화에어로스페이스의 엔진·우주발사체 기술과 한화시스템의 항공전자 역량이 KAI의 완제기 기술과 결합되면, 단순한 항공기 제조를 넘어 우주·항공·방산을 아우르는 통합 생태계가 형성된다. 대한항공도 기체 구매처로서의 수익을 기대할 수 있다.
역으로 실패 시의 대가도 적지 않다. 막대한 초기 투자가 무위로 돌아갈 수 있으며, KAI의 재무 건전성이 악화될 가능성도 제기된다. 국제 인증 절차 중 예상치 못한 변수가 발생할 수도 있다. 한화가 추진하는 15% 이상의 지분 확대 역시 공정거래위원회의 기업결합 심사라는 규제 변수를 안고 있다.
그럼에도 한국 항공산업은 이 도전을 피할 수 없다. 보잉과 에어버스, 그리고 최근 떠오르는 엠브라에르 등이 주도하는 글로벌 시장에서, 한국이 공급자의 위치에만 머무르면 산업의 고도화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2045년이면 거의 100%에 가까운 글로벌 항공기가 최신 세대 기종으로 교체될 것이고, 이 과정에서 가장 큰 성장 수요는 중소형 항공기 시장이 될 것이다.
이번 KAI-엠브라에르 협력이 단순한 MOU로 끝나지 않고 2028년 전후 실질적인 공동개발 사업으로 이어진다면, 한국은 2030년대 중반 Boeing·Airbus·Embraer에 이은 세계 4대 민항기 플레이어로 도약할 수 있는 길을 열게 될 것이다. 한화의 지분 15% 돌파와 함께 한국 항공산업이 군수 중심에서 민간 시장으로 본격적으로 도약하는 역사적 전환점이 될 것이다.
[글로벌에픽 안재후 CP / anjaehoo@naver.com]
<저작권자 ©GLOBALEPIC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