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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철 칼럼㉒] 20대와 50대의 퇴직연금 목표가 같을 수 있는가?

성기환 CP

2026-09-07 08:18:49

김병철 한국퇴직연금개발원 대표

김병철 한국퇴직연금개발원 대표

[글로벌에픽 성기환 CP] 지난 ⑱~㉑편에서는 DB형 퇴직연금의 거버넌스를 살펴봤다. 회사의 적립금운용위원회가 지급할 부채에서 목표를 세우고, 흩어진 적립금을 하나의 포트폴리오로 운용하며, 신중한 결정을 절차로 보호하는 구조였다.

이제 운용의 결과가 개인의 노후로 직결되는 DC형으로 시선을 옮긴다. 개인이 스스로 운용하는 DC형에서 거버넌스란 무엇인가? 바로 금융기관의 ‘선택설계’다. 상품을 고르기 전에 먼저 답해야 할 질문, 곧 가입자의 삶에서 목표를 어떻게 이끌어내야 하는지 살펴본다. [편집자주]

정년을 3년 앞둔 최 부장(가명)의 스마트폰에 퇴직연금 부담금이 입금됐다는 알림이 떴다. 그는 모바일 앱을 열어 끝없이 이어지는 펀드 목록을 한참 내리다 결국 퇴직연금사업자 상담센터에 전화를 걸었다.

상담 직원은 예금과 펀드의 차이, 상품별 위험등급과 최근 수익률을 막힘없이 설명했다. 그리고 통화 끝에 익숙한 한마디를 덧붙였다.
“최종 선택은 고객님께서 직접 하셔야 합니다.”

최 부장은 잠시 침묵하다가 자신의 진짜 처지를 털어놓았다.

“제가 3년 뒤면 퇴직인데, 그때 둘째 대학 졸업시키고 나면 국민연금 나올 때까지 5년 동안 소득이 완전히 끊깁니다. 아내랑 둘이 매달 최소 250만원은 있어야 생활이 되는데, 그럼 제 퇴직금은 지금 어떻게 굴려야 합니까?”

수화기 너머로 난처한 기색이 흘렀다. 직원이 불친절해서가 아니다. 일부 금융기관이 은퇴설계 서비스를 제공하고는 있지만, 일선 상담 창구와 모바일 앱까지 이런 삶의 질문과 계산 체계가 온전히 닿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아… 고객님, 그런 개인 사정까지는 저희가 알기 어렵고요. 화면에 있는 추천 펀드 중에서 성향에 맞는 걸 직접 고르셔야 합니다.”

같은 시각, 입사 2년 차인 박 주임도 똑같은 앱 화면을 보고 있었다. 은퇴까지 30년이 남은 청년과 당장 3년 뒤 소득 공백을 마주할 중년의 첫 출발 화면이 토씨 하나 다르지 않았다. 두 사람의 삶의 무게와 처지가 완전히 다른데, 어떻게 같은 화면에서 출발할 수 있을까?
목표수익률은 상품이 아니라 ‘삶의 조건’에서 나온다

지난 ⑲편에서 살펴봤듯, DB형의 목표수익률은 금융상품의 금리가 아니라 회사가 앞으로 직원들에게 지급해야 할 ‘퇴직급여 부채’에서 거꾸로 계산된다. 회사의 적립금운용위원회가 이를 심의하고, 전문 계리사가 정교하게 계산을 돕는다.

하지만 DC형 가입자인 개인에게는 이런 거버넌스 체계가 통째로 없다. 위원회도 없고, 내 인생을 계산해 줄 전담 계리사도 없다.

개인에게도 목표수익률은 필요하다. 다만 ‘연 몇 퍼센트’라는 숫자부터 정해서는 안 된다. 먼저 은퇴 뒤 어떤 삶을 지켜야 하는지를 묻고, 그 삶에 필요한 돈과 현재 준비된 돈의 차이를 계산해야 한다. 목표수익률은 그 계산 끝에 나오는 결과다.

언제 회사를 떠나야 하는가. 퇴직 후 국민연금을 탈 때까지 소득이 뚝 끊기는 공백기(크레바스)를 몇 년이나 버텨야 하는가. 부모님 간병비와 자녀 부양, 나와 배우자의 의료비로 언제 얼마가 목돈으로 빠져나가는가. 숨만 쉬어도 매달 통장에 꽂혀야 할 최소한의 생활비는 얼마인가.

이 질문들을 마주할 때 비로소 가입자는 “아, 내가 이 거대한 인생의 무게를 감당해야 하는구나. 내 노후가 정말 위험할 수 있겠구나” 하고 온몸으로 체감한다.

20대 박 주임에게 필요한 준비는 긴 시간을 활용해 물가상승을 넘어설 자산을 쌓는 ‘장기 자산증식’이다. 반면 50대 최 부장에게 필요한 준비는 은퇴 직전의 시장 충격을 견디면서 당장 3년 뒤부터 꺼내 쓸 돈을 지키는 ‘안전한 착륙’이다.

삶의 조건이 완전히 다른 두 사람에게 똑같은 펀드 목록만 던져주는 것은 진정한 선택설계가 아니다. 그것은 선택의 형식을 빌린 방임에 가깝다.

금융기관은 왜 가입자의 ‘삶’을 충분히 묻지 않는가

우리나라 퇴직연금 적립금의 상당 부분은 여전히 원리금보장형에 머물러 있다. 금융기관들은 “좋은 펀드를 많이 갖춰 놓아도 가입자들이 지나치게 보수적이어서 예금만 고집한다”고 답답해 한다.

필자는 가입자가 예금에 머무는 중요한 이유 중 하나가 상품의 부족보다 자신의 준비 상태를 알기 어렵다는 데 있다고 본다.

금융기관 앱은 투자목적과 재산상황, 투자경험 등을 물어 가입자를 ‘공격투자형’이나 ‘안정형’으로 분류한다. 그러나 손실을 얼마나 불편하게 느끼는지를 묻는 투자성향과, 은퇴까지 남은 시간·소득 공백·필요 생활비 같은 삶의 조건은 같은 질문이 아니다.

내가 언제 퇴직하는지, 퇴직 후 매달 얼마가 필요한지, 내 노후의 빈 구멍이 얼마나 깊은지 가입자 스스로 알지 못하는데 펀드 목록이 아무리 늘어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목적지도 모르고, 내가 짊어진 짐의 무게도 모르니 눈앞에서 원금이라도 지켜주는 상품을 택하기 쉽다.

가입자가 길을 잃은 것을 금융 지식 부족만으로 설명할 수는 없다. 자신의 처지를 비춰볼 거울을 충분히 제공받지 못한 것도 중요한 이유다.

DC형의 거버넌스는 ‘선택설계’다

흔히 DC형은 개인이 알아서 굴리는 제도이므로 거버넌스가 필요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위원회가 없는 DC형에서도 거버넌스는 필요하다. 그것은 금융기관이 가입자를 위해 짜놓은 ‘선택설계(Choice Architecture)’의 형태로 작동해야 한다.

선택설계란 가입자에게 상품을 많이 늘어놓는 백화점이 되는 것이 아니다. 가입자가 자신의 처지를 깨닫고 올바른 판단을 내릴 수 있도록 의사결정의 환경과 출발선을 정교하게 깔아주는 일이다.

가입자의 삶을 묻지도 않고, 삶의 조건을 준비의 언어로 번역해 주지도 않은 채 “모든 것은 가입자님의 선택”이라고 말하는 것만으로 선택설계자의 책임이 끝나지는 않는다.

선택설계자로서 퇴직연금사업자가 져야 할 첫 번째 수탁 책임은, 가입자의 처지를 먼저 진단하고 그 처지에 맞는 출발 경로를 시스템으로 열어주는 일이다.

선택설계자가 가입자에게 먼저 물어야 할 5가지 삶의 질문

사업자가 이 책임을 다하기 위해 고도의 기술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금융기관이 보유한 적립금과 부담금 납입 이력에, 가입자가 입력한 예상 퇴직 시점과 필요 생활비, 국민연금 등 다른 노후소득 정보를 안전하게 연결하면 된다.

다음 모바일 앱 개편에서 사업자는 수백 개 상품 나열에 앞서 가입자의 삶을 묻고, 다음 다섯 가지를 계산해 눈앞에 보여주어야 한다.

1. 은퇴 시점과 소득 공백: 회사를 떠나는 날부터 국민연금이 나오는 날까지, 소득이 끊기는 공백기(크레바스)가 몇 년인가?

2. 필요 생활비와 부양의 무게: 은퇴 후 매달 통장에 꽂혀야 할 최소 생활비는 얼마이며, 자녀 독립과 부모 부양, 의료비 지출은 언제 집중되는가?

3. 벌어진 현실의 간격: 현재 쌓인 적립금과 앞으로 납입될 부담금으로 그 필요 생활비의 몇 퍼센트나 감당할 수 있는가?

4. 삶을 지키기 위한 속도와 한도: 그 부족한 구멍을 메우기 위해 내 자산이 달려야 할 현실적인 속도(필요 수익률)와, 감당할 수 있는 손실의 마지노선은 어디인가?

5. 인생 변화에 맞춘 재조정: 승진, 이직, 건강 악화, 가족의 독립 등 삶의 조건이 바뀔 때 이 설계를 다시 맞춰주는 사후 진단이 작동하는가?

이 다섯 가지 질문을 거칠 때 가입자는 비로소 “내가 당장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가”를 깨닫고, 자신의 조건에 맞는 위험과 상품을 이해하게 된다. 계산된 필요수익률이 감당 가능한 위험을 넘어선다면 더 위험한 상품부터 권할 일이 아니다. 추가 납입, 퇴직 시점, 은퇴 생활비 같은 조건을 함께 조정해 실행 가능한 계획을 다시 세워야 한다.

삶을 묻지 않는 선택은 연금 설계가 아니다

⑲편에서 회사는 자산운용을 외부에 맡길 수 있어도, 부채에서 나오는 목표수익률과 위험을 심의하는 책임까지 넘길 수는 없다고 했다. DC형에서도 원리는 조금도 다르지 않다.

상품의 최종 선택은 가입자가 할 수 있다. 그러나 가입자의 처지를 먼저 묻고, 그 막막한 삶의 조건을 구체적인 연금의 출발선으로 번역해 주는 일은 선택 설계자인 퇴직연금사업자가 맡아야 할 중요한 수탁 책임이다.

최 부장의 “제가 3년 뒤 퇴직하면 매달 250만원이 필요한데 어떻게 해야 합니까?”라는 질문에 금융기관의 앱이 구체적인 준비 경로로 답할 수 있어야 한다. 그때 퇴직연금은 상품을 진열하는 계좌를 넘어 가입자의 노후를 준비하는 연금에 가까워질 것이다.

다음 편에서는 한 걸음 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일반 금융상품에 쓰는 ‘투자성향분석’만으로 긴 시간과 은퇴 이후의 삶을 다루는 연금의 위험까지 제대로 판단할 수 있는지 살펴본다.

[김병철 한국퇴직연금개발원 대표]

[글로벌에픽 성기환 CP / keehwan.sung@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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