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병철 한국퇴직연금개발원 대표
그날 적립금운용위원회의 핵심 안건은 목표수익률 승인이었다
퇴직연금 담당자인 김 부장(가명)이 돌린 회의 자료에는 정기예금 평균금리와 물가상승률 같은 몇 가지 숫자가 나란히 적혀 있었다. 기존 관행대로라면 위원회는 그 가운데 가장 무난해 보이는 숫자 하나를 골라 승인하면 그만이었다.
이 회사는 해마다 위원회를 열었지만 외부 전문가가 참석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법정 최소적립금 이상을 쌓은 회사에는 외부 전문가 참여가 의무가 아니기 때문이다. 처음 회의에 참석한 나는 어느 숫자에도 선뜻 동의하기 어려웠다.
목표수익률은 퇴직급여에서 거꾸로 계산한다
DB형은 근로자가 퇴직할 때 받을 급여가 법과 퇴직연금규약에 따라 먼저 정해지는 제도다. 운용 성과가 부족하다고 약속한 퇴직급여를 줄일 수는 없다. 부족한 돈은 결국 회사가 채워야 한다.
따라서 적립금운용위원회가 가장 먼저 물어야 할 것은 “어떤 상품이 몇 %의 금리를 주는가”가 아니다. “앞으로 직원들에게 지급할 퇴직급여를 차질 없이 마련하려면 우리 회사 적립금이 매년 얼마만큼 불어나야 하는가”다.
회사의 DB 적립금과 개인의 DC 계좌는 목표수익률을 정하는 방식부터 다르다. DB에서 받을 퇴직급여 수준을 DC 계좌로 스스로 만들어가려면 개인은 자신의 임금상승과 승진, 근속 경로를 고려해야 한다.
반면 회사는 전체 임직원의 임금상승률과 퇴직률, 고임금 직원의 퇴직과 신입사원 채용, 현재 적립수준과 앞으로 낼 부담금을 함께 계산해 DB 적립금의 목표수익률을 정한다. 두 목표수익률이 같은 숫자일 이유가 없다.
그럼에도 원칙은 같다. 금융상품이 아니라 앞으로 지급할 퇴직급여에서 목표를 정해야 한다.
그래서 나는 김 부장에게 물었다. “직원들의 평균 근속연수와 퇴직률은 어느 정도입니까? 앞으로 몇 년 동안 얼마의 퇴직급여가 나가야 합니까? 임금은 얼마나 오르고 있으며, 앞으로 필요한 금액에 비해 지금 쌓아둔 적립금은 충분합니까?”
김 부장이 가져온 기초자료를 분석해보니 이 회사는 예상되는 퇴직 일정과 임금상승을 고려할 때 퇴직급여 재원을 충분히 쌓고 있었다. 단기간에 높은 수익을 얻기 위해 위험을 감수할 이유가 크지 않았다.
그렇다고 적립금을 예금이나 ELB에 방치해도 된다는 뜻은 아니다. 필요한 수익률을 가장 낮은 위험으로 달성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
이 회사가 ⑱편에서 한 증권사의 ELB에 적립금을 집중해 신용위험에 노출됐던 이유는 적립금이 부족해서가 아니었다. 적립금이 얼마를 벌면 되는지 기준을 세우지 않은 채, 사업자가 내민 상품 가운데 금리가 조금 더 높은 것부터 골랐기 때문이었다.
목표수익률을 정하려면 숫자 뒤의 가정을 보아야 한다
회사의 목표수익률을 지급할 퇴직급여에서 구하려면 먼저 미래의 퇴직급여를 추정해야 한다. 직원 수에 평균 퇴직금을 곱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임금이 얼마나 오를지, 직원들이 언제 퇴직할지, 인력구조가 어떻게 달라질지 같은 여러 가정이 필요하다. 이 과정을 연금계리라고 한다.
가정을 지나치게 보수적으로 잡으면 퇴직급여 지급의 안전성은 높아질 수 있지만 회사의 재무 부담도 커질 수 있다. 반대로 지나치게 낙관적으로 잡으면 당장의 부담은 줄어들 수 있지만 훗날 퇴직급여를 지킬 안전판이 약해진다.
회계상 퇴직급여비용과 회사가 실제로 납입하는 금액은 같은 숫자가 아니다. 그러나 계리 가정은 회계상 부채와 손익뿐 아니라 필요한 적립액과 추가 납입 판단에도 영향을 준다. 결국 계리는 단순한 산수가 아니라 회사의 재무건전성과 근로자의 퇴직급여 수급권에 영향을 주는 중요한 경영 판단이다.
따라서 퇴직연금사업자가 계산하고 제시한 계리 결과라 하더라도, 그 가정과 적립수준은 반드시 위원회가 직접 심의해야 한다. 최종 책임은 회사에 남는다.
운용은 맡겨도 책임까지 넘길 수는 없다
⑯편에서 연재를 다시 시작하며 필자는 거버넌스를 ‘목표를 정하고, 실행하고, 결과를 평가해 다시 의사결정에 반영하는 책임의 체계’라고 설명했다. 그 순환의 출발점이 바로 목표수익률과 허용위험한도를 정하는 일이다.
위원회가 “얼마를 벌어야 하는가”와 “얼마의 손실까지 감당할 수 있는가”를 먼저 정해야 이후 적립금 운용과 관련된 전문가들이 그 테두리 안에서 움직일 수 있다. 높은 수익률을 요구하면서 손실은 전혀 허용하지 않겠다는 목표는 실행할 수 없다. 목표수익률과 허용위험한도는 반드시 적립금운용위원회가 직접 심의해 정해야 한다. 그 결정에 따른 최종 급여책임은 회사에 남는다.
물론 그 다음의 실행을 전문가에게 맡길 수 있다. 자산운용 전문가는 시장을 분석하고 포트폴리오를 짜며 상품을 고른다. 제도가 허용하고 권한과 책임이 분명하다면 구체적인 운용 판단도 전문기관에 위임할 수 있다.
DB형 퇴직연금의 역사가 긴 영국은 이 역할을 분명하게 나눈다. 수탁자위원회가 제도의 목표와 전체 투자전략, 위험 수준을 정하고 투자컨설턴트와 계리사가 판단을 돕는다. 일상적인 투자판단은 전문 운용사에 맡길 수 있지만 전체 전략을 정하고 운용사를 감독할 책임은 위원회에 남는다.
전문가에게 맡긴다는 것은 위원회가 손을 떼는 일이 아니다. 위원회가 심의할 일과 전문가가 실행할 일을 분명하게 나누는 일이다.
IPS의 첫 장에 있어야 할 다섯 질문
이 역할 구분을 문서로 남긴 것이 적립금운용계획서, 즉 IPS다. IPS에는 운용 목적과 방법, 자산배분, 성과평가 등 여러 내용이 담겨야 한다. 그 첫 장에는 적어도 다음 다섯 질문에 대한 답이 있어야 한다.
앞으로 몇 년 동안 언제, 얼마의 퇴직급여를 지급해야 하는가?
임금상승률·퇴직률·인력구조에 어떤 계리 가정을 사용했으며, 그 근거는 무엇인가?
현재 적립수준과 앞으로 회사가 납입할 금액은 적정한가?
근로자와의 약속을 지키는 데 필요한 목표수익률은 얼마인가?
회사가 감당할 허용위험한도는 어디까지이며, 한도를 넘으면 무엇을 할 것인가?
계리사와 투자전문가, 퇴직연금사업자는 이 한 장을 만드는 일을 도울 수 있다. 그러나 위원회는 이를 직접 심의해야 하며, 최종 책임은 회사에 남는다.
자산운용과 복잡한 계리 계산은 전문가에게 맡길 수 있다. 그러나 우리 회사가 얼마를 벌고 얼마의 위험을 감당할지 결정하는 일, 그리고 근로자와의 약속을 지킬 책임은 다른 누구에게도 떠넘길 수 없다.
다음 편에서는 회사가 세운 목표와 위험의 테두리 안에서 퇴직연금사업자가 어떤 전문성과 해결책을 연결해야 하는지 살펴본다.
[글로벌에픽 성기환 CP / keehwan.sung@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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