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진제공=제이앤엠엔터테인먼트(J&M Entertainment)
스스로를 용감한 개척자라 소개하는 제이앤엠엔터 이지호 대표, 디지털 음원유통사와 음원기획사를 운영하며 인디 음악 시장의 발전에 기여하고, 동시에 학업적, 아티스트적 목표도 놓지 않는 열정적인 삶을 살고 있습니다. 오늘, 그의 솔직하고 담대한 인생이야기를 들어보는 시간을 가져보았습니다.
[유년시절과 꿈의 씨앗]
Q. 어린시절 이지호씨에게 가장 큰 영향을 주었던 것은 무엇이었나요? 어떤 꿈을 꾸셨는지 궁금합니다.
A. 저는 어린시절부터 방송이나 음악 등 미디어에 대한 관심이 많았던 것 같아요. 그때부터 막연하게 아티스트가 되는 제 모습을 상상하곤 했습니다. 우선 워낙에 집안 분위기에서부터 부모님이 항상 음악과 영상미디어를 사랑하고 즐기셨고 그래서 자연스럽게 저 또한 영향을 받게 된 것 같은데, 집에 돌아오면 아빠가 항상 7080 포크 음악, 팝송, 클래식 들을 아주 큰소리로 틀어 놓으셨죠. 그 덕에 제 일상도 음악과 가까워질 수밖에 없었어요. 지금 저의 삶의 큰 방향을 잡아주신 분으로 엄마를 빼놓을 수가 없는데요. 엄마는 감성이 굉장히 풍부하신 분이세요. 노래를 부르거나 예술미디어를 접하는 것을 정말 사랑하셨죠. 평소에 각종 드라마와 영화를 굉장히 즐겨 보셨어요. 보통 그냥 스치듯 보는 정도가 아니라 직접 그 내용과 메시지에 깊이 공감하고, 영화 혹은 드라마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정말 진정성 있게 느끼고, 저와 동생에게 그 내면의 핵심을 이해할수 있도록 경험하게 해주셨어요. 이런 환경에서 영향을 받고 교육을 받다 보니 예술이라는 것에 자연스럽게 가까워지게 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이때 많은 드라마를 봤지만 지금도 제가 정말 좋아하는 이민기선배님, 유진선배님, 류진선배님이 출연하셨던 MBC 드라마 진짜진짜 좋아해 라는 드라마에서, 본격적으로 제가 가수의 꿈을 키우게 된 그 시작이 될 수 있었던 마현권 선생님의 “눈물이 하는 말” 이라는 노래가 아직도 잊혀지지가 않는데요. 저는 이렇게 7080 음악들과 드라마, OST, 팝 음악들을 통해 제 안에 있던 아티스트의 꿈이 시작되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지금 드는 생각이지만, 집안 분위기가 그래도 와 닿지 않는 사람들도 있기 마련인데, 이런 걸 보면 저는 제 안에 정말 뜨거운 예술인의 피가 흐르는 것 같아요.
[음악, 삶의 멜로디가 되다]
Q. 어릴적 시작된 꿈이 대학을 가기까지 그 과정이 쉽지는 않았을 것 같아요. 어떤 시간들을 보내오셨는지요?
A. 천운이게도 꿈을 쉽게 찾았지만, 현실에 벽에 부딪히는 시간이 오래 이어졌어요. 부모님이 어려운 길보다는 안정적인 길을 가길 원하시기도 했고, 중요한 건 일단 제가 활발하고 적극적인 성격이 아니었기 때문에 어릴 적에는 제 안의 표현하고자 하는 욕망을 쉽게 내보일 자신이 없었고, 용기가 없었어요. 그러다 보니 개발을 하고자 하면 일찍이 학원도 다니고 레슨도 받고 해야했는데, 제가 그렇지 못했고, 부모님도 그런 저를 완전히 알지 못하셨고 그 과정 중 과학교육을 많이 받았는데, 그안에서 로봇개발 교육, 프로그램언어 교육 등 카이스트를 목표로 부모님이 진로를 잡길 원하셔서 초등학교 다니는 동안 전부를 그 시간에 바쳤어요. 당시에 EBS로봇파워라는 프로그램에 나가서 우승도 하고, 로봇서바이벌 전국대회 은상을 비롯해 각종 로봇전국대회에서 상들을 많이 받았죠.
하지만 어느 순간부턴가는 점점 이게 아니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죠. 그렇게 멀리 돌아돌아 그 첫 시작이 중학교 2학년때였어요. 큰 용기를 내어 그렇게 처음 실용음악학원을 등록하고 배우고 싶었던 노래, 기타, 피아노, 화성학 등을 열심히 배웠어요. 이때 처음 제가 정식으로 음악을 배우게 된 시기였는데, 처음 정식으로 음악을 가르쳐주셨던 분이 이 학원 원장님이셨어요. 김해학원 서정구원장님의 첫인상이 아직까지도 강렬하게 기억에 남는데, 긴머리에 검은색 선글라스, 완전히 록커셨고 록음악을 사랑하던 어린 저에게는 정말 멋져보이셨어요. 이런분께 음악을 배울수 있었다는 자체가 황홀했던것 같아요. 그렇게 한 3년정도를 배웠던것 같아요. 제 입으로 이런 말씀드리기 좀 그렇지만 너무 하고 싶었고 애살이 있어서 정말 금방금방 습득하고 빨리 성장하고 배울 수 있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나름 7080포크감성이 그대로 살아난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을 정도로 발성적인 측면에서나 음악적인 측면에서나 노래를 곧 잘했어요.
이렇게 음악을 배우기 시작하면서 점점 없던 용기가 생기고 자신감이 생기더라구요. 매번이 쉽고 수월하진 않았지만,, 그때부터는 그래서 친구들 앞이나 여러 사람 앞에서 노래를 부르는 일이 많았던 것 같아요. 한번 하기 시작하니까 그 다음 다음은 조금 더 수월하고 자연스러워졌던 것 같아요. 근데 과감한 용기의 순간도 잠시, 여전히 예술을 하고 싶다는 마음은 변함이 없었지만 시간이 흐르고 고등학교시절에 접어들면서는 다시 한번 혼란이 왔었던 것 같아요. 앞으로 미래에 대한 현실적인 고민과 생각들이 많아졌고, 과연 예술이라는 것을 하여 전공을 하고 사회로 나갔을 때 그 험난한 시간들을 견딜 수 있을 것인가, 아니 당장 밥 먹고 살 수 있는 길은 개척할 수 있는가에 너무 힘든 시간을 보내게 되었죠. 그러다 결국은 현실적인 길을 배재할 수가 없어 제가 할 수 있는 안정적인 길을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물론 그렇게 해서도 잘 살수 있습니다. 실제로 잘 사시는 분들도 많구요. 그냥 그때는 제가 확신과 자신이 없었던 것 같아요. 그렇게 생각을 하게 된 것이 영상계열 미대, 영상디지인을 전공해 제가 하고 싶었던 예술을 하면서도 기술을 배워 직장에 취직할 수 있는, 그래서 이 전공 입시를 준비하기 위해 입시미술학원을 다니게 되었죠. 그렇게 학원을 아마 1년정도를 다녔을거에요. 누군가는 이렇게 생각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줏대 없이, 한 우물만 파지, 여기저기 왔다 갔다 보기 안좋다, 끈기 없다, 제 학창시절에는 이런 이야기들이 한참 많을 때 였고 이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이 있을 때 였어요. 하지만 저는 후회하지 않아요. 이런 과정을 통해 진정한 나만의 길을 찾을 수 있는 것이고, 여러 경험을 해봤기 때문에 더 나의 길이 명확하고 구체화 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확신을 갖는데까지 더 경험하고 고민할 시간이 필요했던 것 같아요.
결국 최종적인 제 선택은 음악이었어요. 그래서 이전보다는 조금 더 강인한 마음으로 굳게 다잡고 조금 더 진지하고 엄숙하게 임할 수 있었어요. 포기도 없었구요. 새로운 시작은 너무 재밌었어요. 입시미술학원을 그만두기 전에 그런 생각이 들더라구요. 저라는 사람은 원래 음악과 때 놓을 수가 없는 사람인데, 그걸 때 놓으려고 했으니 얼마나 마음이 불편했겠어요. 도저히 그럴 자신이 없더라구요. 그리고 진지하게 많은 시간을 고민하다가, 그렇게 저는 온전히 저라는 사람을 표현하고 증명할 수 있는 뮤지컬이라는 장르에 도전해보기로 했습니다.
당시 정말 많은 뮤지컬을 봤던 것 같아요. 삼총사, 그리스, 몬테크리스토, 마타하리, 레미제라블, 젝더리퍼, 영웅 등 이요 제가 엄기준선배님, 김산호선배님, 민영기선배님 옥주현선배님, 정성화선배님, 이하 많은 선배님들을 굉장히 좋아했거든요. 그래서 제 선택은 성악을 기반으로한 표현력 좋은 뮤지컬배우가 되겠다는 결심으로 성악과 진학을 목표로 입시를 최종적으로 준비하게 되었어요. 그렇게 정말 제 인생에서 최선을 다해서 발성에 대한 공부와 연구로 당당하게 성악과 하이바리톤으로 진학까지 하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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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전과 성장의 하모니]
Q. 대학이후 사업을 시작하기까지 많은 일들이 있으셨을 것 같아요.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들이 있을까요?
A. 정말 폭풍 같은 많은 일들이 있었죠. 입시를 준비하고 성악과에 입학을 하면서 또 한번 어린 저에게는 절망적인 사건들이 찾아왔었어요. 평소에 사실 잔병치례가 많고 몸이 또래에 비해 엄청 나쁘지도 않았지만 그렇다고 건강하지도 않아서 다니던 한의원이 있었어요. 근데 어느 날 선생님이 보시더니 근육에 좀 문제가 있는 것 같은데 대학병원에서 한번 검사를 해봐야 할 것 같다구요.
근데 사실 일상생활에 큰 지장이 없었어서 크게 신경쓰지 않고 있다가 기회가 되서 대학병원에서 신체 정밀 검사를 받는 일이 있었는데… 여기서 청천벽력 같은 말을 듣게 되었죠. 근육조직검사와 근전도검사 등 각종 여러 종합 검사들을 했는데, 남들과는 조금 다른 근육조직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대강 정리를 하자면 핵심증상은 근육이 쉽게 발달되지 않고, 수축과 이완이 불규칙적이며, 퇴화가 빠르다는 내용인데요 병명은 근이영양증, 분류상 희귀병이라고 하더라구요.
교수님이 말씀하시기를 이 병은 현재까지 특별한 치료법과 완치 사례가 없고 평생 달고 가셔야 하는 병입니다. 환자마다 증상과 케이스가 조금씩 다 다르지만 심하면 심부전으로 사망에 이를 수도 있고 근육관련 기능 장애로 인해 언제 어떻게 될지를 모른다는 거였죠. 하지만 사실 저의 경우는 굉장히 드문 케이스긴 한데, 세세하게 운동을 해도 근육발달이 잘 되지 않거나, 몸이 쉽게 피로해진다거나, 근육수축이완이 원활하게 잘 안되서 시간이 지날수록 경직이 심해질수는 있지만, 겉으로 드러나기에 심각한 증상으로 급격하게 몸이 안좋아져 나빠질 가능성은 낮아 보인다고 하시더라구요.
이 말을 듣고 저는, 아 다행이라고 해야할지 불행이라고 해야할지 우선 1차적으로 당장 목숨에 큰 위협이 있는 건 아니니 정말 감사할 일이고, 천만 다행인건 맞지만, 노래를 하는 사람으로서는 근육컨트롤이 나의 제어 안에서 해결이 안되는 상황이 지속된다면 이것은 정말 심각한 일이거든요. 비정상적이고 불규칙적인 근육 수축이완으로 인해 근육협응이 잘 안되다 보니까, 성대가 자꾸 의지와는 상관없이 벌어지게 되고, 제가 원래는 진성으로 소화할 수 있는 음역대가 3옥타브파샵까지는 되었는데 신체컨디션이 점점 악화되면서는 음역대가 많이 떨어지고, 소리떨림, 호흡조절, 톤전환 등 많은 것들에 영향을 받더라구요. 신이 있다면 정말 원망스러웠어요. 이제 뭔가 시작해보려니 뭔가 모두 무너지는 느낌이었죠. 겉잡을 수 없는 도피와 대인기피 기나긴 방황을 하면서 성악과는 자퇴를 하게 되었죠.
이때 너무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서 그런지 엎친데 덮친격으로 전정신경기능장애도 함께 찾아오게 되었는데, 정기적으로 돌발성 급성 어지럼증이 와서 현재까지도 고생을 많이 하고 있는데, 앞으로는 몸이 조금 더 건강해졌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이후 마음을 다시 다잡기 위해서 정말 힘겨운 시간을 보냈는데요. 이때 지금까지도 저의 곁에서 함께하며 큰 힘이 되어주고 있는 저의 가족, 차우차우 강아지 몽이를 만나게 되었어요. 이 시기에 둘이서만 같이 있는 시간이 되게 많았었는데 당시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면서 정도 많이 들고 의지하면서 지냈고, 몽이가 같이 있었기 때문에 제가 다시 일어서는데 큰 원동력이 되지 않았나 싶어요. 그렇게 긴 시간을 보내고 난 뒤 저는 제 자신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받아들이기로 어렵게 마음을 먹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먹고 살 길은 마련을 해야했기에 다시 기술을 배워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래도 제가 조금이라도 좋아하는 분야에 참여하고 싶고, 함께하고 싶은 마음에 방송영상미디어과라는 전공으로 대학을 새로 들어가게 되었죠.
그렇게 저는 경기도 여주라는 지역에서 새로운 마음을 잡고,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새로운 사람들과의 인연과 시간들을 행복하게 보냈습니다. 처음에는 많이 낯설고 힘들었지만 그 불안정한 상황들과 낯섬이, 나쁘지만은 않았어요. 이제껏 음악만을 생각하고 공부해온 제가, 사진, 영상, 광고미디어라는 새로운 주제의 제가 깊이 공부해오지 못했던 분야의 전공이지만, 총체적으로는 제가 알고 싶었던 분야이기도 하고 크게는 같은 예술인이라는 시각에서 이런 분야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만날수 있어서 행복했고, 같이 소중한 시간을 나눌수 있어서 감사했고, 제가 알지 못했던 많은 것들을 경험하고 알게 될 수 있어서 영광이었던 시간이었던 것 같아요.
그렇게 학교를 졸업하고, 저는 교수님의 추천으로 목아박물관에서 일을 할 수 있게 되었어요. 당시 제 업무는 박물관 운영과 관련된 홍보를 전담하는 일이었죠, 방송영상미디어과에서 배운, 부족하지만 나름 전문적인 기술로 영상도 찍고, 포스터도 만들고, 사진도 찍고 홍보물을 만들었어요. 사실 그때 박물관에서의 분위기와 환경, 막내 직원이라는 위치가 제 성향과는 조금 맞지 않는 부분이 있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오래 일을 하지는 못했지만, 값진 경험을 했다고 생각해요.
이때 사실 저는 원래 독립적이고 창조적이면서, 제가 보람을 강하게 느낄 수 있는 일을 하고 싶었는데, 물론 박물관 일도 보람차고 흥미로운 경험이었지만, 나도 이제 완전한 직장생활을 한다는 느낌에, 마음 한구석에는 틀에 박힌 생활을 하겠구나 라는 생각에 조금 우울해지기도 하고, 취미생활을 조금씩 병행 해야겠다는 마음에, 근처 실용음악학원에서 제가 조금 배워보고 싶었던 것을 더 배워보고자, 찾아가서 원장님께 상담 받고 등록을 하게 되었죠. 여주학원 서영민원장님의 첫인상은 굉장히 강렬했어요 굉장히 강인하고 독립투사 같은 이미지에 신뢰감이 많이 들었죠. 원장님은 저에게 정말 어려운 시기에 여러가지 도움을 주셨던 분이셨는데요.
당시 사회적으로 이혼이 이제 더 이상 심각한 문제가 되는 분위기는 아니었지만, 성격차이로 많이 힘들어 하시다가 부모님이 이혼하시게 되었는데, 아직 갈피를 못 잡고 마음이 방황하는 저에게는 청천벽력 같은 일이 또 생기게 된 셈이었죠.
그로 인해 심적으로도 사실 마음아픈 시간을 많이 보내기도 했구요. 저희 집 사정이 넉넉하지 못한 상황이라 제가 여러 알바를 병행하면서 생활하고 지내는 형편이었어요. 그때 그래서 안해본 알바가 없는 것 같아요. 고기집부터해서 물류센터, 골프장, 마트캐셔, 지역축제 스탭, 봉투공장, 가구공장, 드라마촬영장 스탭 같은 일들을 했었죠.
그렇게 제가 정신적으로 많이 어렵던 시기에 심적인 위안과 도움받고, 거의 같이 살다 시피 할 정도로 가깝게 지내기도 했어요. 한동안은 오해 때문에 연락을 오래 안하기도 하였지만 지금은 형님 동생하며 종종 연락하고 가깝게 지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여주에서 있었던 일들 중 정말 이 학원을 다니면서 저에게 뜻 깊은 인연이 또 한번 생기게 되었는데요. 제가 처음 가수의 꿈을 꾸게 만들어주셨던 가수 마현권 선생님이 이 학원에 출강을 해오고 계셨더라구요 처음엔 저도 이렇게 만난다는 상황자체가 너무 신기했어요. 이렇게 인연이 닿는다는 게 뭔가 운명 같다는 생각이 들었고, 저에게는 노래가 아닌 프로듀싱과 창작으로 다시 한번 음악적인 꿈을 다시 꿔볼 수 있을까 하는 희망이 생기게 되었고, 선생님 과목을 수강해 많이 공부 했었던 것 같아요. 정말 위로와 격려도 많이 해주시고, 인생수업도 많이 해주셨죠. 그렇게 마현권선생님과 행복한 시간을 많이 보내고 저에게는 한 명의 또 제 인생의 정말 중요하고 소중한 사람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이 좋은 시간을 통해 저는 또 다시 결심하게 되었어요.
비록 내가 이제 노래를 수준급으로 잘 할 순 없지만 노래를 이전처럼 못한다고 해서 모든 게 끝난 건 아니잖아요. 다시 저만의 방식으로 예전의 기량을 찾을수도 있는 것이고, 꼭 노래가 아니더라도 프로듀싱을 하고, 창작을 하고, 제작을 하며 함께 할수도 있는 거잖아요. 그래서 저는 더 이상 제 자신이 원하는 마음을 피하지 않고, 제대로 직면을 해보기로 하고 음원유통사라는 새로운 시작점에 서게 되었죠.
새로운 시작과 함께 이때 이사를 하게 되었어요. 여주에서 일산으로 가게되었죠. 음악사업을 하고 새로운 학업을 하기 위해서는 서울권으로 이사를 가는게 좋겠다는 생각이었어요. 이때 새로운 준비와 더불어 뮤직비즈니스와 관련된 대학원진학을 하고자 하였는데, 지금까지 받은 학위는 전문학사학위라 4년제 학사학위가 필요했죠. 그래서 대학교에 편입하여 일과 학업을 병행하게되는 시간을 또 길게 보내게 되었어요. 사실 하고 싶은 공부였기 때문에 즐겁고 보람찬 학업이었지만 실상은 너무 많은 알바와 일들을 병행하면서 학업에 완전히 전념하는 것은 무리가 있었어요.
그러다 보니 학점에는 좋은 성적을 받진 못했지만, 그렇게라도 꾸역꾸역 하고 해내고 싶었고, 누군가는 핑계라고 할수도 있겠지만, 그렇게라도 정말 공부가 하고 싶었고 저에게 그 상황은 최선이었던 것 같아요. 이와함께 대학 전공과정과 개인적인 연구와 개발을 통해 발성과 노래에 대한 훈련, 공부도 멈추지 않고 계속 병행 했구요. 정말 제 목소리를 되찾으려고 실제로 수천수만가지의 시도를 해보았던것 같아요. 지금 현재까지 년수로 치면 14년이상을 한셈이죠. 그렇게 저는 저만의 방식으로 학업을 하고 긴 시간을 보냈어요. 그리고 목표하고 원하던 동국대 문화예술대학원 석사과정에 진학까지 성공하게 되었죠, 굉장히 행복했어요.
[새로운 세계를 향한 열정]
Q. 어렵게 음악사업을 시작하게 되신 것 같아요. 사업을 하면서 겪으셨던 어려움이나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 들이 있을까요?
A. 음악사업의 시작은 그야말로 처음부터 전쟁이었죠. 저의 생각은 큰 자본없이 안정적이고 꾸준한 자금력을 만들고 다양한 아티스트 네트워크를 만들 수 있는 방법이 뭐가 있을까 하다가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기획사, 매니지먼트 같은 회사는 시작하려면 보세요. 사무실 있어야죠, 연예인 매니징하려면 로드매니저 있어야죠, 차 있어야죠, 하다못해 밥값, 메이크업비에, 당장 일을 하려해도 제작사나 방송국에 아는 사람들이 있어야 하죠, 행사기획 관계자들도 알아야죠, 대강 생각만해봐도 아무런 준비가 없는 상태에서는 쉽지 않은 일 이거든요.
하지만 저희는 지금 디지털 시대에 살고 있고, 음악의 소비 또한 디지털화 되어 안착되어 있잖아요. 저희 음악산업구조는 음악을, 흔히 아는 멜론, 지니 같은 사이트에서 들을 수 있게 하려면 음원유통사라는 중간 출판 업체를 거쳐야만 소비자에게 전달할 수 있는 기회가 있어요. 대강 이런구조이죠. 기획사, 아티스트 >> 음원유통사 >> 음원사이트(멜론), 음원유통업체는 크고 작은 다양한 회사들이 있지만, 이 업무를 시작하기에는 많은 것이 필요하지는 않았죠. 온라인으로 음원 자료를 전달할 수 있는 인터넷 환경, 그리고 컴퓨터 이 단 2가지만 있으면 업무를 할 수 있기 때문에, 저는 이거다 싶었어요.
간단하게 시작해서 차근차근 네트워크도 만들고 저의 이력도 만들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라고 생각했죠. 그렇게 저는 음원유통사를 준비하기 위해 여러가지 조사를 하고 준비하기 시작했어요. 하지만 현실은 또 녹록치 않았죠. 어디서 어떻게 계약을 하며, 그 연락처는 어디에 있으며, 안다고해도 계약조건이 무엇이며, 이외에 수십 가지의 필요조건에 대해서 아무도 알려주는 사람도 없었고, 이 업종이 굉장히 흔한 업종도 아니었기에, 공공연하게 나와있는 공식적인 자료도 당연히 없었어요. 주변에서도 너 지금 무슨 헛발질하고 있는 거냐, 허황된 꿈 꾸지 말고, 그냥 착실하게 직장이나 다녀라고 그러더라구요.
하지만 저는 그럴 수 없었습니다. 진정한 나로 살기 위해, 제가 또 다시 돌아올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죠. 저는 이제 돌아설 곳이 없다고 생각하고 제 모든 것을 걸고 매진 해보기로 결심했습니다. 이 업계의 1부터 100까지 제가 조사하고 시도해볼 수 있는 것은 모두 해보았습니다. 처음에는 무작정 막무가내식으로 문을 두드리고 그렇게 1년을 보냈죠. 사실 이게 막무가내로 한다고 모두 되는 것은 아니지만 이런 시도를 한다는 것 자체가 중요했다고 생각해요. 그렇게 오랜 노력 끝에 드디어 새로운 시작의 첫발을 내디딜 수 있었어요. 원하고 원했던 멜론, 지니, 벅스, 네이버바이브(와이지), 등 과의 계약에 성공하게 된거죠. 저는 포기하지 않고 저를 믿고 달려오길 잘했다고 생각했고, 제 인생에서 가장 잘 한 선택이자, 용기였다고 생각이 들었어요. 완전히 제 인생이 달라지게 된 계기가 되었으니까요.
이때부터 저는 이제 본격적으로 영업을 하기 시작했죠. 저는 이 업계에서 정말 공정하고. 투명하고, 최고의 서비스로 자리잡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기울였어요. 처음에는 저의 그 열정을 좋게 봐주시는 분들도 많이 찾아주시고, 입소문을 통해 점점 많이 찾아주시기도 하셨죠. 그런데 음원유통사라는 곳은 중간 유통업체이기 때문에 수수료로 수익을 내는 구조라, 이 수수료율이 전체 음원매출에 비해 적은 비중을 차지하기 때문에, 무명가수들의 음원만으로는 앞으로의 지속과 유지가 어려울 것 같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때부터는 팬덤이 조금 있는 아티스트와 작업을 해야 조금 더 우리에게 지속 가능한 운영이 가능할 것 같아 아티스트들을 다시 탐색하기 시작했어요. 저는, 팬덤이 있으면서 제가 보람을 느끼고 좋아하는 아티스트들을 위주로 컨택을 하기 시작했어요. 그렇게 오디션스타, 히트곡스타, 트로트스타, 탑급 작곡가 등 여러 영역의 제가 좋아하는 사람들과 만나봤죠. 정말 좋은 일도 많았고, 좋지 않은 일도 많았어요.
제가 록 음악을 정말 좋아해서, 좋아하던 선배님들이 많이 계시는데요.
김경호, 박완규, 넥스트, 김정민, 박상민, 부활, 이승철, 임재범, 윤도현, 자우림, 윤여규 선배님들 음악을 정말 사랑했고, 그중에서도 활밴드 김명기 선생님의 음악도 빼놓을 수가 없는데요. 정말 감사하게도 김명기 선생님과 우연히 기회가 되어 만나뵙게되는 계기가 생겼었습니다.
김명기 선생님과의 만남은 제 인생에서 잊을 수 없는 일이 될 것 같아요. 지금 이 짧은 말로 다 정리할 순 없지만 한번 말씀드려보자면, 제가 록 음악을 정말 좋아했기도 하지만, 정말 학창시절부터 매일 끼고 살고, 수천 번을 따라 부르며, 그만큼 존경하는 가수 선배님이시라 첫 만남부터 너무 행복했고, 이후에 제 러브콜로 지금은 일적으로 함께 하게 되었지만, 일적으로도 인생적으로도, 제가 힘들고 어려울때마다 항상 많은 조언을 주시는 인생 선생님이시구요. 그리고 쉽지 않은 일인데 아무런 조건과 계산없이, 선생님의 일생 동안 모든 앨범들을 저에게 믿고 다 관리를 맡겨 주셔서 지금까지도 정말 큰 힘이 되고있고, 이걸 돈으로 환산할 수 없지만 가치로 따지자면 아마 평생을 보답해도 모자라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외에도 뮤벤토리 영재형님, 음악나라 동옥형님, 하이브로 상재형님, 더크로스 시하형님 혁건형님, 그리고 태화누나, 다가옴 건혁작가님, 지현형님, 여규형님 이하 많은 분들이 계시는데 이렇게 여러 좋은 인연들을 많이 만나게 되었어요. 제가 일을 하는데에 큰 힘을 받고있고 제 사업에 큰 기둥이 되어주시며, 좋은 기회들을 많이 만들어주셨죠.
저의 의도를 좋게 해석하고 좋은 마음으로 함께해주는 사람들도 분명 있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로 인해 상처도 많이 받았죠. 사업을 하면서 이런 저런 다양한 유형의 사람들을 만나며, 나도 부족하고, 내가 보는 것이 전부는 아니라고는 항상 생각하지만, 정말 세상에는 좋은 마음으로 함께하며 애쓰고 희생까지 감수하며 노력하는 사람들을 무참히 무시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아요. 믿어준 사람에게 돌변하여 배신하고, 남의 노력을 한번에 가로채고, 책임은 회피하며, 단기적인 이익에 집착하고, 자신의 이익만을 중시하는 이런 사람들로부터 우리는 조금 더 단단해지고, 지혜롭게 그런 사람들을 대처하는 방법을 공부하고 터득해야할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리고 이게 굉장히 아이러니 한것은 이런분들이 강약약강을 되게 잘하시는데, 자신들이 꼭 잘보여야겠다고 작정하고 잘보여야할 대상에게는 한 없이 좋은 사람이고 어떤 측면에서는 정말 희생적인 모습까지도 보인다는것인데 이런 부분들 때문에 한편으로는 되려 억울한 사람들이 생기는 경우가 더러 있고 가면 너머 그 안의 진짜 모습을 분간해내는게 쉽지 않은 것 같아요.
저 같은 경우는 작정하고 배신하는 사람들 때문에도 많이 힘들었지만, 그 속에서 심리적으로 자꾸 의도적으로 고립시키고, 그렇게 이용하면서도 굉장히 당당한 분들과 그 안에서의 수많은 오해로 인해 정말 많이 힘들었던 것 같아요.
참 요즘 같은 세상은 저 뿐만이 아니라 많은 분들이 저 같은 어려움을 많이 겪고 있으실거라 생각되는데요. 그 와중에, 유연하면서도 흔들리지 않는 본인만의 확고한 기준만 잘 갖고 있으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아무리 세상이 팍팍해도 지켜야될 신의는 있다고 생각해요. 이 신의라는 것도 어떻게 보면 정확하지 않은, 과거에 만들어진 어떤 기준에 의해 무의식적으로 생각하는 것 일 수 있고, 사람마다 기준이 조금씩 다르겠지만, 저는 그렇습니다. 아무리 어렵고 힘들어도 자신을 믿고 함께해온 사람을 자신의 이익에 따라 이용하고 무참히 무시해버리는 것은 너무 단기적이고, 단단히 큰 착각을 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그렇게 사람을 상황에 따라 쉽게 대하고, 언젠가는 얼마든지 입장이 바뀔 수도 있는데, 그런식의 관계를 하는 사람들은 결국은 도태될수 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게 제가 생각하는 진정성 있는 관계중심적 비즈니스에 중요성입니다. 좋은 품성과 태도의 사람들은, 관계를 하며 좋은 영향을 주고 받으며, 시너지를 내고 이런 사람을 중요시하는 모습들이 좋은 관계와 그들을 좋은 목적지로 인도한다고 생각해요. ‘그냥 원래 이 업계는 그런거야’라는 건 없습니다. 그렇게 되지 않도록 노력하는 자세가 중요한거죠. 그리고 서로가 그렇게 노력할때, 서로가 함께 웃을 수 있는 좋은관계가 되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Q. 현재 정기적으로 작품활동 및 음원 기획과 유통을 하고 계시고, 플랫폼을 개발하는 등 음악에 대한 깊은 애정이 느껴집니다. 음악은 이지호씨에게 어떤 의미인가요?
A. 그 어떤 말로도 정확히 표현할 수 없을 것 같은데요. 음악은 제 삶의 가장 큰 위로이자 표현의 도구인 것 같아요. 저의 개인적인 작품활동도 중요하고 소중하지만, 음원유통과 기획 제작을 하면서 정말 음악을 사랑하고 진정성있게 음악을 하는 인디뮤지션들에게 좀더 나은 음악시장 환경을 만들어드리기 위해 노력을 많이 해야겠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우선적으로 저는 현 한국의 음악산업 실태에 대해 많은 실망감을 느끼고 있습니다.
본래 음악이라는 것은 그 안에 내포하고 있는 메시지를 듣는 주체가 이해하고 공감하며, 위로 받고, 힐링하며, 힘을 내고 에너지를 받곤 합니다. 그리고 이런 음악들을 리스너들은 취향에 따라 찾아서 듣고, 소비하고, 이것이 자연스럽게 팬덤을 만들었죠. 이런 본래의 선순환적인 구조가 어느순간부턴가 망가지고 있다고 생각해요. 음악자체만으로 리스너가 온전히 그것을 느끼고 소통하며, 소비되고 순환이 되어야 하는데 어느샌가 부터는 막대한 자본을 가지고 있는 대형 레이블들 음반위주의 노출이 집중적으로 이루어지면서, 소자본 인디뮤지션들의 시장진입 암묵적 차단, 동일한 형식의 음악들과 매번 동일한 노출, 그로인한 세뇌, 이런것들로 인해서 더 이상 창조적이고 신선한 음악컨텐츠가 순환되지 않고, 대형레이블들처럼 막대한 자본을 투입하지 않으면 동일선상에 설수 없는 환경을 구축해버렸죠. 항상 그저 그런 음악의 소비가 이루어지며, 애초에 직접 원하는 음악을 찾아 듣고 새로운 아티스트를 발견하며, 이로인해 음악의 본질에 대해 리스너들이 느끼고 소통하는 기회조차 주지 않는 것 같습니다. 아티스트 자체적으로도 정체성의 혼란을 주게 만드는 것 같구요.
이런 독식적인 구조가 계속해서 지속되면 단순히 음악을 듣는 환경만 바뀌는 것이 아니라, 그와 연계된 1부터 100까지의 수 많은 업체들이 영향을 받고 이것이 결국에는 전반적인 산업에까지 영향을 미치게 되는거거든요. 이것이 결과적으로는 문화까지도 뿌리를 흔들게 되는 셈이구요.
표면적으로는 기존의 자리를 잡고 있는 대기업들이 키를 가지고 있는 것 같기도 한데, 이미 초점이 대기업에 다 맞춰져 있고 정말 아쉬운 사실이지만, 그걸 만든 그들이 그 구조에 대해 전혀 바꿀 생각이 없어보이고, 한낱 작은 힘이지만 책임의식을 가지고 결국 저희 같은 사람들이 변화의 시도와 도전을 할 수 밖에 없는 것 같아요. 이런 사람들이라도 없으면 힘겹게 음악하고 있는 인디뮤지션들에겐 세상이 너무 어렵고 가혹하잖아요. 작은 시도지만 언젠가는 이런 시도들이 모여 아름다운 환경이 만들어질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패턴이 이제 조금씩이라도 바뀌어야 된다고 생각하는데요. 이 일을 하면서 인디뮤지션들의 음악이 선순환 될 수 있도록 인디음악차트와 음원사용료정산시스템 등 플랫폼을 개발해 항상 고민하고 연구하고 있고, 언젠가는 크게 이 판도가 한번 뒤집어 지면 좋겠다는 희망을 가져보고있습니다. 현재는 구글코리아와의 유튜브음원 직공급계약에 대해 내부적으로 추진중인데요. 쉽진 않지만 저는 계속 노력할거구요. 저 개인으로써도 앞으로 갈길이 멀지만, 초등학교 어린 아이가 꾸던 작은 꿈이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에 너무 감사하고, 오늘도 수고한 저의 노력을 응원하고 싶구요. 앞으로도 더 성장하고 발전할 저를 위해 열심히 살고 싶습니다.
마지막으로, 요즘 시대가 어려워져서, 많은 뮤지션분들이 방향성에 대해 고민을 많이 하시는 것 같은데요. 어렵지만 자신만의 길을 찾아 만들어 나가보시라고 말씀드리고 싶고, 시도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바뀌지 않습니다. 자신의 꿈은 기다리는게 아니라 지금부터 만들어가는 것이라는 말을 하고싶네요. 한국의 모든 뮤지션분들 화이팅입니다! 감사합니다.
[글로벌에픽 황성수 CP / hss@globalepi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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