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성일 이음연구소장(경영학 박사)
이를 극복하고 가입자의 선택권을 넓히기 위해 현재 도입이 논의되고 있는 ‘기금형 퇴직연금 제도’는 시장의 패러다임을 바꿀 게임 체인저로 주목받고 있다.
그러나 장밋빛 전망 뒤에는 냉혹한 현실적 장벽이 존재한다. 바로 기금형전문기관(수탁법인)의 ‘고객 유치(영업 및 마케팅) 채널의 부재’이다. 수탁법인이 모기업인 금융기관의 기존 영업망을 활용하는 것은 이해상충 문제와 내부 경쟁(Cannibalization) 우려로 인해 사실상 불가능하며, 독자적인 전국 영업망을 구축하는 데는 천문학적인 자금과 시간이 소요된다.
이러한 딜레마를 해결하고 기금형 제도를 성공적으로 안착시킬 유일하고도 가장 현실적인 대안이 바로 ‘퇴직연금 모집인’ 제도의 전면적 활용과 혁신이다.
기금형 전문기관이 시장에 안착하기 위해서는 기존 계약형 가입자를 전환 유도하거나 신규 잠재 가입자를 발굴해야 한다. 특히 대기업을 제외한 중소·영세기업 시장은 고도의 대면 영업과 밀착 관리가 필수적이다.
그러나 수탁법인이 직접 고용 형태의 대규모 영업조직을 갖추는 것은 초기 재무 건전성을 극도로 악화시킬 수 있어 불가능에 가깝다. 이러한 상황에서 ‘퇴직연금 모집인’은 가장 훌륭한 마케팅 파트너가 된다.
첫째, 비용의 효율성 및 유연성이다. 모집인 채널은 성과 기반의 수수료 체계로 운영되므로, 수탁법인은 초기 고정비 부담을 최소화하면서 전국적인 영업 커버리지를 확보할 수 있다.
둘째, 아웃바운드 마케팅의 극대화다. 가만히 앉아서 고객을 기다리는 인바운드 방식이 아닌, 중소기업 현장을 직접 찾아가는 밀착형 아웃바운드 영업에 최적화되어 있다.
셋째, 기존 금융 인프라의 재활용이다. 이미 시장에는 보험설계사, 투자권유대행인 등 검증된 대면 영업 능력을 보유한 인프라가 존재한다. 이들을 기금형 전문기관의 전문 모집인으로 흡수·육성한다면 단기간에 강력한 판매 및 마케팅 채널을 가동할 수 있다.
현재 우리나라의 퇴직연금 모집인은 단순히 상품을 소개하고 계약 체결을 중개하는 ‘단순 판매인’ 수준에 머물러 있다. 그러나 기금형 퇴직연금의 성공 여부는 수탁법인의 자산운용 방향과 성과에 대해 가입자와 끊임없이 소통하고 신뢰를 확보하는 데 달려 있다.
이를 위해 수탁법인의 법적 의무인 ‘가입자 교육’ 권한을 모집인에게 과감히 부여하고 역할을 격상시켜야 한다. 또 다른 이점은 다음과 같다.
첫째, 일석이조의 효과(교육과 마케팅의 결합)다. 노사정 합의에 따라 수탁법인의 책임으로 규정된 가입자 교육을 모집인이 대행할 수 있도록 제도화해야 한다. 모집인이 현장에서 가입자 교육을 전담하게 되면, 수탁법인은 법적 의무를 효율적으로 이행하는 동시에 가입자와의 밀착 소통 창구를 확보하게 된다.
둘째, 자산운용 정당성 홍보의 최전선으로 활용 가능하다. 모집인은 단순한 판매업자가 아니라, 기금형 제도의 우수성과 수탁법인의 전문적인 자산운용 정당성을 가입자에게 직접 설명하고 설득하는 '신뢰의 메신저'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이는 기금형 퇴직연금에 대한 가입자의 이해도를 높이고 제도의 연착륙을 이끄는 핵심 동력이 될 것이다.
3. 전문성 강화와 수수료(Fee) 기반 컨설팅으로의 전환
모집인이 가입자 교육과 자산운용 홍보라는 중책을 맡기 위해서는 그에 걸맞은 전문성 강화와 제도적 지원이 수반되어야 한다. 단순한 퇴직연금 모집인 시험을 개편해 연금 제도 전반, 자산운용 지식, 은퇴 설계를 종합적으로 평가하는 ‘한국형 퇴직연금 플래너(가칭)’ 전문 자격 제도를 신설해야 한다.
이와 함께 가격 능력(Pricing Capability)의 확대가 필요하다. 단순히 상품 판매 수수료(Commission)만 받는 구조에서 벗어나, 기업의 제도 설계 컨설팅 및 가입자 교육에 대한 정당한 ‘컨설팅 수수료(Fee)’를 청구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해야 한다.
이는 모집인이 특정 고수수료 상품만을 권유하는 이해상충 문제를 방지하고, 객관적이고 중립적인 입장에서 가입자 교육과 자문을 제공할 수 있는 토대가 된다.
기금형 퇴직연금 제도의 도입은 한국 퇴직연금 시장의 질적 도약을 위한 위대한 첫걸음이다. 그러나 아무리 훌륭한 제도와 수탁법인이 존재하더라도, 이를 시장과 가입자에게 전달할 ‘모세혈관’인 판매 및 교육 채널이 막혀 있다면 기금형 제도는 고사할 위험이 크다.
정부와 감독당국은 퇴직연금 모집인을 단순한 ‘판매 대행인’으로 바라보는 낡은 규제 프레임에서 벗어나야 한다. 이들을 ‘수탁법인을 대신해 가입자 교육을 수행하고, 기금형 자산운용의 정당성을 홍보하며, 전문적인 은퇴 설계를 제공하는 금융 전문가’로 재정의하고 육성해야 할 때이다.
[글로벌에픽 성기환 CP / keehwan.sung@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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