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병철 한국퇴직연금개발원 대표
1994년 뉴욕의 한 연금 세미나장. 캐나다의 연금학자 키스 암박츠히어(Keith Ambachtsheer)는 고위 연기금 임원 50명에게 흥미로운 질문을 던졌다. “마술 지팡이를 휘둘러 조직의 모든 장애물을 없앨 수 있다면, 여러분의 연기금은 1년에 얼마나 더 좋은 성과를 낼 수 있습니까?”
그들이 적어낸 답의 중간값은 66bp였다. 1bp는 0.01%포인트이므로 66bp는 0.66%포인트다. 한 해만 보면 작아 보이지만 수십 년간 복리로 쌓이는 연금에서는 결코 작은 차이가 아니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차이가 펀드 하나를 잘 고른 결과가 아니라는 점이다. 임원들이 꼽은 장애물은 흐린 목표, 느린 의사결정, 불분명한 권한과 책임, 부족한 전문 인력처럼 거버넌스 안에 숨어 있었다.
암박츠히어는 이 직관을 실제 데이터로 확인하려 했다. 1998년 동료 연구자들과 미국·캐나다의 80개 연기금을 분석한 결과, 비용과 위험을 조정한 성과 차이는 연간 약 60bp였다. 1994년 임원들이 직관으로 답한 66bp와 놀랍도록 가까웠다.
여기서 거버넌스는 거창한 위원회 이름이 아니다. 목표와 위험 한도를 정하고, 권한과 책임을 나누고, 전문가가 실행하며, 그 결과를 평가해 다음 결정에 반영하는 체계다. 의사결정과 관리, 실행, 평가와 피드백이 끊기지 않고 돌아가야 한다.
좋은 거버넌스는 한 번의 대박을 약속하지 않는다. 대신 좋은 결정을 반복하고 잘못된 결정을 고칠 가능성을 높인다. 그것이 오랜 시간 쌓여 성과의 차이를 만든다.
한국에서는 얼마나 달라질 수 있을까?
지난 2월 20일 ⑮편을 끝으로 나는 글쓰기를 멈췄다. 박사학위를 마무리하기 위해서였다. 학위 논문의 핵심 주제 역시 ‘거버넌스 품질이 퇴직연금 성과를 결정한다’였다.
거버넌스가 이상적으로 개선된다면 연간 성과가 얼마나 나아질 것으로 보는지 물었더니, 실무자들이 기대하는 성과 향상 폭은 연간 2%포인트를 넘었다. 암박츠히어의 60~66bp보다 훨씬 큰 기대였다.
이 답변은 거버넌스만 바꾸면 수익률이 저절로 2%포인트 이상 오른다는 뜻이 아니다. 현장의 실무자들조차 한국 퇴직연금의 저수익 원인을 단지 펀드 상품이나 주식 시장의 문제로만 보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 뒤에 숨은 의사결정 체계와 수탁자 책임의 구조를 고치는 것이 성과 개선의 핵심 열쇠임을 현장이 이미 체감하고 있다는 방증이다.
그래서 논문의 결론은 단순하다. 기금이라는 그릇이나 펀드라는 상품이 성과를 만드는 것이 아니다. 좋은 거버넌스가 좋은 결정을 반복하게 만들고, 그 시스템의 반복이 성과를 만든다.
‘수익률 3배’보다 먼저 답해야 할 질문
최근 김성주 국민연금공단 이사장은 국민연금이 기금형 퇴직연금 사업에 참여하면 기존보다 3분의 1 수준의 수수료로 3배 이상의 수익률을 기대할 수 있다고 밝혔다. 2025년 퇴직연금 수익률 6.47%와 국민연금 수익률 18.80%를 단순 비교한 주장이다.
다만 이는 운용 목적과 위험 성향이 전혀 다른 두 제도의 단년도 수익률을 비교한 숫자다. 국민연금이 퇴직연금 시장에 들어온다고 해서 자동으로 3배의 수익률을 낸다는 보장은 없다.
물론 현재의 민간 계약형 퇴직연금보다 국민연금의 거버넌스 구조가 훨씬 선명한 것은 사실이다. 국민연금은 기금운용위원회가 목표를 정하고, 전문 운용본부가 실행하며, 내·외부 평가가 검증한다. 더 나은 성과를 낼 잠재력이 있다는 주장 자체는 일리가 있다.
하지만 그것은 ‘국민연금’이라는 이름이 가진 마법이 아니다. 노사정이 합의한 민간 금융기관개방형이나 연합형 기금도 전문성과 책임이 명확한 좋은 거버넌스를 갖춘다면 성과는 당연히 좋아진다. 반대로 국민연금이라 할지라도 퇴직연금에 맞는 정교한 거버넌스를 구축하지 못하면 성과를 보장할 수 없다.
현재의 국민연금은 평생 지급을 약속하고 국가가 관리하는 DB형 공적연금이다. 반면 새로 논의되는 퇴직연금 기금은 가입자 개인의 자산을 굴리는 DC형 연금이다. 두 제도는 돈의 주인도, 감당해야 할 위험도 근본적으로 다르다.
여기에는 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통상적인 노후 3층 보장체계에서 국민연금은 기본적인 노후생활을 책임지는 1층 공적연금이고, 퇴직연금은 근로자가 일하며 쌓은 자산으로 이를 보완하는 2층 직장연금이다. 하나는 사회보험의 약속을 지키는 제도이고, 다른 하나는 근로자의 퇴직급여를 장기간 적립하고 운용하는 제도다. 같은 연금이라는 이름을 쓰더라도 맡은 역할과 책임은 같지 않다.
해외 연금제도도 이 경계를 가볍게 다루지 않는다. 네덜란드는 1층 국가연금과 2층 직장연금을 별도의 제도와 운영주체로 관리한다. 영국은 정부가 만든 NEST조차 국가연금 운영조직이 아니라 독립된 수탁자가 직장연금 가입자의 자산을 관리한다. 호주도 공적 노령연금과 사용자가 적립하는 퇴직자산을 서로 다른 축으로 운영한다.
나라마다 제도의 이름은 달라도, 목적이 다른 약속과 자산에는 그에 맞는 책임체계를 둔다는 원칙은 같다.
따라서 국민연금이 이 사업에 참여하려면 기존 거버넌스를 그대로 확대하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국민연금이 새로 만들 기금형 퇴직연금을 법률과 조직, 자산의 측면에서 분리하고 그에 맞는 전용 거버넌스를 먼저 제시해야 한다. 별도의 독립 위원회를 구성하고, DC형 가입자의 생애주기에 맞는 자산배분 원칙을 세워야 하며, 새로운 성과평가와 수탁자 책임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부처 간 관할 경계와 자산의 방화벽도 명확히 해야 한다. 국민연금은 보건복지부가, 퇴직연금은 고용노동부가 관할한다. 두 부처 간 권한은 어떻게 나눌 것인가? 국민연금의 재정 상황이나 정책 목표가 퇴직연금의 의사결정에 전가되지 않도록 별도의 회계와 자산 보관, 정보와 거래의 차단 장치를 어떻게 세울 것인가?
지금 공개된 주장에는 '수익률 3배'라는 화려한 수치만 있을 뿐, 그 숫자를 현실로 만들어낼 거버넌스 설계도가 보이지 않는다.
그렇기에 지금 국민연금의 참여에 대해 찬반을 논하는 것은 섣부르다. 1층 공적연금과 2층 퇴직연금의 역할을 어떻게 나누고, 가입자의 자산을 어떻게 독립시킬지조차 제시되지 않았다. 국민연금이 새로 만들 기금형 퇴직연금의 거버넌스 설계도를 먼저 내놓기 전까지는 논의 자체가 성립할 수 없다.
과연 국민연금은 자신의 거버넌스를 단순히 복제하는 데 그치지 않고, 1층 공적연금과 법률·조직·자산이 분리된 2층 DC형 퇴직연금의 새로운 거버넌스를 보여줄 수 있을까?
다음 질문은 계약형의 ‘선택설계’다
다음 편에서는 다시 계약형 퇴직연금으로 돌아간다. 계약형에는 기금 이사회가 보이지 않지만, 가입자에게 어떤 상품을 보여주고 무엇을 기본값(Default)으로 정할지는 누군가가 결정한다. 보이지 않는 그 손, 즉 ‘선택설계’가 어떻게 계약형의 거버넌스가 되는지 살펴본다.
[글로벌에픽 성기환 CP / keehwan.sung@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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