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병철 한국퇴직연금개발원 대표.
1997년 겨울, 대한민국은 IMF 외환위기라는 거대한 쓰나미에 휩쓸렸다. 수많은 기업들이 한순간에 문을 닫았고, 하루아침에 직장을 잃은 사람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25년 동안 한 회사에 몸 바쳐 일했던 김 부장도 그중 한 명이었다.
그래도 김 부장에게는 마지막 희망이 있었다. 평생을 바쳐 쌓아온 퇴직금 2억 원. 이것만 있으면 당장의 위기는 넘길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희망은 곧 절망으로 바뀌었다. 회사 파산과 함께 김 부장의 퇴직금도 휴지 조각이 되어버린 것이다.
당시만 해도 퇴직금은 근로자의 마지막 희망이었지만, 회사의 재무 상태에 따라 그 운명이 좌우되는 불안한 존재였다. 회사가 건재하면 받을 수 있지만, 회사가 망하면 함께 사라지는 돈. 이것이 퇴직금의 민낯이었다.
이러한 비극적인 현실을 막기 위해 2005년, 대한민국에 퇴직연금 제도가 도입되었다. 제도 도입의 가장 중요한 목적은 명확했다. '회사가 망하더라도 근로자의 퇴직금은 안전하게 지키자'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회사가 근로자의 퇴직금을 직접 관리하는 대신, 법적으로 분리된 금융기관에 퇴직연금을 따로 적립하도록 했다. 회사와 별개로 독립된 계좌에 보관되니, 회사가 부도가 나더라도 근로자의 퇴직금은 안전하게 지킬 수 있게 된 것이다.
성공적인 출발, 그러나 여전히 남은 과제
제도의 도입은 성공적이었다. 삼성, 현대 같은 대기업이나 재무구조가 탄탄한 우량기업들은 빠르게 이 제도를 받아들였다. 퇴직연금 제도를 도입한 회사의 근로자들은 이제 회사 부도 걱정 없이 퇴직금을 안전하게 지킬 수 있게 되었다.
그 결과 여전히 퇴직금을 받지 못하는 안타까운 사례가 계속해서 발생하고 있다. 이로 인해 '퇴직연금 의무화'는 정부의 주요 정책과제로 계속해서 논의되고 있다.
이렇게 퇴직연금 제도는 '퇴직급여를 안전하게 지키는' 첫 번째 목표를 향해 시작되었고, 그 길을 걸어가고 있다. 제도 도입 20년이 지난 지금, 많은 근로자들이 회사 부도 걱정 없이 퇴직금을 지킬 수 있게 되었다는 점에서 분명한 성과를 거두었다.
하지만 이제 우리는 더 큰 질문에 직면하게 된다. 퇴직연금은 단순히 '퇴직금을 안전하게 보관하는 금고'를 넘어, 진정한 노후 안전장치가 될 수 있을까? 이론적으로 퇴직연금은 노후 생활을 위해 만들어진 제도라고 하는데, 우리나라 근로자들의 노후를 실질적으로 보장하는 든든한 버팀목이 될 수는 없는 것일까?
김 부장의 비극을 막기 위해 시작된 퇴직연금 제도. 이제 그 제도가 단순히 '돈을 지키는' 수준을 넘어, '노후를 지키는' 진정한 안전망으로 진화할 수 있을지, 우리 사회가 함께 고민해야 할 시점이다. 그래서 20년전의 퇴직연금을 도입할 때 시나리오를 앞으로 10년 후에는 다음과 같이 바뀌어 있어야 한다.
김부장은 경제위기로 회사가 문을 닫기도 했고, 여러 번 직장을 옮겨 다녔지만 30년간 꾸준하게 일했기에 김부장은 여전히 행복하다. 최저임금을 받으며 시작한 직장생활 동안 김부장은 퇴직연금을 꾸준하게 적립하였기 때문이다. 이제 최소 20년간 김부장은 그 동안 받았던 월급의 평균으로 75% 정도를 퇴직연금으로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국민연금까지 더 하면 더더욱 즐겁기만 하다.
[김병철 한국퇴직연금개발원 대표 / wow@globalepi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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