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승용 경영학 박사(연금금융 전공). 삼성생명보험과 KB국민은행에서 오랫동안 자산운용을 담당했다. 현재 경희대에서 '재무관리론'을 강의하고 있으며, 학교법인 서울디지털대학교 감사로 있다.
DB에서 DC로, 150년 실험의 결과
미국 연금제도는 1875년 아메리칸 익스프레스에서 시작됐다. 당시는 확정급여형(DB) 중심이었다. 회사가 근로자의 노후를 평생 책임지는 구조였다. 이 연금은 2차 대전 후 중산층 성장의 든든한 버팀목 역할을 했다.
그러나 1970년대 고령화와 경제 변화가 몰아치면서 기업들은 연금 부담을 감당하기 어려워졌다. 해답은 1978년 등장한 401(k)였다. 이때부터 확정기여형(DC)으로의 전환이 시작됐다. 기업은 일정액만 내고, 나머지는 개인이 알아서 투자하는 방식이다.
현재 미국에서 '연금 백만장자'는 90만 명에 이른다. 언론은 '100만 달러 클럽'이라며 성공 신화를 만들어냈다. 하지만 이들은 전체 근로자의 2~3%에 불과하다. 나머지 97%는 어떨까?
401(k) 계좌 평균 잔고는 13만4천 달러다. 60대 이상도 23만9천 달러 수준이다. 미국 물가와 의료비를 고려하면 넉넉하지 않은 금액이다. 베이비부머 세대의 58%, X세대의 56%만이 퇴직연금 계좌를 보유하고 있다. 밀레니얼 세대는 절반도 안 된다.
더 심각한 문제는 투자 지식의 부족이다. 2001년 엔론 사태가 대표적 사례다. 엔론 직원들은 DC 플랜 자산의 과반을 자사주에 '몰빵'했다. 회사가 무너지자 2만5천 명이 직장과 연금을 동시에 잃었다. 연금이 개인 책임으로 넘어갈 때의 위험성을 적나라하게 보여준 사건이다.
한국에 던지는 교훈
미국의 연금 백만장자 현상은 양면의 교훈을 준다. 개인의 적극적 참여와 장기 투자가 만들어낸 성과는 분명 의미가 있다. 하지만 그 이면의 불평등과 사각지대도 간과할 수 없다.
투자 교육 강화, 사각지대 해소, 공정한 접근 기회 제공이 핵심이다. 화려한 성공 신화 뒤에 가려진 다수의 현실을 외면한다면, 연금 백만장자는 축복이 아닌 또 다른 불평등의 상징이 될 뿐이다.
연금제도는 개인의 투자 실력을 겨루는 경기장이 아니다. 모든 국민이 존엄한 노후를 보장받을 수 있는 사회적 안전망이어야 한다. 미국 연금 백만장자의 탄생이 우리에게 던지는 진짜 질문은 바로 이것이다.
[글로벌에픽 지승용 연금 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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