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원적 경쟁력 회복"... 냉철한 진단과 과감한 투자
반도체 시장은 글로벌 경기 둔화와 수요 위축, 과잉 재고 등으로 밑바닥을 찍었다가 2023년 하반기 AI(인공지능) 붐에 힘입어 다시 활기를 찾기 시작했다. 특히 생성형 AI의 급부상으로 데이터센터용 고성능 메모리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했고, 이는 시장의 새로운 성장 동력으로 부상했다. 그러나 삼성전자 DS 사업부는 반도체 업황 회복에도 크게 웃지 못했다. AI 반도체 초기 대응에 한 발 늦은 탓에 시장을 이끄는 HBM(고대역폭 메모리) 분야의 핵심 고객사 미국 엔비디아와의 거래 주도권을 놓쳤고, 시스템반도체는 잇따른 적자로 시장 1위 대만 TSMC와의 격차가 더욱 벌어졌다.
특히 경쟁사인 SK하이닉스가 HBM 시장에서 선점효과를 누리며 엔비디아의 주요 공급사로 자리매김한 것은 삼성전자에게 큰 위기 요인으로 작용했다. 이러한 열세 속에서 삼성전자는 메모리 반도체 시장에서 수십 년간 이어온 리더십이 위협받는 상황까지 맞게 되었다.
이러한 진단에 따라 전 부회장은 R&D와 시설투자를 대폭 확대했다. 삼성전자의 2025년 1분기 R&D 비용은 9조348억원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15.5% 증가했으며, 분기 기준 역대 최대 규모다. 특히 반도체 부문에 대한 투자 집중도가 눈에 띈다. 총 시설투자액 11조9983억원 가운데 DS부문에만 91.2%인 10조9480억원이 투입됐다. DS부문이 총 시설투자액의 90% 이상을 차지한 것은 삼성전자 역사상 전례가 없는 일이다. 여기에는 반도체 사업이 향후 삼성전자의 미래를 좌우할 '생명줄'이라는 경영진의 인식이 반영된 것으로 풀이된다.
이러한 과감한 투자 확대 전략은 단기적인 수익성 악화를 감수하더라도 장기적인 경쟁력 확보에 초점을 맞춘 것으로, 이는 전 부회장이 반도체 개발 전문가로서 추진할 수 있는 과감한 의사결정이었다는 평가다.

지난해 11월 삼성전자 기흥캠퍼스에서 열린 NRD-K 설비반입식에서 전영현 부회장이 기념사를 하는 모습(사진=삼성전자)
조직 문화 혁신과 소통 강화에 나서다
전영현 부회장은 반도체 개발실 출신으로서 내부 문제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는 기술력 회복의 열쇠가 조직문화에 있다고 보고, 조직 개편과 소통 강화에 주력했다. 특히 급변하는 반도체 산업 환경에서 기존의 경직된 조직 문화와 의사결정 구조가 혁신을 저해하는 요인으로 작용한다고 판단하고 과감한 조직 혁신을 단행했다.
더불어 첨단 패키징 기술의 중요성이 부각됨에 따라 관련 연구 인력도 대폭 보강했다. 첨단 패키징은 여러 개의 칩을 하나로 묶는 기술로, AI 반도체의 성능 향상에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삼성전자는 이 분야의 연구 인력을 전년 대비 40% 이상 증원하며 경쟁력 강화에 나섰다.
임직원 간 수직적이고 폐쇄적인 소통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새로운 반도체 조직 문화인 'C.O.R.E'도 도입했다. 이는 문제 해결과 조직 간 시너지를 위해 소통하고(Communicate), 직급·직책과 무관한 치열한 토론으로 결론을 도출하며(Openly Discuss), 문제를 솔직하게 드러내고(Reveal), 데이터를 토대로 의사를 결정하고 철저하게 실행(Execute)한다는 의미다. 이는 삼성전자의 전통적인 군대식 조직 문화에서 벗어나 수평적이고 개방적인 소통 문화를 정착시키기 위한 시도로 평가받고 있다.
이를 실천하기 위해 지난해 11월에는 다섯 차례에 걸친 '릴레이 임원 토론회'도 개최했다. 이 자리에서는 각 사업부의 임원들이 모여 현안을 공유하고 해결책을 모색하는 시간을 가졌으며, 특히 직급에 상관없이 자유롭게 의견을 개진할 수 있는 분위기를 조성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한 참석자는 "예전에는 상사의 의견에 반대하기 어려웠는데, 이제는 데이터와 논리만 있다면 누구나 자신의 의견을 말할 수 있는 문화가 형성되고 있다"고 전했다.
더불어 전 부회장은 보고체계도 대폭 간소화했다. 현장에서 파트장-PL(프로젝트리더)·그룹장-상무-부사장 등을 거치던 다단계 실행 체계를 축소하고, 상무급에 중간관리자 역할을 맡겼다. 이는 '보고를 위한 보고'로 실행력이 떨어진다는 내부 불만을 해소하고, 경영의 중심축을 현장으로 옮기겠다는 취지로 해석된다. 특히 현장의 목소리가 경영진에게 직접 전달될 수 있도록 '핫라인'을 구축하고, 중요한 기술적 이슈에 대해서는 현장 엔지니어들이 직접 부회장에게 보고할 수 있는 체계를 마련했다.
이러한 조직 문화 혁신은 단기간에 성과를 내기는 어렵지만, 장기적으로 삼성전자의 기술 경쟁력을 회복하는 데 중요한 기반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하반기부터 가시적 성과 기대 ... 과제도 산적
그러나 '전영현 매직'은 아직 가시적인 성과로 나타나지 않고 있다. DS부문의 올해 1분기 실적은 매출 25조1000억원, 영업이익 1조1000억원으로 직전 분기 대비 각각 16.61%, 62.07% 감소했다. 지난해 1분기와 비교하면 매출은 8.47% 증가했지만 영업이익은 42.41% 줄었다. 이는 시장의 기대에 못 미치는 성적표로, 투자자들의 우려를 자아내기도 했다.
특히 영업이익은 2024년 2분기 6조5000억원에서 3분기 3조9000억원, 4분기 2조9000억원으로 3개 분기 연속 하락세를 보이고 있다. 이는 실적 반등의 열쇠를 쥐고 있는 HBM이 현재 주력 제품인 HBM3E 8단·12단 제품 모두 엔비디아에 납품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HBM 시장은 연간 20조원 규모로 성장했고, 업계에서는 2027년까지 연평균 44%의 고성장을 이어갈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이처럼 급성장하는 시장에서 주도권을 확보하지 못한 것은 삼성전자에게 큰 아쉬움으로 남는다.
시스템반도체도 큰 고민거리다. 2019년 '시스템반도체 비전 2030'을 발표하고 2030년까지 글로벌 1위를 목표로 했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다. 업계에서는 삼성전자가 파운드리와 시스템LSI사업부에서 지난해 약 5조원대의 영업손실을 냈을 것으로 추정한다. 특히 파운드리 사업은 TSMC와의 격차가 더욱 벌어져, 지난해 4분기 기준 시장점유율이 TSMC 67.1%, 삼성전자 8.1%로 집계됐다. 이는 2019년 TSMC 52.7%, 삼성전자 18.1%와 비교해볼 때 경쟁력이 현저히 약화된 것을 보여준다.
삼성전자의 최신 3나노 공정은 수율 문제로 어려움을 겪고 있으며, 주요 고객사인 퀄컴도 최신 모바일 AP의 대부분을 TSMC에 맡기고 있는 실정이다. 이는 첨단 공정 기술력에서 TSMC에 밀리고 있음을 방증한다. 한 반도체 전문가는 "파운드리 사업에서 경쟁력을 회복하려면 최소 2~3년의 시간이 필요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러한 어려움 속에서 전영현 부회장은 올해 3월 주주총회에서 "빠르면 2분기, 늦으면 하반기부터 HBM3E 12단 제품이 시장에서 주도적 역할을 할 것"이라며 "HBM4와 커스텀 HBM 등 신시장에서는 과오를 되풀이하지 않도록 차질 없이 개발 및 양산을 진행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이는 HBM 시장에서의 열세를 만회하겠다는 강한 의지를 드러낸 것으로 해석된다.
실제로 삼성전자는 올 하반기를 반등의 시점으로 보고 있다. HBM3E 개선품 샘플 공급을 마치고 오는 2분기부터 HBM3E가 전체 매출에 기여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으며, HBM4는 오는 하반기 양산을 목표로 개발을 진행 중이다. 특히 HBM4는 성능과 전력 효율성 측면에서 기존 제품 대비 30% 이상 향상된 것으로 알려져, 시장에서 좋은 반응을 얻을 것으로 기대된다. 또한 3D 적층 기술에서도 혁신을 이루어 100단 이상의 초고층 HBM 개발에 성공했다는 소식도 전해지고 있다.
파운드리 사업도 올 상반기 3나노, 하반기에는 2나노 양산에 들어갈 예정이며, 특히 하반기 퀄컴의 최신형 모바일 AP '2세대 스냅드래곤 8 엘리트'를 소량 양산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삼성전자는 3나노 공정의 수율을 70% 이상으로 끌어올리는 데 성공했으며, 현재는 2나노 GAA(Gate-All-Around) 공정 기술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2나노 공정은 기존 공정 대비 성능은 12%, 전력 효율은 30% 개선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삼성전자의 메모리·파운드리 팹이 위치한 평택 캠퍼스(사진=삼성전자)
넘어야 할 벽: 책임 회피 문화와 과중한 업무
그러나 여전히 넘어야 할 산이 많다. 업계에서는 삼성전자의 '책임 회피 문화'를 여전히 큰 한계점으로 지적한다. 한 관계자는 "삼성전자가 내부적으로 위기감을 인지하고는 있으나, 비교적 큰 규모의 기술 및 공정 변화에 대해서는 여전히 망설이고 있는 상황"이라며 "소위 '총대'를 메고 과감한 시도를 하려는 문화가 없다면 삼성전자가 맞이한 지금의 위기 상황이 지속될 것"이라고 전했다.
이러한 문화적 한계는 단기간에 개선되기 어려운 문제로, 전 부회장이 추진하는 C.O.R.E 문화가 정착되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특히 중간 관리자층의 변화 저항이 크다는 지적도 있다. 오랜 기간 형성된 조직 문화와 업무 방식을 바꾸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전영현 부회장에게 '1인 4역'의 과중한 업무가 몰린 점도 우려 요인이다. 그는 현재 대표이사 부회장, DS부문장, 메모리사업부장, 삼성종합기술원(SAIT) 원장 등 최소 4가지 직책을 겸하고 있다. '전영현 사단'이라 불리는 핵심 경영진들이 보좌하고 있지만, 새로운 메모리사업부장 선임이 필요하다는 목소리도 적지 않다. 특히 메모리사업은 전사적으로 가장 중요한 사업부문으로, 전략적 의사결정과 일상적인 운영을 분리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 제기되고 있다.
이와 관련해 업계 관계자는 "전 부회장이 아무리 뛰어난 역량을 갖추고 있더라도 이렇게 많은 직책을 수행하는 것은 분명한 한계가 있다"며 "그의 비전과 전략을 효과적으로 실행할 수 있는 추가적인 리더십 구조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특히 기술 개발과 생산, 마케팅 등 다양한 영역에서 전문성을 갖춘 리더들이 더 많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많다.
또 다른 과제는 글로벌 인재 확보다. 경쟁사인 TSMC와 SK하이닉스는 물론, 인텔과 마이크론 등 글로벌 기업들은 최근 몇 년간 적극적인 인재 스카우트에 나서고 있다. 특히 첨단 반도체 개발에 필요한 핵심 인재를 확보하기 위한 경쟁이 치열한 상황이다. 삼성전자도 해외 인재 영입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지만, 아직은 충분한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다는 평가다.
산업 생태계 구축과 정부 지원의 필요성
삼성전자의 반도체 경쟁력 회복은 기업 자체의 노력만으로는 어렵다는 지적도 있다. 반도체 산업은 소재, 부품, 장비 등 다양한 분야의 협력이 필요한 산업으로, 국내 반도체 생태계 전반의 역량 강화가 필요하다. 특히 첨단 장비와 소재 분야에서 국내 기업들의 기술력이 아직 글로벌 수준에 미치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다.
이에 전영현 부회장은 국내 반도체 생태계 강화를 위한 다양한 프로그램을 추진하고 있다. 중소 장비·소재 기업들과의 공동 연구개발을 확대하고, 인력 교류와 기술 지원을 강화하는 방안을 모색 중이다. 또한 대학과의 산학협력도 강화해 우수 인재 양성에도 투자를 늘리고 있다.
정부 차원의 지원도 중요한 요소다. 미국, 유럽, 일본, 중국 등 주요국들은 자국 반도체 산업 육성을 위해 막대한 지원책을 내놓고 있다. 미국은 '반도체 과학법'을 통해 520억 달러의 지원을 약속했고, 유럽연합(EU)도 '칩 법'을 통해 430억 유로의 투자 계획을 발표했다. 한국 정부도 K-칩스 법 등을 통해 반도체 산업 지원에 나서고 있지만, 글로벌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해서는 더욱 과감한 지원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높다.
상명대학교 시스템반도체공학과 이종환 교수는 "전 부회장 취임 1년이 준비기간이었다면 올해 하반기에는 반드시 삼성전자 반도체에 희망을 볼 수 있는 유의미한 성과를 보여줘야 한다"라며 "특히 HBM에서 경쟁력 있는 결과가 나오지 않는다면 삼성전자 메모리 사업은 상당히 어려워질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는 또한 "반도체 산업은 국가 경제의 핵심 동력이자 안보 차원의 전략 산업으로 부상하고 있다"며 "삼성전자의 성공은 단순한 기업의 성공을 넘어 국가 경쟁력과 직결되는 문제"라고 강조했다.

삼성전자가 개발한 36GB(기가바이트) 12단 HBM3E(사진=삼성전자)
'긴 여정'… 성공적인 완주를 위한 과제
결국 전영현 부회장의 진단대로 반도체 부문의 '근원적 경쟁력 회복'은 단기간에 이루어질 수 없는 긴 여정이다. 하지만 지난 1년간 조직 문화 개선과 투자 확대, 기술력 강화 등 다양한 노력을 기울인 만큼, 올해 하반기부터는 그 성과가 조금씩 드러날 것으로 기대를 모으고 있다. 삼성전자가 반도체 시장의 '왕좌'를 되찾을 수 있을지, 전영현 체제 2년 차의 행보가 주목된다.
반도체 업계 전문가들은 향후 1~2년이 삼성전자 반도체 사업의 운명을 좌우할 '골든타임'이 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AI 시대의 도래로 반도체 산업의 패러다임은 급격히 변화하고 있으며, 이 변화의 물결을 어떻게 타느냐에 따라 미래의 승자가 결정될 것이다. 전영현 부회장이 이끄는 삼성전자 반도체 부문이 위기를 기회로 전환하고 글로벌 리더십을 회복할 수 있을지, 업계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이 과정에서 성공적인 전환을 위해서는 △조직 문화의 혁신과 소통 강화 △HBM을 비롯한 첨단 메모리 기술 확보 △파운드리 경쟁력 회복 △글로벌 인재 확보 △산업 생태계 강화 등 여러 과제를 동시에 해결해 나가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 빠르게 변화하는 시장 환경에 민첩하게 대응하는 조직의 유연성이 필요한 시점이다.
전영현 부회장은 취임 1주년을 맞아 "지난 1년은 우리가 가진 문제점을 직시하고 근본적인 해결책을 찾아가는 시간이었다"며 "앞으로는 그동안의 노력이 가시적인 성과로 이어질 수 있도록 모든 역량을 집중하겠다"고 밝혔다. 삼성 반도체의 재도약을 위한 '긴 여정'이 성공적으로 완주될 수 있을지, 앞으로의 행보가 주목된다.
[글로벌에픽 안재후 CP / anjaehoo@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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