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형 전투기 KF-21 보라매 시제기가 시험비행을 하고 있다. 정부는 2041년까지 유인전투기에 국산 엔진을 장착하는 것을 목표로 첨단항공엔진 개발을 추진 중이다. 사진=KAI/자료사진
단순한 물량 발주를 넘어, 항공 엔진의 완전한 국산화를 뒷받침할 산업 생태계를 만들겠다는 의지다. 글로벌 공급망 재편과 기술 통제 속에서 엔진 자립은 더 이상 선택이 아닌 필수가 됐다. 그러나 단결정 터빈 블레이드, 열차폐 코팅(TBC), 초정밀 필름 쿨링, 수천 시간 내구시험 인프라 등 핵심 난제는 여전하다. 한화의 이번 움직임은 그 난제들을 협력사 생태계 전체를 들어올려 함께 풀어가겠다는 신호로 읽힌다.
49개 협력사와 맺은 '기술 동맹'
한화에어로스페이스는 8일 경남 창원컨벤션센터에서 항공 엔진 제조 협력사 49개 회사 및 유관 기관 100여명과 상생 협력 업무협약(MOU)을 체결했다고 9일 밝혔다.
실제로 한화는 올해 2월에도 항공 엔진 소재·부품 협력사들과 MOU를 맺으며 공급망 기반을 차근차근 넓혀왔다. 지난 10년간 항공 엔진 분야에 약 2조 원을 투자해왔으며, 향후 10년간 최소 2조 원 이상을 추가로 투자할 계획이라는 보도까지 나오면서, 장기 투자 의지를 뒷받침하고 있다.
필요하지만 어려운 길
글로벌 항공 엔진 시장은 높은 진입 장벽으로 보호받고 있다. 미국의 제너럴 일렉트릭(GE), 영국의 롤스로이스, 프랑스의 사프란 등 소수 선진국 기업들이 기술과 시장을 독점하다시피 한다. 한국은 왜 이 높은 벽을 넘어야 할까.
기술 통제가 강화되면서다. 글로벌 공급망의 재편 속에서 핵심 부품 수입이 불확실해지는 상황 자체가 위험요소다. 동시에 한국의 전투기·무인기 전력 확대와 수출 경쟁력 확보라는 전략적 필요성도 커졌다. 엔진 없이는 비행기도 없고, 비행기 없이는 항공 산업도 없다는 단순한 논리가 아니라, 국가 차원의 자주권 문제로 떠올랐다는 뜻이다.
그럼에도 난제는 산더미다. 엔진은 완성기보다 기술 난도가 훨씬 높다. 고온 환경에서 견뎌야 하는 초내열 소재, 정밀하게 자동차 엔진을 넘어 항공용으로 냉각하는 기술, 미세한 공차를 유지하는 가공 기술, 수천 시간 시운전을 통과해야 하는 시험 인프라 등 이 모든 것을 갖춰야 한다. 단일 기업의 힘만으로는 불가능하다. 여기서 협력사 네트워크의 역할이 절대적이 된다.
정부, 이미 길을 닦고 있다
방위사업청과 국방과학연구소(ADD)는 더욱 야심차다. 2030년대 중반까지 국산 전투기용 1만5,000lbf급 터보팬 엔진 개발을 목표로 개념연구를 계속해왔다. 이는 실현 불가능한 꿈이 아니다. 현실 프로젝트가 단계적으로 진행 중이기 때문이다.
5,500lbf급 장수명 항공엔진 시제가 개발되고 있고, 1만lbf급 무인기용 엔진도 단계별로 진행되고 있다. 국산화가 '개념'에서 '실물 개발 단계'로 접어들었다는 의미다. 한화가 지금 협력사 생태계를 다지려는 것도 이 정부 로드맵 위에 앉아 있다.
글로벌 선진사들을 보면 답은 더 명확하다. 제너럴 일렉트릭(GE)과 사프란(Safran)은 수십 년에 걸쳐 Tier 1부터 Tier 3 협력사까지 단계적으로 키우며 생태계를 구축했다. 한국은 압축된 시간 안에 이 과정을 따라잡아야 하는 상황이다. 2026년이 분수령인 까닭이 여기 있다.
한화의 전략: 병목을 동시에 끌어올리다
한화가 이번 MOU에서 집중하는 부분이 명확하다. 협력사 맞춤형 교육, R&D 비용 지원, 인프라 개선 같은 직접 투자다. 이는 항공 엔진의 병목을 '개별 협력사'로 진단했다는 뜻이다.
소재 기술이 부족한 회사에는 소재 교육과 연구비를 준다. 정밀 가공 능력이 떨어지는 회사에는 기술 지원을 한다. 시험 인프라가 없는 회사는 한화의 시설을 쓸 수 있게 한다. 흩어져 있던 협력사들을 하나의 공급망으로 묶어내려는 전략이다.
한화가 올해 2월 소재·부품 협력사와 이미 MOU를 맺었고, 9일 제조 협력사와 또 다시 손을 맞잡은 이유도 여기 있다. 공급망의 각 단계마다 핵심 협력사들을 단계적으로 강화하되, 전체를 연결하는 방식이다.

한화에어로스페이스 관계자가 국내 개발 중인 1400마력급 터보프롭 엔진 시제품을 점검하고 있다. 정부는 무인기용 엔진에서 축적한 기술을 바탕으로 2041년까지 유인전투기에 국산 엔진을 장착한다는 목표를 세웠다. 사진=방위사업청 제공
이미지 확대보기관전포인트: 가능하나, 속도가 문제다
항공 엔진 국산화는 기술적으로 불가능하지 않다. 다만 ‘언제’라는 시간의 문제다.
첫째, 초기 단계 엔진(무인기용 5,500~1만lbf급)부터 단계별 성과를 내야 전투기급 엔진으로의 신뢰성이 쌓인다. 단번에 고성능 엔진을 개발할 수 없다는 뜻이다.
둘째, 소재와 정밀가공, 고온부품, 냉각설계, 내구 시험 능력이라는 핵심 난제가 여전하다. 협력사들이 이 네 가지를 동시에 확보하는 속도가 국산화의 성패를 좌우한다.
셋째, 시험과 인증 인프라가 가장 큰 병목이다. 엔진 인증은 개발보다 더 오래 걸리는 영역이다. 개발한 엔진이 실제로 작동하는지, 안전한지, 수천 시간의 내구 조건을 견디는지를 검증하는 데 5~7년이 소요된다. 정부와 국방과학연구소의 시험 인프라 확대가 병렬로 진행돼야 한다. 한화의 협력사 지원도 결국 이 인프라 축약 시간에 따라 빠르기가 결정된다.
넷째, 협력사 수의 확대가 양산성과 원가 경쟁력으로 이어져야 수출도 가능해진다. 1~2개 회사만 엔진을 만들 수 있다면 국산화라고 할 수 없다. GE처럼 수십 개 협력사가 동시에 움직일 수 있는 체계가 필수다.
생태계, 그것이 승리의 조건
항공 엔진 국산화는 기술적으로 가능하다. 정부 예산도 있고, 한화라는 주도 기업도 있다. 그럼에도 불확실성이 남아 있는 이유는 하나다. 협력사 전체의 역량을 짧은 시간 안에 끌어올릴 수 있는가다.
한화의 이번 '기술 동맹'이 주목받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단순히 물량을 맡기는 주문사가 아니라, 협력사들의 기술 수준 자체를 높이겠다고 나섰다. 맞춤형 교육, R&D 비용 지원, 인프라 공유 등은 49개 회사가 동시에 성장할 수 있도록 설계됐다.
정부는 2030년대 중반까지 1만5,000lbf급 전투기 엔진 개발을 목표로 로드맵을 그렸다. 한화는 지금부터 기반을 다지고 있다. 부족한 기술은 교육으로, 돈은 투자로, 인프라는 공유로 해결한다. 그래서 이번 프로젝트를 '엔진 국산화'가 아니라 '엔진 생태계 국산화'라고 부르는 것이다.
구체적인 마일스톤은 다음과 같다. 2026~2027년 무인기용 초기 엔진 실증, 2030년대 초반 전투기급 엔진 완성, 2035년까지 인증 획득, 2040년대 초 수출 모델 출시. 이 모든 단계에서 협력사들의 역량이 시험대에 오른다.
성공의 열쇠는 결국 속도와 견고함이다. 정부 R&D, 한화의 투자, 협력사들의 실행이 하나의 리듬으로 맞춰질 때, 비로소 '진짜 국산' 항공 엔진이 현실이 될 것이다.
[글로벌에픽 안재후 CP / anjaehoo@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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